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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6> 9장 다시 광주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6> 9장 다시 광주

선조는 흙먼지 휘날리며 어가를 달려 순천-안주-박천을 거쳐 의주에 당도했다. 의주는 바로 물만 건너면 아버지의 나라 중국땅이었다. 끼리끼리 모이면 안심이 된다는 자기확신편향증세를 보인 왕은 압록강의 도도한 물결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물만 건너면 산다. 자칫했으면 죽을 뻔했네...”

평양은 수비를 자원한 좌의정 윤두수,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이원익 등이 지키고 있었으나 이들은 상문(尙文)을 절대가치로 여기는 문신들이었다. 무인의 길과는 애당초 먼 사람들이었고, 무인들을 시덥잖은 칼장난하는 자들로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김명원은 한강전투, 임진강 전투에서 대패해 패수(敗數)장수라는 말을 듣는 인물이었고, 사랑채에서 경서나 외고 예법을 연구하여 사람을 귀찮게 묶는 논리를 개발하는 윤두수는 전투지휘 경력이라고는 단 하루도 가진 적이 없는 고상하고 근엄한 정승이었다. 병력 배치는 물론 전술과 전략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병졸을 지휘했으니 승패는 물어보나마나였다.

조선에서는 개국 이래 200년의 평화가 유지돼 국방정책 자체를 무시하거나, 나라를 지키는 무관을 문관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부류로 일단 내리깔고 보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사람을 인간이 완성되었다고 추앙했고, 왜구나 오랑캐들은 이런 심오한 학문을 모르는 금수 같은 종이라고 멸시하며, 반면에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는 우월감으로 수염을 휘날렸다.

그러나 성리학이라는 것이 내부적으로 지배계급끼리의 세력쟁투의 도구로 제공되었을 뿐, 주민생활이나 나라 발전의 동력으로 제공되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지배계급 내부적으로는 부패도가 심해 매관매직은 물론 성씨까지도 다투어 조작해주는 대가로 검은 엽전을 챙기는 비리와, 이를 따지는 또다른 분열로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다. 백성들을 쥐어짜기 위해 공평성 잃은 조세제도를 수시로 바꾸었다. 고상한 성리학의 뒤켠에는 이처럼 음흉하고 지저분한 비리잡화점이 열려있었다. 양반의 나라라는 뒤켠에는 이런 쓸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난리가 나자 조정은 부랴부랴 문관을 무관으로 대체 임관시켜 나라를 방비토록 했으나 이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체통과 격식 뿐이었으니 허수아비와 맞서도 자빠지는 판이었다.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성을 지킨 조선군을 고니시 군대가 쳐들어와 단번에 쓸어버리자 조선군은 허무하게 궤멸되었다. 대동강이 해자 노릇을 한다고 했지만 고니시 군대는 벌써 척후병과 정탐병을 밀파해 평양의 지형지세와 강의 물줄기와 물이 얕은 곳, 깊은 곳을 살피고 물이 얕은 십리 상류쪽을 건너 한달음에 성에 들이닥쳐 평양을 밟아버린 것이었다.

1차전 때 패배한 군사는 여름의 폭우에 모두 씻겨서 대동강물을 따라 서해바다로 떠밀려 갔다.

2차전은 7월17일(음력)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벌어졌다. 2차전에도 김명원이 주장(主將)으로 나섰으나 명 군대의 심부름이나 하는 수준이었고, 명의 장수 조승훈을 비롯해 사유, 장국충, 마세륭, 대조변이 기세좋게 군대를 이끌었다.

이때 왜군은 병력을 황해도 방면으로 빼돌리고 있었다. 명군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조승훈 군은 이때다 하고 우중의 평양성을 진격했다. 기마병 중심의 군대는 길길이 뛰었으나 길이 미로처럼 복잡한데다 진흙탕 구럭이라 기마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민가 속으로 숨어든 왜병들이 이때를 노려 일시에 조총과 포를 쏘아 조승훈군을 하루 하고도 반나절만에 날려버렸다.

황해도로 빼돌린 왜의 병력은 구로다 나가마사의 12,000여 군대였다. 고니시 부대 18,700으로도 수천 명에 불과한 오합지졸의 조·명 연합군을 밟을 수 있으리라고 보고 구로다는 황해도 접수를 위해 평양성을 빠져나간 것인데, 조선군의 척후장인 순안군수 황원은 왜군이 겁먹고 모두 빠져나간 것으로 오인하고 쳐들어갔다가 졸지에 발려버린 것이었다.

척후활동과 정탐활동, 연락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평양성 3차전에서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으나, 이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었거나 방치했다. 이치·웅치전투에서 권율 부대에서 활약한 정충신의 정탐활동과 척후활동을 조금이라도 익혔더라면 이런 처참한 패배는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법 공유의 연락체계가 차단되어 있었고, 체통과 격식과 권위를 먹고 사는 김명원 윤두수가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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