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2. 왜군이 묻혀 있는 진도 왜덕산(倭德山)上

“저 이들도 불쌍한 이들…양지바른데 묻어줘야제”

진도사람들 명량해전 후 왜 수군 시신 수습해 매장

바닷가 떠밀려온 100여구 내동리 야산에 묻고 명복

‘왜군에 덕을 베풀었다’해서 倭德山, 인류애 담긴 곳

세계역사상 유례없어, 왜군 후손들도 감사 표시해 와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일대기를 적은 책에 그려 넣어진 삽화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에서의 전쟁참상을 묘사한 그림이다. 죽은 엄마 곁에서 어린 아이가 울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 왕으로 보이는 이가 참혹한 장면을 목도하고 울음을 보이고 있다.
■조선백성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왜군

우리는 임진·정유왜란 당시 왜군이 얼마나 잔학하게 조선백성들을 죽이고 괴롭혔는지를 잘 알고 있다. 왜군의 종군승려였던 경념(慶念)이 쓴 <朝鮮日 日記>(조선일 일기)에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들이 전라도를 침략한 뒤 잔인하게 조선백성들을 죽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일본군은 상륙하자마자 무차별하게 사람을 베어죽이거나 약탈했다. 가는 곳마다 불을 질러 전라도는 온통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어린아이들을 모조리 묶어 끌고 가는 가하면 눈앞에서 부모들을 마구 베어 죽여 버렸다. 남원성이 함락되던 날, 성 안팎에 쌓인 시체들을 대했을 때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왜군들은 마귀와 같았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물론이고 백성들도 눈에 띠는 대로 학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사람의 씨를 말려버리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선 사람을 다 없애버리고 조선 땅에 일본인들을 살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라는 명령서를 각 군의 진영에 보냈다. 내용은 군사들이 조선에 상륙하면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해 약탈과 난폭한 행위, 방화 등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히데요시의 이 같은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히데요시 역시 군사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묵인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조선 관리나 관군, 일반 백성을 가리지 말고 모두 죽일 것을 지시했다. 이런 명령이었다. ‘해마다 조선에 군사를 보내 조선 사람을 다 죽여 빈땅을 만들라. 그 이후 일본 서도(西道)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것이다’

실제 조선군에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히데요시로 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간스케의 진술은 <선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라. 그러나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조선을 침범케 하라. 조선을 침범한 이후 중국까지 침범할 것이다’

경념(慶念)의 <朝鮮日 日記>에는 왜군들이 어떻게 조선양민을 살육하고 조선 아이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는지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은 칼로 베거나 내리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부모는 자식걱정에 통곡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맨다. 이런 비참한 모습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다’(1597년 8월 6일 字 記事)

왜군은 1597년 8월 6일 구례를 공격하고 곧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왜군은 남원성 공격에 앞서 깊은 산속을 뒤져 숨어있는 조선백성들을 모두 죽였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에도 대학살을 자행했다. 왜군은 조선의병과 명군이 내려오자 순천으로 돌아갔다. 이때에도 구례 산간지역 곳곳을 뒤져 살아있는 관군가족과 유림사족들을 처형했다.

이 때의 장면이 <朝鮮日 日記> 8월 8일字 記事에 이렇게 나와 있다.

‘조선아이들을 잡아서 묶고 그 부모는 쳐죽였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저승의 모습 같았다’

왜군들은 조선백성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였다. 이는 히데요시가 일본군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조선 사람의 코’에 포상을 걸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초조해졌다. 수하 장수들은 장기화되고 있는 조선정벌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거기다 교토지진으로 민심까지 흉흉한 상태였다.

그래서 조선정벌을 서둘러 끝내고 싶어했다. 궁리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조선인 코베기’였다. 히데요시는 1597년 6월15일 ‘조선인 코 봉납’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지시했다.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라. 코를 한 되 씩 채운 이후에야 생포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런 히데요시의 지시가 있는 뒤라 남원성 함락 이후 일본인들의 조선백성 살육은 잔인하게 이뤄졌다. 일본 측에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왜군 장수 6~7명이 남원성에서 잘라간 코의 수가 1천600여개 이다. 남원성 공략에는 왜군 장수 20여명이 참전했다. 남원성 전투에서 죽은 조선인 백성수는 무려 6천 명이었다. 그러니 왜군들이 잘라간 조선인의 코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

전라도를 비롯한 조선 땅에는 왜군들이 얼마나 잔악하게 백성들을 죽이고 있는지가 잘 알려진 상태였다. 조선인들에게 왜군들은 철전지 원수였다. 왜군들은 1597년 8월 25일 전주성에 무혈입성한 뒤 전라도 50개 고을을 유린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는 왜군들이 저지른 패악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왜군은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유린했으며 천리에 걸쳐 창을 휘두르고 불을 질렀다. 왜군이 지난 간 자리는 초토화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으면 그 코를 모두 베어 위세를 과시했다’

진도 고군면 벽파항의 1956년도 모습. 이충무공 벽파진 진첩비 건립이전의 모습이다. 정상 소나무 있는 곳에 1956년 이 충무공 전공비가 세워졌다.
■원수 왜군의 시체를 잘 거둬 묻어준 진도사람들

조선인들에게 왜군은 마귀였다. 수백 번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명량해전 뒤 바다에 떠다니는 왜군의 시체를 진도사람들은 거두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등 후히 장사지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비록 원수지만 조선인들은 바다에서 죽은 왜군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리고 바다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는 잘 수습해줘야 한다는 바닷사람들의 믿음이 이 같은 일을 가능케 했다.

진도 왜덕산 위치도
진도에는 정유재란 당시 명량대첩에서 목숨을 잃은 왜군들이 묻힌 묘지가 있다. 이순신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에 패해 수장(水葬)된 일본수군 100여명이 조수에 밀려 바닷가로 떠밀려오자 진도사람들이 이를 거둬 양지바른 곳에 묻어준 것이다. 그 왜군 공동묘지의 이름은 왜덕산(倭德山)이다. 왜덕산은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이다. 왜덕산은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에 위치해 있다.

왜덕산
왜덕산은 내동리의 나이 많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명량해전 때 죽은 왜군의 시체를 진도사람들이 집단으로 묻어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왜덕산이 어떤 곳인지를 알고 있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왜덕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지난 2003년에 진도문화원 관계자와 향토사학자들이 삼별초 전적지 답사를 갔다가 내동리 이기수씨로부터 왜덕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왜덕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모습. 지금의 논은 간척을 해서 생겼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넘실댔던 해안가였다.
박주언씨는 지난 1990년에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진도군민들이 집단적으로 묻혀 있는 묘역을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묘역은 지금 ‘정유재란 순절묘역’이라 불리는데 진도군 고군평 도평리와 오일시장 사이의 산기슭에 있다. 이 묘역에는 232기의 무덤이 있는데 창녕 조씨나 김해 김씨등 진도 토반씨족 인물들 16기외에는 모두 주인이 없는 무덤들이다. 정유재날이 끝날 무렵인 1597년부터 묘역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진도에 위치한 정유재란 순절묘역과 왜덕산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 알린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씨의 글, <임진왜란이 진도에 남긴 두 개의 공동묘지>라는 글을 작가의 양해를 얻어 그대로 전재하고자 한다. 역사적인 장소를 발견하게 된 경위와 그 전후의 감동을 박주언씨 이상으로 생생하게 전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송우산과 왜덕산 공동묘지(글 박주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丁酉) 14만1천5백여 병력으로 두 번째 조선공격을 감행했다. 그동안 일본은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고자 간첩을 통해 거짓정보를 흘렸다. 일부 서인(西人)들의 모함이 더해져 선조(宣祖)의 노여움이 커졌다. 이순신 장군은 옥에 갇혀졌고 사형위기에 처해졌다.

모함에 앞장섰던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는 꿈을 달성했지만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보여주지 못하고 6월 안골포 전투, 7월 웅포 전투에서 연패하다가 마지막 칠천량 전투로 조선수군을 모두 잃고 자신도 산으로 도망쳤다. 그는 일본병사의 칼을 맞고 죽었다고 전해진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무작정 돌진에 겁먹은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은 도망을 쳤다. 조선수군은 전멸했고, 배설이 빼돌린 12척이 명량대첩 때 조선수군의 주력선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명량해전을 겨우 2주 남겨둔 9월 2일 또 도망쳤다.

명량해전에 참전했던 일본수군은 대부분 히로시마, 규슈남부, 시고쿠 등지의 병사들이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를 선봉으로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토시(脇坂安治), 쓰가 다츠나카(菅達長)장군들이 어란진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진도대교와 울두목. 울무독이 있는 명량에서 일본 수군은 참패를 당했다. 수장당한 왜군 수군은 고군면 내동리 바닷가로 떠밀려왔다.
9월 16일 일곱물 초들물을 타고 2만5천여 일본수군은 아침 일찍 공격해 왔다. 언제고 음력 9월16일이면 울두목에서는 아침 6시30분에 썰물이 서서히 들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7백여 명으로 구성된 선봉부대는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장군이 이끄는 시고쿠 에이메현 이마바리의 구루시마에 근거지를 둔 해적부대였다. 그들은 세토해 바다를 지나는 모든 배에서 적재 재화의 10% 통행세를 받는 해적이었다.

개전 얼마 후 구루시마 장군은 물에 빠져 떠내려 오고 있었다. 백의종군에서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자기 배에 탄 일본수군 포로 준사의 급한 보고를 받았다.

왜덕산 안내판
“장군! 저기 붉은 무늬 옷을 입고 떠내려 오는 자가 적장 같습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물 긷는 병사 김돌손에게 명령해 배 위로 시체를 끌어올리라 했다. 준사는 갑판에 인양된 시체를 보더니 자기 말이 맞다면서 좋아 날뛰었다. 이순신 장군은 구루시마 왜장을 토막 내 일본군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내걸었다.

선봉부대는 일반 수군이 아닌 해적의 무리여서 자기 대장이 그 꼴이 되자 전투의지를 상실해버리고 살 길이 다급해졌다. 일본수군은 급류 속에서 서로 뒤엉켰고, 우리 수군은 함성을 올리면서 북을 치고 포를 쏘아 전세는 순간적으로 급변했다. 이것이 명량대첩의 핵심전황이겠다.

왜덕산 안내문
명량대첩은 진도에 특별한 공동묘지 두 개를 남겼다. 고군면 오일시장과 도평리 사이의 송우산(松又山)에 조성된 ‘정유재란 순절용사묘지’와 고군면 내동리에 있는 ‘왜덕산(倭德山)’이다. 서로 간 5km 거리를 둔 두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은 대부분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선과 일본 양국의 병사와 의병들이다.

도지정 문화재자료 216호 ‘ 유재란 순절묘역’ 입구
왜덕산에는 그날 전사한 일본수군들이 매장되었고, 송우산에는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진도출신 조선 군인과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진도출신 군인이나 의병들이 묻혀 있다.

왜덕산은 조류에 밀려온 일본수군 전사자 시신들을 내동리뿐 아니라 그쪽 바닷가 주민들이 한 장소에 안장한 것이어서 분봉마다 시신이 있다. 따라서 후손이나 문중개념으로 집안에서 묘를 만든 것이 아니고, 시신을 발견한 바닷가 주민들이 공동사역으로 조성한 공동묘지이다.

정유재란순절묘역을 멀리서 바라본 모습
한편 송우산 공동묘지는, 시신이 수습된 전사자의 경우 즉시 묘를 만들어 안장했을 터이나 시신이 바다로 흘러가버렸다든지 전장에 나갔다가 행불이 된 참전자는, 가족들이 결국 전사로 간주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른 분봉들이다.

초혼장이란 물에 빠져 죽은 자는 ‘혼 건짐’으로, 집을 나가 객사한 자는 동구에서 ‘혼 맞이’를 하여 밤나무를 깎아 거기에 망자의 이름을 써서 시신으로 삼아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밤(栗)은, 땅에 묻혀 싹이 나서 자란 뒤 열매가 열 때까지 땅 속의 본래 씨알이 없어지지 않는다 하여 초혼장에서 육신을 대신하고 제사상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정유재란순절묘역.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맞서 싸우던 관군과 의병, 왜군에 죽임을 당한 백성들이 함께 묻혀 있다.


○진도참전자들의 송우산 공동묘지

진도 문화원 박주언 부원장. 진도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애쓰고 있는 향토사학자다.
1990년 4월 5일, 필자(박주언)는 조 모씨로부터 “고군면 도론리 앞산에 우리 집안 어느 분의 묘가 있는데, 비석에 그분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쇠고리 작전을 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깜짝 놀라 우선 현장을 찾기로 했다. 이틀 뒤인 4월7일, 오일시장에서 도론리 방향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산등성이를 한참 올라가 조응량(曺應亮), 조명신(曺命新) 부자의 묘와 비석이 있음을 확인했다.

진도읍에서 벽파리로 향하는 오일시 외곽 굵은 소나무가 어둡게 숲을 이룬 도론리 송우산 입구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샛길 끝에 붙은 집 한 채를 바라보며 왼쪽 산으로 올랐다. 샛길 가에는 오래 된 묘가 절반쯤 훼손된 것도 있고 좌우 여기저기에 비슷한 묵은 묘들이 널려 있었다. 그러한 묘들을 확인하면서 산을 오르다보니 드넓은 묘역이 나타나고 비석 하나가 앞을 막았다.

김해인 김성진(金聲振)의 묘였다. 그는 1597년 8월의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임란공신이다. 조금 더 오르자 밀양인 박헌(朴軒)의 비석이 또 나타난다. 이 분은 명량해전 전사자이다. 이 밖에도 행적을 알 수 없는 군인신분의 오래된 비석이 가끔 나타났다. 목표였던 조응량, 조명신 부자의 묘는 북향으로 나란히 각각 비석을 앞세우고 있었다.

조응량의 묘비는 1948년에 세웠으며 그 전 비석이 땅에 묻혀있다는데 ‘宣武原從功臣宣傳官昌寧曺公諱應亮表忠碑’라 하여 비문에는 그가 명량해전에서 이충무공과 함께 철쇄(鐵鎖)작전으로 대승하는 공을 세웠으나 적을 소탕중 배가 전복되어 전사했다고 기록되었다. 이를 본 아들이 단신으로 적선에 뛰어들어 분투했지만 함께 같은 날 전사했다. 아들 명신의 묘비는 ‘宣武原從功臣參奉昌寧曺公之墓 考諱應亮 公諱命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길 끝에 있는 독립가옥은 산지기 집이었다. 묘나 선산을 보호하면서 벌초를 하는 대신 거기에 따르는 농토를 경작하는 사람이 ‘산지기’로 산을 지키는 사람을 뜻한다.

집주인 기금룡씨는 37년간 그 집에서 살았다면서 사방에 널려있는 묵은 묘에 대해 뜻밖의 대답을 해주었다.

“금방 올라갔다 내려온 쪽이 ‘큰 벌안’이고, 우리 집 뒤는 ‘작은 벌안’인데 양쪽 대부분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다. 비석이 있거나 신원을 아는 무덤도 있지만 주인 없는 무덤이 대부분이다. 울두목에서 전사한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묻을 수 있으며 가급적 임금이 계시는 북향으로 묘를 쓰라 했다고 전한다”는 얘기였다. 다시 말하자면 230여 기의 묘가 있는 이곳 일대가 정유재란 당시 전사한 진도사람들의 공동묘지라는 것이다. 이곳 이야기는 인근 도론리, 평산리, 송산리 노인들에게서도 같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일본수군의 왜덕산(倭德山) 공동묘지

왜덕산에는 50여기의 왜군 전사자 무덤이 남아있다.
송우산으로부터 약 5km 거리의 고군면 내동리 마을에 붙어 있는 야산 왜덕산은, 명량대첩 당시 전사한 일본수군들의 공동묘지다.

2003년 어느 날 진도문화원은, 삼별초전적지 현지답사 차 고군면 내동리 이기수씨의 안내를 받아 박문규 문화원장, 이진희 군의원, 박병훈 전 문화원장, 필자 등 7~8명이 마산리 일대를 돌았다. 삼별초 망군들이 윷을 놓았다는 바위윷판, 시체들이 하얗게 널려있었다는 흰재, 동학 마지막 결전장 의병골창, 군직기미, 훈련장과 옛 절터까지 돌고나서 일행은 봉고차편으로 진도읍으로 돌아갔다.

필자는 이기수씨를 다시 만나려고 마을 입구 첫 번째인 그의 집을 찾았다. 혹시 오늘 이 일대의 안내에서 빠진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으나 모두 돌아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해 줄 것이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필자는 무슨 내용이든 상관없으니 옛날이야기라면 다 좋다며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그분은 피곤한데다 떠오르는 것도 없고 조금은 귀찮은 표정이더니 집 앞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여가 왜덕산이여!”라고 말해놓고는 ‘이런 것도 말해 줄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반응을 살폈다. 필자 역시 별 것 아닌 이야기로 예상하면서 그게 무슨 말씀인지 물었다.

“아, 왜놈들한테 덕을 베풀었다고 왜덕산(倭德山)이제!”

“누가 무슨 덕을 베풀어요?”

“울두목에서 죽은 일본놈들 말이여, 이순신 장군하고 싸우다가!”

“그래서요!”

“그때는 우리 집 앞까지 바다였어. 원 둑을 막기 전에!”

“그랬겠지요!.”

“전사한 일본군들이 썰물 들 물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이 안통 바다로 들어오게 되아 있어!”

“과연!”

“그런 시체가 떠오면, 내동, 마산, 오산, 지수, 지막, 하율, 황조 요 갯가 사람들은 그것들을 건져서 여그다가 묻어주었어!”

이기수씨는 점점 기력이 회복되는 듯 했다. 필자는 월척을 건 낚시꾼처럼그분의 이야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경청하고 있었다. ‘왜덕산’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대문에서 30여m 떨어진 왜덕산 정면에 가서 말씀해 주시라고 부탁했다. 칡넝쿨이 뒤덮여 있는 야산은 포장도로 옆 수로에 붙어서 오른쪽 마산리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왜 여그다 묻었냐 하면,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고, 물가니까 물 건너 일본 고향생각을 쉽게 하라고 그란 것이여!”

우리는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동안 잊었던 왜덕산 이야기를 잘 생각했다가 전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곳을 며칠간 찾아다녔다.

이기수씨는 내동리 터줏대감으로 마을 이장도 오래 맡았고 진도 전주이씨 문중 족보편찬 일도 깊이 관여했으며 한 때는 종교활동도 열심히 하셨던 분이다. 당연히 내동리 어른역할을 맡아온 분이었다.

내동리에서 몇 몇 분 말고는 노인들이 왜덕산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이유를 여쭈었더니, 이 마을에서 옛날부터 오래 살아온 사람이 없으며,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 옛날 일에 대해 크게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옛날에 왜덕산 일대는 해묵은 묘가 1백여 기 있었는데 개간해서 밭이 되어버려 묘가 절반쯤은 없어진 셈이란다. 또 일제 때 마산저수지를 막아 저수지 농사용 물을 내동리 앞으로 끌어오려고 현 도로 옆 수로를 그 때 팠는데 그 때도 사람 뼈가 나왔다는 것이다.

왜덕산이라는 기록은 자기 족보에는 물론 여기에 묘가 있는 오래된 족보에는 올라 있다는 설명이다. 같은 마을 차씨 족보 역시 왜덕산이 나와 있었다.

명량대첩이 남긴 송우산과 왜덕산 두 개의 공동묘지는 매우 중요한 진도의 향토 사료임이 분명하다. 송우산 공동묘지는, 거의 시신이 없는 공동묘지이자 바다에서 혼을 건져 와 그 혼들을 매장한 혼 묘지이다. 전 세계적으로 시신 없는 공동묘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바다에서 전사했다 하여 200 명 이상의 혼을 건져 와서 혼을 매장한 공동묘지는 더더욱 없겠다.

왜덕산 공동묘지도 그렇다. 세계역사상 어느 나라에서 전날 싸우던 적군의 시체들을 수습하여 양지바른 야산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주겠는가? 그것도 일본에서 물 건너 왔으니까 마음이나마 고국을 찾으라고 남향해변에 조성해 주었다니! 그들 적군에게 자기 친인척이나 이웃들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진도에는 세계 사람들이 줄지어 구경할 두 개의 공동묘지가 있다(후략).

■ 왜군 시체를 거둔 진도 갯마을 사람들의 심성

김정호씨는 언론인이자 남도 섬 문화와 광주·전남지역 향토사 연구에 대단한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분이다. 진도문화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김정호씨는 지난 2010년 진도문화원이 발간한 <호국의 얼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진도사람들이 왜군의 시체를 잘 수습해 묻어준 문화적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진도 고군면 마산리에는 왜덕산이라 부르는 산이 있다. 이 산 이름은 정유재란 때 이곳 사람들이 울두목 해역에서 죽은 일본 사람들 시신을 묻어, 덕을 베푼 곳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근래 이 같은 사실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이 해역에서 죽은 일본 장수 고을 사람들이 팔월 보름날이면 이 산을 찾아와 성묘를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산 이름의 사실 여부를 떠나 갯마을 사람들의 심성과 풍속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을 때 구렁이나 뱀이 배 곁을 지나갈 때가 있다. 이 경우 ‘긴 것 지나간다’고 말하지 구렁이라고 직접 표현하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물론 항해 중에 수사(水死)를 당한 시체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뱃사람들은 ‘대구 떴네’라고 말하지 ‘송장이 떴다’거나 ‘시체가 떴다’고 말하지 않는다. 항해 중에 ‘대구’를 보면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책임을 지고 그 시체를 거둬 무덤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법으로야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는 규정은 없지만 옛 관행을 따르지 않으면 고기잡이도 되지 않고 항해중에 해난을 겪는다는 속설이 전해오기 때문이다.(중략)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살아가는 갯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도 해난을 당해 죽을 수도 있고 표류할 수도 있어서 같은 처지를 당한 낮선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자기 일처럼 당연한 도리로 알았던 것 같다. 이 같은 관행은 법이 생기기 이전의 자연법이며 신앙이었다’


도움말/김정호, 박정석, 박주언


사진제공/위직량, 진도군, 김재호, 진도문화원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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