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3. 왜군이 묻혀 있는 진도 왜덕산(下)

애증의 한·일 관계…그 해답을 왜덕산에서 찾다

진도사람들 명량해전 사망 왜군 시신 수습해 묻어줘

倭 전사자에는 구루시마 등 세토內海 해적출신 다수

409년 만에 구루시마 고향 이마바라市 주민들 참배

2006년 이후 매년 명량축제 때 왜덕산 찾아 추모제

사죄와 용서, 화해와 공존의 지혜를 보여주는 왜덕산
 

왜덕산을 찾아 위령제를 지내는 구루시마현창회 회원들(2006.8.15 )/진도군 제공

■조상을 찾아 진도 왜덕산을 찾은 일본인들

2006년 8월15일,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동 왜덕산(倭德山)에 일본인들이 찾아와 조상에 대한 위령제를 지냈다. 이날 왜덕산을 찾은 일본인은 모두 25명이었다. 이중 4명은 무라세 회장을 비롯한 구루시마 수군의 후손인 현창회(來島保存顯彰會) 회원이었다. 18명은 히로시마 수도대학 히구마 교수와 학생들이었다. 나머지는 NHK히로시마 방송국 PD, 에히메 신문 이마바리 지사 기자 등이었다.

왜덕산에 묻혀 있는 왜인들은 1597년 울두목(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군 수군들이다. 울두목 해전에서 왜군 수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구루시마 미치후사다. 미치후사는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이때 왜군 수군 수천 명(4천여 명으로 추정된다)이 목숨을 잃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함께 울두목에서 목숨을 잃은 왜군들은 같은 고장(현재의 에히메현) 출신들이었다.

울두목에서 수장당한 왜군들의 시신은 파도에 떠밀려 내동리 바닷가로 쓸려왔다. 내동리 일대 진도사람들은 100여구가 넘는 시신들을 거두어 양지바른 야산에 묻어주었다. ‘조선백성 으로서의 진도사람들’에게 왜군들은 원수였다. 그렇지만 ‘바닷사람 진도사람’에게 왜군의 시신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불쌍한 사람이었다. 바닷가 사람들은 바다에서 시신을 보면 잘 거둬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 관습이었다.

진도사람들은 왜군의 시신들을 일본바다가 보이는 곳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그 야산을 ‘왜인들에게 덕을 베풀어주었다’는 의미로 왜덕산으로 불렀다. 왜덕산의 사연은 400여년이 넘도록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2003년에 진도문화원 관계자와 향토사학자들이 삼별초 전적지 답사를 갔다가 내동리 이기수씨로부터 왜덕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를 세상에 알렸다.
 

진도 왜덕산과 에히메현 이마바라시 위치도

왜덕산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본 수군의 무장 구루시마를 연구한 적이 있던 히구마 다케요시 교수가 지난 2006년 진도를 방문해 우연히 왜덕산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다. 히구마 교수는 왜덕산을 돌아본 뒤 일본에 돌아가 왜덕산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구루시마의 고향 에히메현 이마바라시에는 구루시마를 현창하는 300명의 회원이 있었다. 히구마 교수는 구루시마현창회에 출석해 왜덕산의 사연을 알렸다.

구루시마현창회 회원들은 깜짝 놀랐다. 조선침략에 나선 자신들의 조상 상당수가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해 묘를 만들어 주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구루시마현창회원들은 서둘러 한국 진도에 있는 왜덕산을 방문키로 뜻을 모았다. 400년 전 조선에서 전사한 조상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또 진도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히구마 교수는 이마바리시 지역신문에 투고해 일본사회에 왜덕산을 소개했다. 왜덕산의 존재가 알려지고 후손들이 진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에 일본 언론들이 왜덕산 동행취재에 나섰다. 히구마 교수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 역시 NHK 전국대학방송 콘테스트에 왜덕산 이야기를 출품하기 위해 구루시마현창회 진도방문단에 합류했다. 학생들은 현창회원들의 왜덕산 방문과정 전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이날 409여년 만에 왜덕산에서 벌어진 추모제는 간략했지만 매우 경건하게 진행됐다. 일본 대학생들이 봉오도리 염불춤을 추면서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했다. 히로시마현 조켄지(淨謙寺)의 아들로 장차 주지가 될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독경을 하면서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 내동리 마을주민 50여 명도 이 추모식 장면을 먼발치에서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왜덕산을 찾은 구루시마 현창회원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수군 상당수는 세토내해를 기반으로 해 활동하던 해적출신이었다. 에히메현 이마바라시 구루시마 현창회원들은 지난 2006년 왜덕산을 처음 찾아 추모제를 지낸 뒤 매년 명량축제때 진도를 찾고 있다.

위령제를 마친 그날 밤 무라세 회장은 꿈속에서 어떤 청년을 만났다. 청년은 수염이 길고 허름한 차림이었다. 패잔병 같은 복장이었다. 그는 슬픈 표정으로 무라세 회장에게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그러나 무라세 회장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서있던 청년은 그대로 사라졌다. 무라세 회장은 꿈에 본 그 청년이 명량해전에 참전했던 이마바리 출신 수군병사였거나 평복차림의 미치후사 장수라 여기고 있다.

무라세 회장은 이마바리 출신의 그 청년이 400년 뒤에 찾아온 후손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꿈속에 나타난 것이라 믿고 있다. 꿈속의 청년이 건넸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한(恨)을 전하려 했던 것은 분명했다. 무라세 회장은 그 청년의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래서 무라세 회장은 매년 진도를 찾고 있다. 언젠가는 그 청년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이날 추모식은 국내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한국에서도 왜덕산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왜덕산은 적군의 시체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수습해 안장시킨 곳으로 인류애 발휘의 상징적 장소다. 왜덕산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유재란때 왜군들이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가 교토등지에 코 무덤을 조성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왜덕산 왜군들의 묘지는 바닷가 진도사람들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왜덕산은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인들의 너그러움을 알려주는 역사적 장소다. 한·일간의 앙금이 어떻게 해야 해소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전쟁의 부질없음과 참혹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덕산에 묻혀있는 왜 구순들의 후손인 구루시마 현창회원들

2006년 이후 구루시마현창회 회원들은 매년 왜덕산을 찾고 있다. 진도·해남군이 주최하고 있는 명량대첩 축제 때 진도를 찾아 조상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구루시마 현창회원들은 지난 2007년에는 왜덕산 왜군공동묘지 옆에 사는 이기수씨 부부를 에히메현 이마바라시로 초청했다. 또 구루시마 현창회는 내동마을에 70만원을 전달하고 조상들을 후대해준 진도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기수씨는 일본 방문 3년 뒤인 2010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왜덕산을 방문해 위령제를 지낸 일본인들(2016년9월3일)

■히구마 교수가 에히메현 에히메 신문에 기고한 왜덕산 답사기

왜덕산을 살펴본 히구마 교수는 일본 귀국 후 에히메현 에히메 신문에 왜덕산 답사기를 기고했다. 에히메현 이마바리시는 인구 8만 정도의 도시다. 조선업이 지역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예전 구루시마 해상세력(해적)의 후손들이다. 당연히 자신들의 조상이 조선정벌에 나서 죽거나 다친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의 조상일지도 모르는 이들이 진도 왜덕산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에히메현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다음은 히구마 교수의 기고문.

愛媛新聞 2006年(平成18年)5月24日 水曜日

‘한국 땅에서 잠자는 구루시마 수군을 알고 나서’

히로시마현 히구마 타케요시

◇명량해협은 1597년 秀吉(풍신수길)의 조선출병 때 來島通總(구루시마 미치후사)이 총대장으로 싸웠던 곳이다. 적의 대장은 한국의 영웅 이순신이었다. 그때 나이 37세였던 미치후사는 5개의 화살을 맞아 바다에 떨어진 것을 이순신이 배에 끌어올렸으나 이미 목숨이 끊긴 상태였다. 그 때 일본수군은 330척, 한국은 12척이었다. 패배의 원인은 일본 구루시마 해협과 비슷한 험한 조류에 있었다. 이것은 ‘慶長의 役(정유재란)’이 가르쳤던 역사적 사실이다.

◇내가 이 기사를 신문사에 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때 바다에 빠져 죽은 젊은 일본청년들의 혼을 대대로 달래고 있는 한국 진도 노인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村上水軍(무라카미 수군, 중세 세토내해에서 활약한 해적집단)의 근거지인 히로시마에 거주하고 있어 관심이 많아 무라카미 수군의 후예들에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지난 번 같은 연구실 학생과 현지를 찾았다. 묘지로 되어 있는 밭 옆에 위치한 3-40개 묘는 408년의 세월이 지나 풍화가 심해 그냥 묘로 보이지 않아 지나쳐버릴 수 있을 정도. 그 노인과 선향, 말린 오징어, 소주로 소박한 공양을 해 주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 진도에 잠자는 구루시마 수군의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루시마 미치후사(Kurushima Michihusa)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61년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의 일족인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초 이름은 무라카미 미치후사였다. 무라카미 수군은 풍신수길 시대에 일본 규슈 북부의 세토내해(內海)를 거점으로 해 활동하던 ‘해상세력’이다. 다시 말해 해적세력이었다. 1567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외할아버지인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 의해 배다른 형 셋을 제치고 일곱 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지목됐다. 무라카미 미치후사는 일본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편에 서서 여러 전쟁을 치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시마 무라카미 집안 중 가장 먼저 자신의 편에 가담한 무라카미 미치후사를 중용했다. 무라카미 미치후사는 이때 성(姓)을 구루시마로 바꿨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정벌에 나섰다. 1592년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조선정벌군이 돼 조선 땅에 발을 딛게 된다.
 

벽파진전첩비에서 바라본 벽파정과 명량바다. 명량바다는 조선과 왜 수군간에 격전이 벌어졌던 곳이지만 그 곁의 왜덕산은 용서와 화해의 땅이다. 애증의 한일관계를 풀어갈 지혜가 왜덕산에 담겨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조선정벌 초기시코쿠 세력을 이끌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5번 대에 배속됐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육군 장수가 돼 충청도(忠淸道)지역 전투에 투입됐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밀려 왜군 수군이 참패를 거듭하자 다시 수군으로 돌아가 조선수군과 맞서 싸웠다. 이후 정유재란 때는 육군으로 참전해 남원성 공략에 참가하기도 했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전라도 공략과 함께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왔다. 전라도 50개 고을을 함락하고 수많은 백성을 학살하고 노략질했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을 궤멸시켰다. 100척이 넘는 판옥선이 수장됐으며 5천명 이상의 조선수군이 몰살당했다. 수군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조선수군은 서남해안 제해권을 상실했다.
 

벽파진에 있는이충무공전첩비

왜군 수군은 조선수군의 전력이 크게 떨어진 것을 간파하고 조선수군을 완전히 격멸하기 위해 울두목으로 향했다. 이순신이 제아무리 지력과 용맹이 뛰어난 지장(智將)이라 하더라도 10여척에 불과한 전선으로 수 백 척의 왜군 수군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순신만 죽이면 조선정벌은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해 이순신을 목표로 해 진도 벽파진을 거쳐 울두목으로 진격해왔다.

그렇지만 모두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13척의 조선수군은 133척의 왜 수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1597년 9월 16일 진도 울두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전사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난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적의 배를 굽어보더니, ‘저기 그림무늬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라 한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서 갈고리로 낚아서 배에 올리니, 준사는 기뻐서 날뛰면서 ‘이게 마다시다’ 말한다. 나는 즉시 명령하여 마다시를 베어 죽이고 토막 내 높이 걸으니 적들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벽파진 이충무공전첩비 기단. 전첩비는 갯돌위에 세워졌다. 갯돌을 쪼아 만든 기단의 거북이가 금방이라도 살아 바다를 향해 움직일 듯싶다. 전첩비는 1956년에 세워졌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37세의 나이로 진도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형 미치유키 또한 1592년 당포해전 때 전사했으니 구루시마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바다는 ‘통한의 바다’라 할 수 있다. 명량해전에서 수장당한 왜군의 수는 4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함께 명량해협에서 싸운 장수 6명의 고향은 현재의 에이메현으로 모두 살아서 돌아갔다. 이들은 히데요시로부터 각기 수 만석의 농지를 하사받아 7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충무공전첩비와 박정석진도문화원장. 박원장이 전첩비가 세워진 내력과 비문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히구마 교수에게 왜덕산이 알려지게 된 경위

세상일은 참으로 단순한 일이 서로 엮어지면서 새로운 의미가 되거나 큰 발견이 이뤄진다. 왜덕산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도 박주언씨 등 진도의 뜻있는 이들이 역사탐방에 나서 진도의 역사자원을 수소문했기 때문이다. 왜덕산이 일본에 알려진 것도 히구마 교수의 진도방문이 계기가 됐다. 당시의 상황은 히구마 교수와 대화도중 우연찮게 왜덕산의 존재를 알린 박주언 현 진도문화원 부원장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다.

아래의 글은 박주언씨가 진도문화원이 발행하는 진도문화 제94호(2018년 6월)에 실린, <임진왜란이 진도에 남긴 두 개의 공동묘지>라는 제목에서 발췌한 것이다.

‘2006년 5월2일 저녁, 농협 전남도지회장과 농민신문사 사장을 지낸 현의송 선배로부터 진도에 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달려갔더니 모텔 방에는 현의송 선배와 일본손님, 두 분이 있었다. 일본인은 히구마 타케요시 히로시마 수도대학 사회학 교수였다. 그는 일본관습에 외국을 다녀오면 가까운 친지들에게 8천원이나 1만원 정도의 방문지 선물을 한다면서 그런 관광상품 가게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곳이 없다고 말하자 그럼 전통생활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는 있냐고 물었다. 역시 없으며 미역, 구기자, 진돗개 등이 특산물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웃으며 진도는 관광객을 포기한 듯 하다고 말했다. 필자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관광객이 많아지면 자연 그런 가게들이 생길 거라고 대답했다.

현의송 선배는 내일 돌아볼 만한 곳을 물었다. 벽파 이충무공전첩비, 용장 정통고려정부 궁궐터, 오일시 임란순절용사묘역, 운림산방과 쌍계사, 회동 뽕할머니 동상, 국립 남도국악원, 남도석성, 세방낙조, 남진 미술관이 있고 진도읍 향교, 향현사, 소전 미술관, 향토문화회관, 진돗개 훈련소 등등을 자랑했다. 그분들은 크게 흥미를 못 찾는 눈치였다.

필자는 그 이유가 먼 여행으로 피곤하고 나이도 많으신 편이고 저녁식사 후 졸음도 올만하다고 짐작하면서 덤으로 왜덕산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뒤 히구마 교수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눈을 크게 떴다. 스토리텔링이 끝나자 그는 내일 아침에 바로 가서 참배를 해야겠다고 약간 흥분하고 있었다. 명량해전 후 최초의 일본인 참배라고 했더니 놀라는 기색으로 어떤 책임감까지 느낀 듯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고군면 내동리 왜덕산으로 향했다. 지난밤에 보지 못했던 일본인 학생도 한 명 합류했다. 한국식으로 주과포를 준비하라 했는데 히구마 교수는 향까지 한 통 사왔다. 그는 묘역 정면입구에 향을 많이 피워놓더니 무릎을 꿇고 한참을 굳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그의 얼굴에서 왜군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히구마 교수는 일본에 귀국하여 이마바리가 소속된 에히메현의 에히메 신문에 답사기를 기고했다’
 

왜덕산 전경. 100여기가 넘은 왜 수군들의 묘가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개간돼 지금은 50여기만 남아있다.

히구마 교수는 2006년 11월 2일 진도 아리랑축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진행된 진도학회 국제학술회의 때 <400년의 세월을 넘어서 진도 왜덕산이 말하는 것>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이 발표에서 히구마 교수는 왜덕산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늘 왜덕산의 의미는 무엇인가? 400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왜덕산에 지금도 젊음 그대로 잠들고 있는 병사들이 저에게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미래를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것은 두 번 다시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일본인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까 편안히 잠들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 마음을 표현하는 장치, 시스템을, 아름답고, 진심을 담아 진도의 왜덕산에 디자인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중한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위하여’ <400년의 세월을 넘어서 진도 왜덕산이 말하는 것>中 일부 발췌.

■이낙연 국무총리와 왜덕산
 

왜덕산. 개간과정에서 우측에 보이는 수로에서 사람 뼈가 많이 출토됐다고 한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전남도지사 시절인 지난 2015년 왜덕산(倭德山)을 찾았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들의 시체를 거둬 장사를 지내준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낙연 지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지사는 일정을 조절해 빠른 시간 내에 진도를 찾았다. 이 지사는 당시 섬과 숲 개발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지사는 일본의 여러 지자체들을 방문하며 섬 개발 현황을 살피곤 했다. 벤치마킹이었던 것이다.

일본통(日本通)이었던 이지사의 입장에서 보면 왜덕산이라는 유적지는 전남과 일본 에이메현을 ‘대단한 인연’으로 엮을 수 있는 역사적 자원이었다. 왜덕산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대결, 전투가 벌어진 ‘통한의 유적지’가 아니었다. 세계 인류사상 매우 드문, 휴머니즘이 살아있는 현장이었다. 침략자인 왜군의 시체를 피해자인 조선백성들이 거둬 안장시킨, 유례없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지사는 현장에 와서 매우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장소가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했다. 이 지사는 진도군 관계자들에게 “이런 곳을 왜 이렇게 방치합니까?” 라고 추궁했다. 관계공무원들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지사는 진도군이 왜덕산 정비와 관련된 예산을 지원해오면 도에서 적극 돕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지사가 국무총리로 영전한 다음 왜덕산 정비와 홍보는 다시 관심 밖으로 멀어진 상태다. 왜덕산을 임진·정유재란의 대표적 유적지로 가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덕산은 일본 교토에 있는 코무덤과 극명한 비교가 되는 곳이다. 왜군들은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가져가는 야만을 저질렀지만 조선인들은 왜군들의 시체를 거둬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줬다.

왜덕산의 존재와 사연은 한국을 폄훼하는 극우일본인들에게 양심의 찔림을 줄 것이다. 그리고 왜덕산에 참배를 온 일본인들은 한·일 간의 우호와 평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왜덕산은 참혹하기만 했던 ‘7년 전쟁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척박한 땅’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 같은’ 존재다. 우리는 그 ‘역사의 꽃’을 아름답게 가꿔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과제이다.

한편 왜덕산이 진도군민, 더 나아가 우리 한국이 인정하는 임진·정유재란의 유적지로 자리 잡으려면 해결해야할 자그마한 숙제가 있다. 왜덕산이 ‘왜군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이 아니다’는 주장을 펴는 A씨가 있다. A씨는 일본을 원수국가로 생각하면서 진도사람들이 왜군의 시신을 거둬 무덤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면서 군청에서 세운 안내판을 철거하라는 푯말을 왜덕산 입구에 세워놓고 있다.

이낙연 지사가 왜덕산을 방문할 때 당시 진도군 관계자들은 A씨가 세운 왜덕산을 부인(否認)하는 푯말을 가리느라 법석을 떨었다. 이런 행태는 선의로 보면 윗사람의 심기를 살피려는 것이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기도 하다. 윗사람의 심기보다는 왜덕산의 현실과 실정을 제대로 알리고 밝혀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사소한 듯 싶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다. 있는 그대로를 알리는 것이 정답이다.

■울두목과 울돌목
 

울두목전경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이 대승을 거둔 명량해협(鳴梁海峽)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해협을 일컫는다. 명량해협은 육지인 해남과 섬인 진도 사이에 자리한 길이 1.5km의 좁은 바다다. 폭이 가장 짧은 곳은 290m에 불과하다. 밀물 때에는 남해의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해 서해로 빠져나가기에 물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에 물소리 또한 매우 크다.

명량은 물소리가 우는 것처럼 요란하다는 뜻이다. 한글 표준어로는 울돌목이라 한다. ‘물이 울면서 돌아나가는 목’이라는 의미다. 그렇지만 진도사람들은 울두목이라 부른다. 해남사람들은 울도목이라고 말한다. 울두나 울도나 모두 동물의 목에 있는 ‘울대’에서 나온 말이다. 동물들이 내는 소리는 목에 있는 울대를 통해서 나오는 것인데 진도·해남 사람들은 이 해협을 ‘바다가 소리를 내는’ 울대로 여겼다.

향토사학자 김정호선생은 진도문화원이 2010년 발행한 <호국의 얼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울돌목이라는 이름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진도를 표현한 글에 ‘요해지’ ‘인후지지지’ 따위의 문구가 자주 동원되었다. 남서해안의 길목에서 가장 큰 왕 섬이라 군사적 요충이라는 뜻이며 사람의 목덜미에 견줄만하다는 표현이다.(중략) 병목처럼 좁게 생긴 명량해협은 바로 울대가 있는 모가지이고 울대목인 것이다’

작가는 명량해협을 한글로 적으면서 울두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진도 왜덕산에 대한 글인 만큼 진도사람들이 부른 울두목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울돌목, 울두목, 울도목. 그 무슨 이름을 사용하든지 간에 이는 명량해협을 일컫는다. 그렇지만 ‘울두목’ ‘울돌목’ 과 같은 이름이 명량에 비해 훨씬 더 정감이 간다. 또한 더 어감이 생생하다. ‘바다가 울면서 돌아가는 길목’. 오늘도 진도대교 아래 바다는, 큰 소리로 울면서 돌아가고 있다.

도움말/김정호, 박정석, 박주언

사진제공/위직량, 진도군, 김재호, 진도문화원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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