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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3> 9장 다시 광주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3> 9장 다시 광주

아버지 일이라면 눈물 먼저 흘리는 권씨부인이 소리쳤다.

“물건을 사서 선물로 바치는 것과, 직접 딸이 만들어서 바친 것이 똑같아요? 앞뒤 분간을 못하는 사람이 정승판서라니!”

“놀래라. 가만가만 말해도 내 알아듣소.”

“나리,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마나님의 정성을 받잡고 제가 고이 모시고 가서 사또 어르신께 전하겠나이다.”

정충신이 나섰다. 더 이상 투닥거리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정승판서 가문이라고 했지만 부부의 투닥거림은 일반 여염집이나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어떻게? 가다가 필시 왜적에게 적발돼 빼앗기고 붙들리고 말텐데....”

“제가 전복을 입고 가겠습니다. 무겁지만 군인은 일부러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하지 않습니까요. 운동삼아, 유격 훈련삼아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당신은 저 소년병사보다 못해요!”

부인이 소리치자 이항복이 주춤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 너의 기지가 특별나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

“옷은 입으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요? 기왕 가지고 갈 적시면 입고 가부러야지요.”

“오호, 그래. 의주 올라올 때는 장계를 망태기로 삼아서 가지고 오더니 내려갈 때는 또 저 무거운 것을 직접 입고 가겠다? 그 지혜와 기지는 제갈량보다 앞선다. 하지만 자그마치 이천오백리 길 아니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먼 길이 가능한 일이겠느냐?”

이항복이 가당치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마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전복을 받고 감격하실 사또 어르신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해야지요. 마나님의 정성을 업수이 여기시는 승지 어르신이 되리어 머하구마요.”

“그렇지?” 하고 권씨부인이 반색하더니 말했다. “내 미처 생각을 못했네. 총각 병사에게도 한 벌 맞춰주어야지.”

“짐되게 하지 마시오. 돌아오면 해입힐 일이 많을 텐데...”

이항복이 말하자 정충신이 나섰다.

“나리, 지금 떠나겠습니다. 제 옷을 맞추면 하루이틀 일과를 또 허비하게 되니께요. 허벌나게 가부러야지요.”

“전라도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굉장하게 라는 뜻이옵니다.”

“그렇다면 허벌나게 가부러라. 더 심한 말도 생각난다만 점잖은 사람이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당신이 언제 못할 말, 못할 짓 한 적 있나요?”

그녀에게 있어 남편은 정승판서이기 이전에 어린 시절 개구쟁이 철부지 그대로였다. 딱부러지게 일을 하지만 낙천적이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러니 환란 중에도 당쟁이 피를 부르고 있었으나 어떤 누구와도 척을 지거나 적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말하라고요? 번개 접 붙듯이 가부러라.”

그제서야 권씨부인이 눈을 흘기고, 정충신은 행장을 꾸렸다. 이항복이 정충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꼭 돌아오너라. 분명 두 달 안이렸다? 약조하겠니?”

“네. 약조합니다.”

“무등산에서 호랑이를 잡고 맨손으로 멧돼지를 잡으면 짐승에게 호령하는 호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세상을 호령하는 장수가 될 수 없다. 너는 성현들이 써놓은 경서도 어지간히 읽었다고 하나, 보아하니 너는 유학(儒學)이 따분한 사람이다. 대신 병서를 보면 의기가 약동하니 내 밑에 있는 전문 장교들에게서 체계있게 병술(兵術)을 익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알겠사옵니다.”

의주를 벗어나 천마에 이르자 아니나다를까, 몸이 천근 무게였다. 먹을 것이며 입을 것 등속을 싼 바랑도 한 짐이 되고, 전복은 말 그대로 보통 무게가 아니었다. 겨울철인데도 걷는데 땀을 비오듯이 쏟았다. 전복이 커서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실로 꿰매어 줄여서 입었지만 품이 넓어서 엉성하기도 하였다. 권율 장군의 큰 체격에 맞춘 것이었으니 소년의 몸엔 아무래도 과부하였다. 하지만 사또가 그동안 그에게 베푼 다감한 후의에 견주면 이런 일은 한갓 허드렛일에 지나지 않았다.

정충신이 선천을 지나 곽산의 산모퉁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창검을 한 병졸 두 명이 불쑥 그의 앞에 창검을 디리밀고 길을 막았다. 그들이 정충신의 위아래를 훑더니, 그중 눈이 찢어진 병졸이 물었다.

“슈슈, 워먼 야오 취 나알?(야야, 어디 가는 것이냐?)”

그들은 명군이었다. 정충신이 의젓하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태도를 묵살하겠다는 배포였다.

삼면이 험준한 산인데, 나머지 한 면에 개울과 함께 조그만 들판이 열려있고, 그 주변에 작은 마을들이 조을 듯이 엎드려 있었다. 평야 쪽으로 계속 길이 열렸는데, 길 옆에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줄로 서있었다. 몇몇의 신호병들이 깃발 아래 서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소속 군장(軍長)이나 기라졸의 신호에 따라 깃발을 나부끼는 신호병들이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것이지만, 평상시엔 투전이나 장기, 바둑을 두고 노는 무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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