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 아니다.

(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탄생 했나

김갑제<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3·1독립선언 계기로 국내외서‘독립국’ 열망 표출

신규식 망명 후 기반 마련한 중 상하이 중심지 부각

신한청년당, 당원들 각지 파견 애국지사 집결 요청

미국 일본 만주 등서 3천명 모여…민족대표도 파견

임시의정원 설립 뒤 첫 회의서 국호 ‘대한민국’ 결정



1919년 독립선언 운동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은 ‘독립국’ 건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집결해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사진은 광복회 회원들이 지난해 탐방한 상하이 임시정부청사./광복회 제공
대한제국 군인 출신 신규식은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뒤 망명,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교류를 맺으며 상하이 임시정부 기반을 마련했다. 사진은 중국 항조우에 있는 신규식이 살던 집(2층). 이 집의 주인 진기미는 그의 아들 진과부, 진립부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움을 줬다./광복회 제공
독립운동가 9인.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역사적인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 내는 등 국내외 한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내년(2019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꼭 100년이 된다.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차제에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제헌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해 공포했다. 그 후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쳐나가고, 주변과 내부의 조건변화에 대응하는 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다섯 차례 개정했다. 임시정부는 그 헌법정신에 따라 27년간 지속되었다.

우선 임시정부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우리가 독립운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독립운동’은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쟁, 즉 일제와의 싸움, 즉 전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일반적이다. 물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일제와의 항쟁이 독립운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교육 노동 농민운동을 포함한 여러형태의 독립운동이 지속되면서 민족의 역사가 크게 변화 발전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을 건립한 것은 1919년이었다. 1919년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지 9년째 되는 해였고, 한민족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대한민국을 건립한 것이다. 대한민국을 건립하게 된 계기는 3·1독립선언이었다. 1919년 3월 1일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고 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독립선언의 핵심은 두 가지. 한국민족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국’임을 선언한 후, 그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대한민국이었다. 각계의 뜻있는 인사들은 3·1독립선언이 발표된 후, 독립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 장소로 떠오른 곳이 중국의 상하이였다. 상하이는 일찍부터 독립운동기지로 부각되던 곳이었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 신규식(申圭植)이 망명하여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교류를 맺으며 기반을 마련했다. 많은 인사들의 망명도 뒤따랐다. 이들이 동제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기반이 형성되었다. 1917년에는 신규식· 박은식· 조소앙 등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면서, 상하이가 그 중심지로 떠올랐다.

신한청년당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1월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여운형· 김철· 선우혁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당시 여운형은 중국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촉구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로 파견된 크레인(Charles crane)을 만났고, 그로부터 한국도 파리강화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신한청년당은 즉각 두 가지 일을 추진했다.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고, 국내· 일본· 만주· 연해주 등지에 당원들을 보내 그 소식을 알린 것이다. 이때 국내와 각지로 파견된 당원들은 여러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한 것을 종용하는 한편, 상하이로 모일 것을 요청했다. 많은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국내에서 3·1독립선언을 추진하던 민족대표들이 현순과 최창식을 상하이로 보냈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조성환· 조소앙 등도 왔다. 일본에서 이광수· 최근우, 미국에서 여운홍 등도 도착했다. 3월말쯤 되면 1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이들은 여러 차례 회합을 가지며 ‘독립국’을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며 준비했다.

이들은 4월 10일 저녁 10시에 공식적 모임을 가졌다. 참석한 인사는 현순· 손정도· 이동녕· 조소앙· 여운형 등 29명이었다. 장소는 프랑스조계의 진션푸루(金神父路)에 있는 양식 주택이었다. 여운형의 신문조서에는 60호로 되어 있지만,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광수의 회고에 “이 집은 임시정부가 서면 정청으로 쓸 양으로 대양 삼백원이나 세를 주고 얻은 곳”이라고 하는 것과 “잔디를 심은 뜰도 넓고 방도 여럿이었고 식당도 큰 것이 있고 댄스를 하게 반반마루를 깐 큰 방도 있었다” 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임시의정원 설립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조소앙이 모임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칭하자고 하였고, 신석우가 재청하여 그대로 가결되었다. 명칭을 결정한 후 의장· 부의장· 서기에 대한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임시의정원이 설립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지금의 국회와 같은 것이다. 임시의정원을 설립한 후, 곧바로 제1회 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의장으로 선출된 이동녕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에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였다. 신석우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칭하자”고 동의하였고, 이영근이 재청하면서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결정되었다. 국호는 나라의 이름을 말한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국가가 탄생되었다. 국호를 왜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짐작할 수 있는 게 있다. 1917년에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한 ‘대동단결선언’이다. 여기에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한 것을 융희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으로 설명하고, 군주가 포기한 주권을 국민들이 계승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대한제국의 ‘제(帝)’를 ‘민(民)’으로 바꾸었다고 생각된다.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의 정확한 국호는 ‘대한’이었다. 대한제국은 대한이라는 나라에 황제가 주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대한이란 나라에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대한의 삼한 즉, 진한 마한 변한들 말한다.두 번째로 결정한 것은 정부의 관제였다. 관제는 정부의 조직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행정수반의 명칭은 무엇으로 하고, 행정부서는 어떤 기구를 설치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행정수반의 명칭은 국무총리로 하고, 행정부서는 내무· 외무· 법무· 재무· 군무· 교통 등 6개 부서를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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