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52> 9장 다시 광주

“좋은 정치철학이 종교화하고, 군림하는 오만한 이념이 되었다 이 말이제라우.”

“그라제. 명분과 이론은 그럴 듯하지만, 국가를 다스리기에는 못된 정치이념이 되어버렸어. 그런 경서와 예법을 달달 왼다고 총알이 나오냐, 검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실질과는 거리가 먼 허무맹랑한 공리공담이 나라의 발전을 막아버린 것이제. 권력쟁투의 도구로 악용했으니 개판이 되어버린 것이여. 상대방이 옳은 것이라도 내 편이 아니기 땀시 부정되고, 내가 틀린 데도 같은 세력이라고 옳다고 치면, 나라 꼴이 푸닥거리하는 무당집만도 못하제. 우리 편이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적이지만 잘했으면 잘했다고 평가해야 균형잡힌 시각이고, 합리적 태도라고 할 수가 있는디, 모두가 이익 따라 가치판단을 하니 나라가 물구나무 서버린 것이여. 이 모양으로 나라가 가면 백년, 이백년, 천년이 가도 그 모양이 될 것잉개 가슴이 미어진다. 필시 그런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것잉만. 나라를 외세에 빼앗기고, 백성은 노예처럼 살 것이여.”

“어째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소잉. 하지만 그 말 들응개 나도 화가 나요야, 성님 말 씀에 눈이 떠지고요.”

“눈만 뜨면 머하냐.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제. 지금 위정자들은 더 높은 세상의 가치를 보들 못혀. 그게 바로 수구기득권자들의 한계여. 변화하지 않고 낡은 틀 속에 안주해도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상개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제. 그렇게 배터지게 먹고 사는 것이 무슨 재민겨? 그렇게 타락하다가 졸지에 쪽바리 왜구들한티 당해버린 것인디... 왜구는 행색이 볼품이 없어도 바다 끝까지 기운차게 나가는 놈들이여. 세상의 끝이 어디인가를 탐사하러 가는 놈들이여.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가지고 나가는 놈들이여. 우리가 예법의 형식에 매달리는 사이 실질을 숭상하고 변화를 물색하는 종들이여. 정충신 너는 문을 숭상하는 것은 좋지만, 예라는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짓은 하지 말거라.”

“경서를 읽고 예법을 익히지만 성님같이 살아있는 말씀을 새겨듣소. 그란디 쪼까 불안하요. 성님이 어째 위태로워 보여라우.”

“그럴 것이다. 이상주의를 꿈꾸는 자는 어느 시대나 위태위태하다. 무조건 잡아죽이니 여북하겄냐. 너는 뜨거운 불은 가슴에 담되 밖으로 내색은 말어라. 너는 큰 사람이 되어야 항개.”

그가 술동이 밑바닥을 바가지로 박박 긁어 담아 얼마 안남은 막걸리를 마저 마셨다. 그가 다시 길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왜란이 터지자 사대부 새끼들이 말아먹은 나라를 백성들이 전면에 나서서 막았단 말이여. 눌리고 밟히고 뜯긴 백성들이 일어나서 전투현장으로 나갔어. 불공평한 세상이라도 내 나라 내 땅 내가 지키자고 낫과 쇠스랑과 부엌칼을 들고 싸움장으로 나갔당개. 스승님이 그들의 희망이 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주었어야 했는디, 좌절하고 말았어. 이대로는 분이 나서 나가 가만 앉아있을 수 없다니께.”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요?”

“사람을 모을 것이여.”

그는 꿈을 꾸고 있는 것같았다.

“성님 생각은 옳지만 따를 생각은 없소. 나가 가는 길이 따로 있승개요. 내 인생이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싶지 않응개요.”

“그래, 너는 꼭 급제해라.”

“문과보다 무과에 급제할라우. 나라를 지켜야지라우.”

그러나 이항복 문하에 들아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부패덩어리들이 나라를 망치는디, 지대로 되겠냐. 니가 원하는 세상이 되겠냐고? 우리가 부패 덩어리들을 비단에 싸서 추앙하기만 했제, 청산하려고들 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지금 보다시피 세도가는 부패자격증을 따논 놈들이여. 권력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나 탐욕의 부적으로 여긴 새끼들이랑개. 어쨌거나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여. 실력이 힘이여.”

“성님 같은 분이 다섯 분만 있어도....”

“나는 세속적인 욕망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수선하는 사람으로 족하다. 좀더 들어보거라.”

충청도 해안지역에서 한양으로 세곡선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바다 어느 지점에서 세곡선이 침몰해버렸다. 풍랑도 없었는데 침몰했다. 지방 수령이 세곡선에 실은 쌀을 빼돌린 후 배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고는 풍랑 때문에 가라앉았다고 보고했다. 사공들도 물속에 쳐넣어버렸다. 세곡을 채워넣어야 했으니 백성들만 못살 일이 생겼다. 사공 중에 한 놈이 헤엄쳐 뭍으로 나와 바닷가 절의 중에게 고발했다. 그때 길삼봉이 절에 유숙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하고 나가 중과 함께 그 지방수령을 납치해서 입에 솜덩어리를 넣어 물리고, 몸에 돌덩어리를 달아서 세곡선이 침몰한 바다에 꼬라박았어. 뽄새를 보여주어야 항개, 하도 이런 일이 빈번하니 백성들이 고개를 돌리고, 명나라 군대가 쳐내려오건, 왜놈 군사가 쳐들어오건 그놈이 그놈이라고 외면해버리제.”

“그런데도 각처에서 의병들이 일어났잖습니까.”

“그라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이 일어나더랑개. 왕을 위해서 목숨 바치겠다는 것이여.”

“훌륭한 백성들이제라우.”

정충신이 감격해서 받았다. 그 충효정신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러자 길삼봉이 화를 냈다.

“왜 고따우 왕을 위해서 검을 드냐. 백성들이 일어나는디도 왕과 세도가들은 재산과 귀금속, 가솔들, 심지어 첩들까지 끌고 안전지대로 피신하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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