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47> 9장 다시 광주

3차전은 8월초(음력)에 일어났다. 양력으로 9월10일 전후였다.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대동강물에 어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선군의 이일 김응서 이원익 임중량 윤봉 차은진 차은로 형제장수들이 대오를 갖춰 출진했다.

조승훈의 명군은 도망간 뒤 명의 사신 심유경이 평양성에 나타나 조선의 조정과 상관없이 고니시와 화평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비밀리에 추진한 화평회담은 조선을 두 토막내 명과 일본이 서로 사이좋게 나눠갖자는 협상이었다.

이때 조선군은 왜군도 1,2차전을 통해 전력소모가 막대하다는 것을 알고 독자적으로 2만의 대부대를 편성해 평양성 탈환에 나섰다. 평양성 밖에서 왜군 4,50명이 설치고 있을 때, 단번에 쫓아가 제압하니 병사들 사기가 충천했다. 왜군은 간보기로 대동문 밖에 경상도에서 잡아온 인질들을 왜 전복을 입혀 내세웠던 것인데, 조선군은 영문도 모른 채 왜군 복장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국민을 조져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멋모르고 사기충천해있는 사이 성안에 있던 왜군 기마부대가 진용을 갖춰 돌진해 오더니 단숨에 조선군 2만 병력을 둘로 갈라쳤다. 둘을 셋, 넷, 다섯...아홉으로 가르니 조선군은 흩어지며 갈팡질팡했다. 일부는 창검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저렇게 분산된 군사를 섬멸하는 것은 육전에 강한 왜군에게는 식은 죽먹기였다.

지휘가 마비되고 기본 전투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조선군은 맥 한번 추리지 못하고 또다시 비참하게 무너졌다. 김응서 군영은 이일 이원익 임중량 부대로부터 적정상황에 대한 연락을 미처 받지 못하고, 이일 군대와 이원익 군대가 퇴각하는 와중에 단독으로 적진에 돌격했다가 7,000 병사가 몰사하고 말았다.

왜 육군은 도요토미-센코쿠시대의 기본 전투대형을 익히고 있었는데, 그것은 호란진(虎亂陣)·대망진(大妄陣)·와룡진(臥龍陣)·안진(雁陣)·언월진(偃月陣)·방원진(方圓陣)·어린진(魚鱗陣) 등 40여가지의 전투대형이었다. 왜 육군은 지휘 장교 아래 천시와 지리와 기후에 따라 전법을 다양하게 응용, 구사할 수 있는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험준한 산에서의 전법은 물론 평지, 물가, 계곡의 싸움을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를 가지고 훈련과 실전을 통해 전법을 익혀왔던 것이니, 상대적으로 무대뽀인 조·명연합군은 졸지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제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 백성들은 혹독한 전쟁의 부산물로 남은 죽은 말의 시체들을 거둬다 연명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날씨가 서늘한 가을 기운이 돌아 시체의 부식도가 낮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할 짓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썩은 고기도 있고, 벌써 벌레가 든 살점, 병균이 득시글거리는 뼈다귀가 히물거리고 있는 것을 입에 물고 있었으니 당장 허기는 면했다 하더라도, 하루 이틀 지나서 한결같이 식중독으로 쓰러지고, 줄줄이 새는 이질설사로 땅바닥에 누워있거나 시체가 되어버린 자도 많았다.

배가 주려서 먹을 뿐, 아무리 뜯어보아도 거둬다 먹을 수 없는 것들이라서 이를 지켜보던 정충신은 놀랐다. 정충신이 구렁창을 돌아 모퉁이 쪽에 이르렀을 때, 키 큰 장정이 평양 백성들을 향해 소리지르고 있었다.

“개새끼들아, 먹지 말랑개. 호랑이는 죽어도 풀을 먹지 않는단 말이여. 하물며 인간이 왜 고따구여? 썩은 것을 먹는 건 하이에나라는 짐승이여! 나는 전라도서 왔는디, 이건 완전 지옥이여. 너거들 봉개 나가 놀라 자빠지겄어. 여러분들, 그렇게 나가면 다 디징개 말 살점 내려놓으쇼. 정 힘들면 풀 뜯어먹고 살랑개! 저 개새끼, 그려, 너 키 큰 놈 말여, 너 디지기 전에 손에 든 것 내려놔! 쫓아가 쌔려불기 전에 내려놓으란 말이여! 고건 더 부패도가 심하다이!”

말 혓바닥을 잘라 움켜쥐고 있던 키 큰 자가 슬며시 그것을 내려놓고 계곡 깊숙한 쪽으로 사라졌다. 파리를 손으로 휘저어가며 전라도 말로 외치는 자 곁으로 다가가 살피자 정충신은 놀랐다. 이곳에서 그를 만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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