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 아니다.

(5)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탄생 했나

김갑제<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국가보훈위원회 위원>

‘대한민국’ 건립은 국민주권 시대 연 민족사적 사건

의정원서 국무원 선출·헌법 확정 등 국가 틀 완성

전제군주 역사 민주공화제 전환…오늘까지 이어져

호남의병, 3·1만세운동 등 50여년 독립투쟁 결과

대한국민회의·한성정부와 통합…대표·정통성 확보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고향인 서안시 장안현 두곡진에 세워진 한국 광복군 제2지대 주둔 기념비와 항일유적지 탐방중인 광복회 회원들. OSS(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보 기관)본부로 사용된 이곳 관제묘에 광복군이 주둔했다. 역사학자인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이곳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해 만주독립군에서부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무장투쟁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안의 진시황 병마용을 관광하기 위해 한국인이 매년 40만명 이상이 방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념관 건립은 적극 검토되었으면 한다. 중국 서안/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중국 서안 장안현 오대산 전경. 이곳에서 1945년 광복군 가운데 OSS대원으로 뽑힌 대원들이 미군 OSS교관들로부터 야전훈련을 받았다. 백범일지에도 광복군 50명이 입교해 1945년 8월 4일 38명만 졸업했다고 기록돼 있다./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의 상하이 도착 환영식 모습. 이승만은 대통령 선출 1년 3개월만에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국무위원들과 갈등을 빚다 6개월만에 다시 출국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임시의정원은 세 번째로는 국무원을 선출했다. 국무원은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6개 행정부서의 책임자를 말한다. 국무원 선출은 의원들이 구두로 추천하고, 추천된 인사들을 대상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를 하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선출된 국무원은 다음과 같다.

▲국무총리 : 이승만 ▲내무총장 : 안창호 ▲내무차장 : 신익희 ▲외무총장 : 김규식 ▲외무차장 : 현순 ▲법무총장 : 이시영 ▲법무차장 : 남형우 ▲재무총장 : 최재형 ▲재무차장 : 이춘숙 ▲군무총장 : 이동휘 ▲군무차장 : 조성환 ▲교통총장 : 문창범 ▲교통차장 : 선우혁 ▲국무원비서장 : 조소앙 이다

선출된 국무원은 대부분 국외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었다.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에서, 김규식과 이시영은 중국에서, 최재형· 이동휘· 문창범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인사는 차장으로 선출된 신익희와 현순이었다. 선출된 국무총리와 총장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인사들이었다. 상하이에 없었다. 회의에 참석하고, 상하이에 있던 인사는 법무총장 이시영 뿐 이었다.

네 번째 절차로 헌법을 제정 통과시켰다. 헌법은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은 한말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한 인물이다. 신익희·이광수·조소앙 3인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해 초안을 심사한 후 이를 회의에 보고토록 했다. 초안에 대해 일부 수정이 이뤄진 뒤 이를 가결해 통과시켰다. 헌법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헌장’이었다. 내용은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란 것을 비롯 모두 10개조로 구성됐다.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됐다.

회의를 마친 것은 4월 11일 오전 10시. 4월 10일 밤 10시부터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국호· 관제· 국무원 선출· 헌법 제정 등을 논의해 결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건립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그리고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민족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역사적 사건이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우선 반만년 역사에서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건립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민족은 고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운 나라가 망하면 다시 나라를 세우면서 반만년 역사를 유지해왔다. 이 같은 역사는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망하자 필연적으로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된다. 다만 국내에서 세울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그것도 임시로 세웠다. 그것이 대한민국이고, 그 대한민국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갖는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의 역사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전제군주제의 역사에서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현재 우리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고, 민주공화제 체제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계기를 마련하고, 이러한 시대를 연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 더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부 인사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민족이 흘린 피의 대가라는 점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또한 군대가 일제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한번 하지 못한 체 무너질 때, 일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호남의병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싸우다 숨진 의병들의 수는 수만 명을 헤아린다. 또 3.1 독립을 선언한 후 남녀노소할 것 없이 백성들 대부분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항쟁을 벌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피해규모를 축소시켰을 일제 측의 자료에도 사망 7645명, 부상 4만5562명, 체포 4만9811명으로 기록될 정도다. 대한민국이란 국가, 그리고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는 이러한 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상하이 외에 다른 곳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독립선언 직후 국내외에서 모두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수립한 주체와 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진 경우도 있고, 전단으로만 알려진 경우도 있다. 수립 주체와 과정이 명확하고, 실제적인 인적 기반과 조직을 갖춘 임시정부는 세 곳이었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3월 17일 연해주에서 선포된 대한국민의회, 4월 23일 국내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정부가 그것이었다.

이들 세 임시정부는 지역적 기반도, 인적 기반도 달랐다. 세 곳의 임시정부가 모두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역할할 수 없었다. 세 임시정부를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통합문제는 안창호가 부임하면서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안창호는 내무총장에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곧바로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부임하지 않은 이승만을 대신하여 국무총리 대리도 맡았다. 안창호의 주도로 통합작업이 추진되었다. 현순을 연해주로 파견하여 대한국민의회측과 통합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둘 것,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할 것, 상하이와 연해주의 각원은 모두 사퇴하고 한성정부에서 선출한 각원이 정부의 각원을 맡도록 하자는 데 합의했다.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국내에서, 또 13도 대표자대회라는 국민적 기반위에 수립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통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헌법 개정과 정부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행정수반의 명칭을 대통령으로 하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했고, 정부의 각원도 한성정부의 각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정부도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헌법개정안’과 ‘정부개조안’을 마련했다. 이는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제출되었고, 9월 6일 통과되었다. 이로써 세 임시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임시의정원은 개정 헌법을 통과시킨 후, 통합정부를 구성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먼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각원의 선출은 한성정부의 각원을 그대로 계승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9월 11일 통합정부 성립이 공포됐다.

▲대통령 : 이승만 ▲국무총리 : 이동휘 ▲내무총장 : 이동녕 ▲외무총장 : 박용만 ▲군무총장 : 노백린 ▲재무총장 : 이시영 ▲법무총장 : 신규식 ▲학무총장 : 김규식 ▲교통총장 : 문창범 ▲노동국총판 : 안창호 다.

이는 한성정부 각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다만 집정관총재라는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상하이· 연해주· 국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루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을 행정수반으로 한 새로운 체제로 출범했다.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점은 100년 전이었지만 국내· 만주· 연해주· 중국· 미국· 일본 등 국내외 각지로 흩어져 활동하던 인사들이 함께 참여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는 점, 또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결국 하나로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 국가의 정부로서 실질적이면서도 대표성과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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