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 아니다.

(3) 카이로선언의 의미

김갑제<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연합국들 ‘한국 독립 보장’ 50여년 독립운동 결과

임시정부 장제스 움직여 한민족 운명 결정 선언 이끌어내

미·소 한반도 점령 3년만에 물러난 것도 카이로 선언때문

처칠 이의제기로 미· 영·중·소 4개국 영수 동의 후 발표

9일 중국 절강성 항조우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한 광복회 회원들. 중국정부는 항조우 임시정부 청사를 유일하게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광복회 회원들은 광주지방보훈청 주최로 지난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 일정으로 중국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보는 2018항일독립운동사적지 탐방을 하고 있다./광복회 제공
항조우 임시정부 청사 요인 집무실에 내걸린 태극기.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식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한민족의 50여년에 걸친 독립운동으로 얻어진 카이로 선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광복회 제공
카이로선언 당시 김구 주석과 이청천 장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장제스의 1943년 7월 20일 면담 기록. 김구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선전부장, 이청천 광복군총사령관, 김원봉 광복군부사령관 참석.
홉킨스는 영국 측에도 초안을 전달했다. 11월 25일이었다. 초안을 받아본 영국 측은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초안을 중국 측에 먼저 전달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유럽전쟁보다 중국에 주는 선물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처칠은 ‘한국의 자유 독립’에 대해서도 극력 반대했다. 인도와 버마를 비롯하여 태평양 일대의 많은 섬들을 식민지로 갖고 있던 영국으로서는 자국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요구할까봐 두려워 한국의 자유 독립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국은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한다’라는 내용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11월 26일 오후, 3국의 실무자들이 모였다. 중국의 왕총후이, 영국의 외무차관 카도간(Alexander Cadogan), 미국의 주소미국대사 해리만(William A. Harryman)이 참석했다. 한국문제를 둘러싸고 파란이 일어났다. 왕총후이가 ‘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병탄되었고, 원동(극동)으로 보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에 전쟁의 끝도 한국이어야 한다. 때문에 한국의 독립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영국 측의 수정요구에 반대하고 나섰다.

영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강력하게 반발했다. ‘내각에서 한국독립에 대해 토론한 일이 없다’ ‘소련과 의견을 나눈 바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수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한국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빼버리자고 했다. 이를 수습한 것은 해리만이었다. 해리만은 ‘이는 루스벨트와 장제스가 합의한 것’ ‘소련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소련과 협의할 필요도 없다’고 반박했다. 결국 결론 도달에 실패한 실무자들은 3국 영수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당시 3국 영수들은 회의를 끝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시간보다 2시간가량 늦어지고 있었다. 실무자들은 정상들 앞에서 초안을 낭독했다. 한국문제에 이르렀을 때 루스벨트는 ‘이 문제에 대해 소련의 의견을 헤아릴 것이 없다’고 했고, 미국 측의 강경한 방침에 어쩔 수 없음을 깨달은 처칠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국 영수는 찬성의사를 표명했다. 이로써 카이로 선언에 한국문제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처칠은 ‘at the proper moment’ 대신에 ‘순서를 밟아서’ ‘절차를 거쳐서’라는 뜻을 가진 ‘in due course’로 고쳤다. 처칠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한국인들이 많지만 그는 한국 독립을 가장 반대한 사람 중의 한사람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 선언은 곧바로 발표되지 않고 우여곡절을 거쳐야 했다. 소련과의 문제였다.

며칠 후지만 카이로선언은 소련의 동의를 얻어 발표되는데 과정은 이렇다. 당시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는 등 미온적인 태도에 스탈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스탈린의 참석을 반대하자, 미국과 영국은 카이로회의에 이어 11월 27일부터 테헤란에서 스탈린과 회담을 갖기로 했다. 따라서 장제스는 11월 27일 중국으로 떠났고,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갔다. 미·영·소가 참석한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은 카이로선언을 확인하였고,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이로써 카이로선언은 미· 영·중·소 4개국 영수들의 동의를 얻었고, 비로소 12월 1일 발표되었다. 임시정부는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당일에 그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주석 김구 명의로 ‘나는 3천만 동포를 대표하여 3영수에게 만공의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일본이 무조건으로 투항할 때까지 동맹국과 공동분투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2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호외를 발간하여,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증하였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다.

꿈같은 카이로선언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다는 점과 이러한 사례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선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제가 패망하였지만, 한국은 곧바로 독립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했고, 각각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미국과 소련은 일본과 전쟁한 나라였고, 그 전리품으로 일본이 차지하고 있던 한반도를 점령했다. 수많은 청년들을 희생시킨 대가로 한반도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3년 만에 한반도를 한국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카이로선언 때문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한민족은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일제가 패망한 지 3년 만에 독립된 국가와 정부를 갖게 된 것이다. 한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어도, 카이로회의가 개최될 때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어도, 연합국이 독립을 보장해 주었을까.

카이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이 결정되는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차 강조하지만 1945년 8월 15일은 분명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해방된 날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해방이 됐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또 누가 어떤 사람들이 민족 자결의 이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독립한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종속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자립을 위해 헌신하였는지를 공부하고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조금은 안다 해도 막연하게 상식적인 선에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얻어진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운동가 또한 국가나 민족을 위하여 몸 바쳐 일한, 소수의 지사(志士) 이야기로 치부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민족 해방의 역사조차 정확히 모르는 채 오늘을 살아가는 세태. 이 슬픈 현대인들의 자화상은 해방 일흔세 돌에 돌아보는 참으로 가슴시린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재삼 강조하지만 한국의 독립은 연합국이 승리하여 준 일방적 선물이 아니다. 50여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결과였고, 임시정부가 장제스를 움직여서 얻어낸 성과인 것이다.



사진설명 (1)카이로선언 당시 김구와 이청천장군(2)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식 1945년 8월 15일 (3)장개석 면담기록 1943년 7월 20일 중국군사위원회 2층 접견실 김구주석 조소앙외무부장 김규식선전부장 이청천 광복군총사령 김원봉 광복군부사령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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