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4> 9장 다시 광주

정충신이 들판 쪽을 내다보다 말고 놀랐다. 명군이 수십 명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놈들이 마을에서 약탈을 하는 중이었다. 곡식 가마니를 들쳐메고 나오는 놈, 간장·된장·김치 항아리를 지고 나오는 놈, 남자들을 줄줄이 줄에 묶어서 끌고 나오고, 여자들은 묶이진 않았지만 장졸들이 히히덕거리며 여자들의 저고리를 잡아채듯 끌고 나오고 있었다. 끌려나온 백성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묵묵히 명군들의 호령을 따르고 있었다.

이때 바로 옆의 골짜기 숲에서 세 명의 명군 병사가 나오고, 뒤이어 여자 두 명이 저고리 옷고름을 고쳐 매며 뒤따르고 있었다. 여자들은 뭔가 부자연스럽고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맛있다 해. 다들 두 번 했다 해.”

병사 세 놈이 히히덕거리는 품이 여자를 겁탈하고 나오는 모양이다. 일시에 정충신의 머릿발이 쭈볏 섰다.

“이런 개새끼들, 원병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약탈하고 개지랄하러 왔어!”

평양성에서 명의 조승훈 군대가 왜군에게 한달음에 발린 다음, 쥐도 새도 모르게 요동땅으로 건너가버린 명군이 다시 전력을 가다듬어 내려왔지만 이것들도 도둑이긴 마찬가지였다.

11월 말, 명은 요동제독 이여송으로 총대장을 삼아 삼영장 이여백, 장세작, 양원과 남군 장수 낙상지, 오유충, 왕필적을 앞세워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에 앞서 정탐병 겸 척후 병력을 조선에 투입했는데, 이들이 하는 수작이 애초부터 이따위 짓이었다. 평양성 전에서 패퇴한 조승훈 군대가 도망가면서 약탈하고 착취할 것은 다 하고 떠나기도 했다. 그중 일부는 평안도에 잔류해 있다가 남하한 명군과 합류했다. 그들은 여자를 데려가고 물건 챙기고, 곡식과 패물도 거리낌없이 가져갔다. 왜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너 임마, 어느 나라 군대냐? 차림새가 몽고족도 아니고, 여진족도 아니고, 거란족도 아니고, 도대체 뭐냐?”

명군 병졸이 창검으로 정충신의 앞가슴을 탁 쳤다. 정충신은 대꾸 대신 절망적인 모습으로 골짜기 숲에서 나온 두 여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 온 몸으로 퍼져들고 있었다. 그 여자들도 정충신의 눈치를 알아채는 것 같았으나 체념인 듯 아닌 듯, 부끄러움인 듯 아닌 듯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무슨 짓들이오?”

정충신이 소리 지르자 여자가 말했다.

“명군을 거역하지 말라고 유수(留守)께옵서 명령서가 내려왔습니다. 목사 어른도 똑같이 지시했습니다.”

원병(援兵)으로 내려온 명군의 비윗장을 거스르지 말라는 교서였다. 정충신은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라를 잃고, 힘이 없으니 외군의 지원을 받아야 하고, 그러니 재물이든 정조든 모두 포기하라는 절대적 허무감... 이것을 정충신은 견딜 수 없었다. 그가 명군 병사를 보고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너 이 새끼들, 고마 해라! 금수만도 못한 놈들!”

명군 병사가 여인네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여인네는 중국말을 모르는지라 얼버무렸다. 그러자 곁의 여인이 아는지 되놈 말로 거들었다.

“당신들이 못된 놈들이라고 한다.”

그녀는 정충신의 말 중에 금수란 말은 뺐다.

“뭐라고? 우리가 너희 나라를 구해주러 왔는데 못된 놈들이라고? 우리가 왔으면 의당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하는 예의를 차리는 것이 도리 아니냐?”

그 여자가 정충신에게 그대로 말했다.

“개 상놈의 새끼야, 도둑질하고 여자들 겁탈하는 것이 예의냐?”

그러자 명 병사가 받았다.

“니가 나더러 개 상놈의 새끼라고 했나? 그러면 니 목은 우리 것이다. 지금 니 목이 달아나는 것을 내가 허용하노라!”

그가 일시에 창검을 정충신 눈앞에 디리밀었다.

“당장 거두지 못하면 내가 너희놈들 눈깔을 뽑아버리겠다.”

정충신이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여인에게 말했다.

“난 조선군이오. 나 역시 명군에 포섭된 척후병 겸 연락병이오. 명군 지원병이란 말이오. 같은 군대란 뜻이오. 하지만 이런 약탈행위는 명군의 명예에 어울리지 않다고 전하시오. 대명군대가 이래서야 쓰겠소?”

이렇게 둘러대 위기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그대로 통역했다. 갑자기 대거리한 병사가 띵호! 하며 뭐라고 떠벌이자 다른 놈들이 덩달아 띠호아! 했다.

“저놈들, 언제 들어왔소?”

그러나 여인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도주할 때 여인네들은 흩어지시오.”

“고건 안되가습네다.” 여인이 말했다. “명군을 도와야 우리 나라가 지켜지디 않가시오?”

그녀들은 그녀들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 정충신은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길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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