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51> 9장 다시 광주

이에 더해 길삼봉이 말을 보탰다.

“조정이 탄핵 이유로 거론한 스승님의 ‘역성혁명’이 만약에 성공했더라면 일본에게 이렇게 어이없이 국권을 상실했을 리 없었을 것이여. 백성이 주인이 되는 대동세상이 되어서 나라가 튼실하게 되었을 것이여. 감히 왜나 명나라가 넘보들 못했을 것이랑개. 우리가 단결해서 훨씬 발전해버리는디, 어디다 명함 들이밀겄어? 망해야 할 왕조는 망하지 않고, 일어나야 할 인물은 억울하게 죽어버링개 나라꼴이 험하게 가버린 것이제.”

“하지만 역성혁명을 막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좌우지간에 죄악잉개요.”

“스승님은 역성혁명을 꿈꾼 것이 아니여. 그렇게 몰아갔을 뿐이여. 변화하라고 젊은이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준 것일 뿐이여. 따지고 봉개 그것이 실책이었어. 힘을 모아 확 뒤집어버렸어야 하는디 말여, 썩은 나무토막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싱개. 썩은 나무토막들을 거둬내버렸어야제. 그란디 먼저 당해버린 것이여.”

“선수친 자가 임자였다 그 말이오?”

“그라제. 전쟁이 났을 때, 잘 훈련된 대동계원들이 혈기좋게 전쟁터로 나갔더라면 왜군은 쪽을 못썼을 것이여. 대동계원 조직이 전국으로 퍼져서 젊은이들을 절도있게 훈련시켰으면 진작에 왜군놈들을 아작내버렸을 것이랑개. 뽀대좋게 밟아버렸을 것이여. 이렇게 허망하게 도성을 뺏겼겠는가? 그란디 난리가 나기 전에 모든 전사들을 반역이라고 쳐버링개 나라가 거덜나버리고 말제. 아마 왕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공을 도와준 세작이 아닌가 싶더랑개. 개새끼.”

“상감마마한티 욕하는 것이요? 그렇게 욕하면 듣는 나가 생각이 복잡해지지요.”

“욕 안나오게 됐냐? 희망이 없는디. 나가 이렇게 떠도는 것도 인생무상(人生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사멸전변(死滅轉變)이기 땀시여. 이런 허무한 세상에 어찌 육신이 살았다 할 것인가...”

“한만 키우면 구곡간장이 다 녹아불지요.”

“원인을 따지자면 성리학이라는 조선 학문 땀시 이런 것이다. 그것은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들만을 위해 존재했을 뿐이여.”

그가 바가지째 막걸리를 떠서 화풀이하듯 벌컥벌컥 마셨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학문인디 왜 성리학 잡고 물로 늘어지시요? 나는 그 학문으로 입신할 야망을 갖고 있소.”

그러나 길삼봉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 성리학만이 옳고, 다른 학문은 그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수구세력들은 불교, 도학은 물론 같은 유학이라도 흐름이 다르다고 양명학까지 배척했다. 예법의 극단적 형식논리가 지배 이념이 되었는데, 그것은 백성의 생활이나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긴 커녕, 상대방을 배제하고 부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반대자의 목을 베는 흉기로 사용되었다. 실질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공리공담으로 정적을 밟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은 학문의 범주를 벌써 벗어났다. 성리학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재를 치는 도구로 악용했으니 학문을 모독한 셈이다. 그러한 것이 백성의 삶과 무슨 상관인가.

“그래서 이 길삼봉이가 감히 말하건대, 조선은 성리학을 악용하는 것 땀시 폭망할 것이다....”

“성님 말씀대로라면, 성리학만 없었어도 왜구침략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이요?””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납득하기 힘드요. 내가 배운 것이 모두 헛것이라니요?”

“너도 경서를 읽었으니 알 것이다만, 성리학은 조선 초기 권문세족의 부도덕성을 혁파하는 좋은 개혁사상이었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정치세력들은 기존 사대부들보다 논리, 철학, 이상이 앞섰제. 목숨을 걸고 임금과 지배층의 잘못을 질정(叱正)하는 명분의 길을 걸었고, 덕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군자의 이상국가를 꿈꾸었당개.”

“그란디 비틀어졌다는 것입니까.”

“그라제. 그렁개 환장할 노릇이제. 선비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충효로써 국가사회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놓고는 탐악과 독선의 길을 가버렸어.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탐구를 내버리고 지배층 지들끼리 특권과 반칙 경쟁을 한 것이여. 가치가 아니라 이익의 개념으로 피아를 나눴당개. 그리고 백성의 삶을 외면하고, 반발하면 무참하게 밟아버렸어. 권세와 이익을 독점하려고 지들끼리 박터지게 쌈박질하고 말이여. 성리학은 유학의 여러 유파 중에서도 권위와 명분을 강조하는 학문인디, 세도가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시킹개 좆되아부렀제. 조세와 군역 회피를 정당화하는 특권지대로 만들어놓고, 백성에게는 끝없는 충성과 복종을 강요했당개. 이러니 왜란이 터져도 백성들은 에라 씨팔 될대로 되라, 하고 체념해버렸제.”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