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진린, 이순신에 감복해 조선위해 힘껏 싸우다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7. 이순신 장군과 진린 도독

명나라 진린, 이순신에 감복해 조선위해 힘껏 싸우다

진린, 거만했으나 이순신 만난 뒤 태도 바꿔

고금도에 관우모시는 사당 세우고 승리기원

일제가 없앤 관앙묘 자리에는 충민사 들어서

진린 손자 조선 망명, 후손들 해남 등에 거주

오늘 ‘이순신과 진린, 420년만의 재회’ 세미나

이순신의 용맹·지략에 감복한 진린의 변화 조명

완도군 학술용역 결과 토대로 관왕묘 복원계획

고금도, 우호·협력의 韓·中 관계 상징 장소될 듯

 

전남 해남군 산이면 황조별묘에 모셔져 있는 진린 장군 초상화

■ 명나라 진린 장군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

역사에 대한 해석은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사실임에도 누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지닌 의미는 전혀 딴판이 될 수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사드갈등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한중관계가 화해를 모색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 우호선린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진린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의적 해석과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중국 베이징 대학 강연을 통해 과거 조선과 명나라가 힘을 합쳐 왜군을 격퇴한 임진왜란을 거론하면서 이순신 장군과 진린 장군의 우정과 공조를 부각시켰다. 문 대통령은 강연에서 “한국의 완도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파한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장군을 함께 기리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한국에는 지금 진린 장군 후손들 2천 여 명이 살고 있다”고 언급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역시 지난 2014년 7월의 서울대 강연에서 진린 장군 이야기를 꺼냈다. 시 주석이 진린 장군을 서울 한복판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전통적 한중우호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국(조선)이 예로부터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으니 중국 중시의 외교관계를 맺기를 바란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한미동맹의 틀에서 벗어나 중국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진린 장군과 명의 군사파병’에 관한 발언은 상호협력의 측면에서만 바라본 것일 뿐이다. 전체적인 상황은 훨씬 복잡하다. 명의 조선파병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결과적으로 왜군을 조선 땅에서 몰아내는데 힘이 됐지만 지원군으로서 명군은 왜군 못지않게 조선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다. 명군 지휘관들은 조선 관리들을 능멸했으며 육상 및 해상전투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

명군이 조선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저지른 각종 폭압은 여러 기록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들과 작가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 땅에 머물렀던 명군에 대해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다. 진린 장군 역시 그 범주에 해당된다. 진린 장군은 여러 자료에서 조선 출병 초기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 결과 진린 장군은 탐욕스러우며 뇌물을 좋아하며 이순신의 전공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든, 파렴치한 인물로 인식돼 왔다.

그렇지만 이런 진린에 대한 부정적 묘사는 ▲선조의 입장을 두둔하던 서인들이 주도했던 선조수정실록 편찬자들의 시각이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이어졌고 ▲임진왜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집권당 서인들의 동인에게 책임 떠넘기기(김성일 부사 책임론 부풀리기)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의도적으로 과장됐거나 심지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과 도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명군의 횡포와 소극적 전투참여를 부각시켰고 이 연장선상에서 진린 장군의 모습을 ‘망가뜨렸다’는 주장도 있어왔다. 실제 춘원 이광수가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이순신>과 김훈의 <칼의 노래>, TV 드라마로 만들어진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 등에는 진린 장군이 이순신 장군의 공을 가로채고, 뇌물을 받고 왜적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부정적 인물로 묘사돼 있다.

이런 가운데 전남 완도군이 추진하고 있는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기념공원 조성사업’과 관련된 학술용역 과정에서 진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용역에 참가한 역사학자들은 진린의 모습이 사실과 달리 매우 왜곡돼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남군 산이면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진린 장군의 후손들 역시 조상의 모습이 사실과 다르게 알려져 있는 바람에 질타와 무시의 시선을 받을 때가 많다며 힘들어하고 있다.

■ 진린 도독

진린은 1543년 중국 광둥성에서 태어났다. 자는 조작(朝爵)이고 호는 용애(龍厓)다. 명의 장수로 활동하다가 임진왜란 때 부 총병으로 발탁됐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의 탄핵으로 물러났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발탁됐다. 당시 명은 왜와의 강화협상이 깨지고 왜군이 1597년 2월 조선을 다시 침략(정유재란)하자 군사를 파견,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통해 왜군들을 조선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사로병진책. 명은 왜군이 1597년 2월 조선을 다시 침략(정유재란)하자 군사를 파견,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통해 왜군들을 조선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사로병진책은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연합군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개념이다.

사로병진책은 명나라 군사의 최종 책임자였던 병부상서 형개가 입안한 전략이다. 명나라와 조선, 두 나라의 연합군을 네 갈래로 나눠 왜군을 공격한다는 작전개념이다. 이후 1598년의 정유재란 전투들은 모두 이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로병진책에 따라 조명연합군 중 육군은 전라도 방면의 서로,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 세 갈래로 진격했다. 수군은 서해와 남해로 이동했다.

조선에서 명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총책임자는 경리 양호(楊鎬)였다. 양호는 천자의 나라에서 온 구원군의 총대장이었다. 양호는 한양에 도착하자마자 경리아문(經理衙門)을 설치하고 ‘전시작전권’을 행사했다. 양호 등 명나라 장수들은 선조와 조선 대신 앞에서 기세등등했다. 선조는 양호를 대하면 먼저 절을 했다. 천자의 나라라고 섬겨왔던 명나라의 군사이고, 더구나 조선을 구하러 온 장수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린은 1598년 7월 16일 전선 400여척에 병력 5천을 이끌고 고금도진에 도착했다. 총병관 수병대장을 맡은 진린의 계급은 제독보다 한 단계 아래인 도독(都督)이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보다 품계가 한 단계 낮았지만 천자의 나라 명나라에서 온 구원군의 수군 총책임자였다. 모든 작전지휘권은 명나라 군사에 있었다. 이순신 장군 역시 조명연합수군사령관인 진린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진린이 어떤 사람인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진린을 깎듯이 후대하고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진린의 자존심을 살려줘 자신의 후원자로 삼는데 성공한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목표를 이루는 이순신의 장군의 ‘인간경영전략’을 엿볼 수 있다. 진린은 여러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이순신 장군과 호흡을 맞춰가며 성공적으로 남해안 일대 왜 수군들을 물리쳤다.

이순신을 천거하고 지지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진린의 성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천조(明)의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천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군사와 합세했다. 진린은 성질이 거칠고 포학하고 교만한 자다. 진린이 한양에 이르렀을 때 상(宣祖)이 청파(靑坡)에 나가 전송했다. 진린은 자기 군인들이 (조선의)수령을 구타하며 모욕을 주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로)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 역관을 시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나는 같이 있던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장차 이순신의 군사가 안타깝게도 패하겠구나. 진린과 진중에 함께 있으면 행동을 견제당할 것이고 의견이 맞지 않아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기고 군사들이 학대당할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류성룡 등을 통해 진린의 인간됨에 대해 미리 많은 정보를 얻었음이 분명하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첫 대면에 대해 이렇게 적혀있다.

‘7월 16일 이순신은 진린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그를 대접할 준비를 했다. 진린이 바다에 들어올 적에는 군의(軍儀)를 갖추어 멀리 나가 맞이했다. 그리고 도착한 뒤에는 크게 연향을 베풀어 감사의 표시를 했다. 진린 등 명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실컷 취한 뒤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라고 말했다’

진린은 고금도진에 도착한 이틀 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인근 해역을 살펴보았다. 금당도 앞바다에 들어섰을 때 왜군이 절이도(지금의 거금도)에 상륙해 노략질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왜군 전선은 이순신 전선 깃발을 보고 도주했으나 24일 왜군 전선 30여척이 싸움을 걸어왔다. 이에 맞서는 조선수군의 전선은 8척에 불과했다. 조선수군은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지휘하고 있었다.

송여종과 조선수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러나 명나라 수군은 멀리서 관망만 하고 있었다. 절이도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대승을 거뒀다. 송여종은 고금도진으로 복귀해 이순신 장군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 자리에는 진린도 같이 있었다. 명나라 수군은 싸움을 하지 않았으며 조선수군이 홀로 거둔 승리라는 보고에 진린은 부하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이순신 장군의 진린 끌어안기는 이때 시작된다.

이순신 장군은 다음과 같이 모든 전공을 진린에게 돌린다.

“장군은 명나라 대장으로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곳에서 거둔 모든 전공은 바로 대장의 승첩입니다. 우리가 베어온 적의 머리를 모두 대장에게 드릴 것이니 승전보와 함께 이 전과를 명나라 황실에 아뢰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진린이 매우 즐거워하며 “본국에서 장군의 명성을 많이 들었는데 거짓 명성이 아니었구려” 하며 이순신의 넓은 도량에 감복했다.

이순신 장군은 이날 전투에서 노획한 왜선 6척과 수급(首級:적의 머리) 69개를 진린에게 넘겼다. 이순신 장군은 일단 진린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다음은 천자의 구원병임을 들어 조선의 장수들을 업신여기면서 조선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명나라 군사들을 제어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군졸들은 술에 취하면 마을에 들어가 아녀자들을 희롱하고 물건을 약탈하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이런 일이 또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이 머물고 있는 해변가의 군막을 모두 걷어 들이게 하는 한편 군사들에게 옷가지와 양식을 모두 들고 전선에서 내려가도록 했다. 진린이 바라보니 조선수군들이 모두 철수하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황급히 이순신 장군을 불러 물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이 이렇게 답했다.

“조선백성들은 천병(天兵:천자의 나라에서 온 군대)이 오는 것을 보고 부모처럼 의지하고 우러렀는데 오히려 괴롭힘을 받아 백성들과 군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도망가고 있습니다. 병사가 없는데 어찌 대장으로 혼자 남아있겠습니까? 나 또한 다른 섬으로 옮겨가기 위해 이렇게 짐을 싸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진린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이순신 장군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이순신 장군이 잘못을 저지른 명의 군사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머물겠다고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진린은 흔쾌히 그리하라고 대답했다. 이후 조선장수들을 무시하면서 조선백성들을 괴롭히는 명나라 군사들의 행패가 사라졌다. 명나라 장수에게 당당하게 명나라 군사 처벌권을 요구한 이순신 장군이나, 조명연합군의 협력과 군기를 위해 이를 허락한 진린이나, 대범한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이후 진린이 이순신 장군을 호칭할 때는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고 불렀다고 한다. ‘야’(爺)는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어른을 부를 때 사용하는 최고 존칭어이다. ‘살아있는 신’이라는 현신(現神)의 뜻이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진린이 거느린 전선 수가 조선수군에 비해 훨씬 많았지만 진린은 명나라 수군이 이순신 장군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해상전술과 부대 운용에 감탄을 마지않았다. 그래서 “공은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이 아니다. 중국으로 가서 벼슬을 하자” 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진린과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함께 싸웠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직후 진린 또한 왜 수군에 포위돼 위험에 처했었다. 이때 조선수군이 다가와 진린을 도와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을 구해낸 것으로 생각했다.

전투가 끝나자 진린은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을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했다. 이때서야 진린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사실을 알게 됐다. 진린은 배 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준 것으로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통곡했다. 이순신 장군의 엄한 군율 밑에서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수와 수졸들도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애통했다고 한다.

진린은 정유재란이 끝나자 명에 돌아가서 조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됐다.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605년에는 신첨장관사로 옮겨 묘족을 토벌하는 데 애썼다. 1607년에 세상을 뜨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康)을 받았다.

■ 진린 장군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진린은 성격이 포악하면서 이순신 장군의 공을 가로채는 장수로 묘사되곤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술책에 휘둘려 왜군의 퇴로를 열어준 장수로 알려졌다.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순신 장군을 다루는 소설과 TV 드라마에서 진린의 캐릭터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1931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이순신>에서 춘원 이광수는 진린에 대해 ‘이순신 혼자만이 넉넉히 적을 소탕할 능력이 생길 만한 때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1만 명에 가까운 수군을 끌고 강화도로부터 내려왔다. 이름은 청병이었으나 기실은 순신의 행동을 방해하여 적을 놓아 보내 마침내는 순신을 죽게 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다’고 썼다.

작가 김훈이나 김탁환, 그리고 여러 TV 드라마에서 진린은 거만하고 급한 성격에 이순신 장군의 공을 가로채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왜군의 뇌물공세에 퇴로를 열어준 비겁한 장수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진린의 캐릭터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과 다르다. 진린은 정유재란 참전 초기에는 거만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순신 장군의 인품에 감복한 뒤로는 이순신 장군에게 예우를 갖췄다. 조선수군과 백성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당시 좌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선조가 “진린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명장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조실록>에 나오는 대목이다. 또 노량해전이 끝난 뒤 순천에서 왜군이 보관해 두었던 수만 석의 곡식을 접수했으나 조선군사에게 그대로 넘겨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러준 이도 진린이었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과 조선의 왕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활약상과 전공을 소상히 알렸다. 진린은 신종에게 이순신에 대해 알리면서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로가 있는 인물’(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밝혔다. 명나라 황제 신종은 이순신 장군에게 도독의 직함과 함께 명조팔사품(明朝八謝品)을 내렸다.

명조팔사품은 8종 15점이다. 통제영에 보관돼 오다가 1896년부터 통영 충렬사로 옮겨졌다가 1969년 현충사가 지어지자 도독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들 1 점씩을 그곳으로 옮겨놓았다. 현재 충렬사에는 도독인,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8종류 8점이 보관돼 있다.

앞서 밝힌 대로 선조와 선조를 추종하는 서인세력들은 진린이 극구 칭찬하면서 조선을 구해낸 영웅으로 치켜세운 이순신의 전공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다. 조선이 천병이라 여겼던 명나라의 장수가 이순신을 최고의 영웅이라 일컫는데 선조와 서인은 이를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진린을 형편없는 장수로 깎아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진린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가 별 무의미한 평가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유성룡의 <징비록>에 진린이 전공에 욕심을 부리고, 왜군의 퇴로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것을 기술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진린이 이순신을 도와 조명연합군이 각종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는 달리 조선군사와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도 다른 점이다. 이런 전체적인 부분을 가지고 진린을 평가해야 하는데 아쉽게도 진린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기만 하다.

■ 관왕묘와 묘당도(廟堂島)의 이충무공 유적

고금 묘당도 충무사 전경. 고금도진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 5천여명과 명나라 진린 장군이 지휘하는 명 수군 8천여명이 진을 치고 왜군과 맞서 싸운 곳이다. 고금도진에는 진린 장군이 세운 관왕묘가 있다. 관왕묘는 일제시대에 없어져 그 자리에 충민사가 세워져 있다. 완도군은 진린 장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함께 관왕묘를 복원할 계획이다.

1598년 진린은 조선으로 오면서 배 위에서 관운장이 나타나는 꿈을 꾸게 된다. 중국에서 관운장은 수호신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진린은 곧 꿈속에서 보았던 관운장의 모습을 비단에 그리게 하고 제사를 올렸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선조 31) 2월 18일 수군 8천여 명을 이끌고 고하도(高下島)에서 고금도로 옮겨와 묘당도에 진을 쳤다. 진린이 명나라 전선을 정박시키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합동작전에 들어간 곳이 고금도다.

진린은 고금도에 도착하자마자 고금도 곁에 있는 조그마한 섬인 묘당도의 용금사 아래에 사우를 건립토록 했다. 진린이 고금도진에 도착한 때는 1598년 7월 16일인데 사우가 완성된 것은 두 달 만인 9월이었다. 몹시 서둘렀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촉박하였던 관계로 관운장 상(像)은 흙으로 빚어졌다.

고금 묘당도 충무사 관왕묘비

진린은 부하들과 함께 백금 수백량을 내 사우를 짓는 한편 남은 돈은 고금도 주민들에게 주어 제사를 모시도록 조치했다. 묘량도의 관왕묘는 이런 연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진린은 고금도 주민들에게 제사비용을 다시 건네주면서 해마다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현종 7년(1666)에 절도사 유비연(柳斐然)이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관왕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천휘(天輝)스님으로 하여금 암자(옥천암) 하나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동무(東?: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중심 건물인 대성전 동쪽에 두었던 큰 집이나 회랑)를 짓고 진린을 배향했다. 1683년(숙종9년)에는 이순신 장군을 서무(대성전 서쪽의 아래채)에 모셨다.

고금 묘당도 충무사 정전 이순신 장군 영정

1791년(정조15년)에 탄보묘란 사액을 받았다. 또 다음해에는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명의 장수 등자룡을 아울러 배향했다. 1801년(순조1년)에는 관왕묘 수호암자인 옥천암을 옥천사로 바꿨다. 그러나 관왕묘를 비롯 진린과 이순신 장군을 모신 동무, 서무는 일제에 의해 모두 철거됐다. 일제는 왜군 수군을 무찌른 수군기지였던 고금도진과 묘량도에 있는 이순신 장군·진린의 흔적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일제는 관왕상과 위패, 각종 유물들을 모두 바다에 버렸다. 가까스로 옥천사의 불상만 건져져 백운사에 옮겨졌다. 묘당도는 간척이 돼 지금은 고금도와 연결돼 있다. 광복 후 고금도 유림이 주축이 돼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충무사(忠武祠)를 세웠다. 충무공을 정전(正殿)에 모시고 1959년에는 이 충무공의 보좌관인 당시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을 동무에 모셨다.

고금 묘당도 충무사 우수영전진도첩 필사본

충무사에서는 매년 4월 28일(양력) 이충무공 탄신기념제와 11월 19일(음력) 순국제(殉國祭)가 열리고 있다. 충무사 경내에는 이순신의 영당(影堂)과 1713년(숙종 39)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묘량도에는 이충무공의 가묘인 월송대가 있다. 이충무공이 순국한 날짜는 1598년 11월19일(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다. 이충무공의 시신은 남해를 거쳐 묘당도에 모셔졌다가 다음해인 1599년 2월 11일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졌다.

완도군은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충무사(사적 제114호) 인근에 관왕묘를 복원할 계획이다. 복원될 관왕묘에는 동서무, 동서재, 내중외삼문과 내부 복장물들이 들어서게 된다. 완도군의 용역을 받은 연구팀의 조사 결과 관왕묘에는 군신인 관왕(關王-삼국지의 등장인물 관운장)과 해신(海神)인 마조(중화권에서 널리 알려진 대표적 해신으로 송나라 때 복건 미주도(湄州島) 바닷가에서 무녀로서 활동했던 실존 인물이다. 죽은 후 미주도 주변에서 바다를 관장하는 여신으로 숭배됐다), 그리고 삼관대제(三官大帝: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천관, 죄를 사해주는 지관, 재난을 물리쳐주는 수관 등 삼형제 신을 말함)가 배향된 것으로 확인됐다.

고금 묘당도 충무공 이순신장군 가묘 유적(월송대)

■ 진린의 후손들과 황조별묘

놀랍게도 진린의 직계후손들은 한국에 살고 있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중국 애산에서 청의 군사들과 싸우다 죽었다. 진구경의 아들 조(詔)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 일하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난징(南京)에서 해안으로 빠져나와 배를 타고 조선으로 떠나왔다. 조는 경남 거제시 장승포에 도착했다. 조는 조부가 머물렀던 고금도로 옮겨와 정착했고 이후 그의 아들 석문(碩文)이 해남 황조마을로 이주해와 한 마을을 이뤘다.

황조별묘 사당

조선에 정착한 후손들은 진린 장군을 시조로 삼아 광동(廣東) 진(陳)씨 가문을 개창했다. 전국에 있는 광동 진씨는 2천여 명이다. ‘陳’을 성으로 쓰는 14만 명의 한국인 가운데 1.4%에 해당된다고 한다. 광동 진씨들이 모여 사는 해남군 산이면 황조(皇朝)마을은 ‘중국 황제의 조정’에서 공을 세운 집안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황조마을의 한복판에는 진린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황조별묘(皇朝別廟)’가 있다.

진린 장군의 후손들은 한국에서 진린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마음아파하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드러내기 위해 한국의 일부 작가들이 명나라 장수들의 ‘갑질’을 과장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진린 장군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진린 후손들의 하소연은 설득력이 크다. 불확실한 억측과 선입견으로 진린이라는 명나라 장수의 위상이 부정적으로 강화된 측면이 크다.

황조별묘 사당내부

완도군은 한중 화해의 상징으로 이순신과 진린의 우정이 조명 받는 것을 매우 반기고 있다. 완도군은 2018년 9월 10일 ‘이순신과 진린, 420년만의 재회’라는 주제로 고금도 통제영과 조명수군 활동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세미나를 가진다. 이 세미나에는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제장명 교수와 진금동 중국 광둥성 진린문화연구회원, 정경희 한서대학교 교수, 이수경 전남대문화유산연구소 선임연구원, 정영래 완도문화원장 등이 참가해 이순신과 진린의 활동상을 재조명한다.

완도군이 주최한 이순신과 진린 관련 세미나 안내장

이 세미나를 통해 왜곡됐던 진린의 본모습이 상당 부분 회복되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 한중관계 회복이라는 시대적 분위기에 맞춰 필요 이상의 우호적 해석이나 평가가 일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여러 가지 기록과 사료에 등장하는 진린은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조명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한 인물이다. 공과를 분명히 가려 그에 맞게 기리고 평가하는 것이 합당한 자세다. 420년 만에 이순신과 진린의 관계가 재조명되고 있다. 진린 장군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호남제일번과 정영래 완도문화원장. 가리포진(加里浦鎭) 객사였던 청해관은 경종(景宗) 2년(1722) 가리포진)에 세워졌다. 궐패(闕牌)를 모셔 놓고 삭망(朔望)마다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비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던 곳이다. 호남제일번은 이순신 장군이 1597년 8월 24일 가리포진을 순시하던 중 이곳에 올라 적이 지나가는 길목이 한눈에 보이는 요충지라 말한 데서 비롯됐다.

도움말/김세곤, 정만진, 박영자, 정영래, 김종호

사진제공/완도문화원, 해남문화원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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