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71>제10장 의주로 가는 야망

다음날 아침밥상을 물리고 두 사람은 장기판 앞에 마주 앉았다.

“차포 떼줄까?”

윤인옥이 거드름을 피우며 여유있게 물었다. 정충신의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너 정도는 우습게 안다는 뜻이었다.

“윤교리가 차포를 떼쇼. 내가 봐줄탱개.”

정충신이 맞받았다.

“져놓고 괜히 나섰다고 징징대지 말고 애초에 부탁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해. 내가 봐줄 거니까. 높은 자의 아량이지.”

“걱정하들 마쇼.”

“정말 장기 두다가 물려주란 말 없기다?”

“물론이요. 사내대장부 목숨이 하나지 둘이 아니라고 했제라우? 나는 그렇게 세상 사요.”

“말끝마다 사내대장부, 대장부 하는데, 너 혹시 광주 바닥에서 주먹으로 놀았냐? 말하는 꼴이 영 비위 상한단 말이다.”

“맞소. 나 주먹 아끼고 살았소. 사내대장부로서 안좋은 일 생기면 써먹으라는 것이 주먹인디, 부모님께서 곱게 물려주신 몸을 험하게 다룰 수 없었제라우. 그래서 엥간하면 수양하고 주먹 아끼고 살았소.”

“겁주나?”

“무슨 염병 났다고 겁주고 하겄소? 그냥 사실대로 해본 소리제. 좌우지간 바둑이나 둡시다. 차포 띤다 어쩐다 쓰잘데기없는 얘기는 하덜 말고요.”

이런 문약은 거칠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 자는 알아주는 세도가에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랐을 것이다. 일찍 등과했으니 눈에 보이는 것 없이 우쭐대며 살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급제한 이후 지금까지 탄탄대로 비단길만 걸어왔다. 밑바닥 인생의 아픔이 무엇인지, 왜 삶이 팍팍한지, 어려운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모두가 다 저처럼 사는 줄 알고 살았을 것이다. 병판 대감의 사위니 그 기세 또한 얼마나 컸을 것인가. 이런 자가 곧 판관으로 나간다고 한다.

판관이란 자들이 저들 꼴리는대로 형량을 때리며 무지한 백성을 밟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판관의 역할일진대, 오히려 억울한 사람을 더 억울하게 밟아버린 다. 좋은 환경에서 사서오경 달달 왼 것으로 급제했으니 물리가 트일 리 없고, 백성의 고통이 어디에 있는지 알 리가 없다. 이 난리 속에서도 그저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윤인옥에게서도 벌써 그런 태도가 나온다. 이런 자를 혼구멍을 내야 한다.

“너 서출이란 말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 고아로 살다 보니 병판 댁에까지 올라온 거고, 꼴에 머리가 있다고 여기까지 온 거렁뱅이니 운이 좋은 거야...”

“서출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소. 고아면 어떻고 아니면 어떠냔 말이오. 사람을 그런 식으로 묶어불면 되겠소? 인간은 무릇 예를 알고 덕을 알아야 한다는 것쯤 알겄지요? 광주 촌놈도 아는디 사대부의 자제가 그것을 모르면 되겄냐고요. 그렁개 헛소리 하덜 말고 장기판에나 충실하쇼. 여기 서방님 차가 나가버리누만?”

얼겁결에 상이 닿는 줄에 윤 교리의 차가 놓였다. 두말 할 것없이 정충신이 두꺼비 파리채듯상으로 때려잡아 차알을 바닥에 내던졌다. 윤 교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말했다.

“순간의 불찰이다. 한 수 무르면 안되겠냐?”

“전쟁을 물려준 일 보았소? 목을 걸고 싸우는 것 아니냐고요.”

“띠벌.”

하고 그가 궁시렁거리더니 장기판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내내 혀를 찼다. 이럴수록 그의 신경줄을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서방님, 최초로 중원을 통일한 나라가 진나라지라우?”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바둑에나 신경 쓰자매?”

다급하니 그는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요건은 바둑이 아니고 장기요. 장기 얘기 땀시 하는 야그요. 수많은 나라를 천하통일한 진나라지만, 그 단꿈을 고작 15년만 맛보고 왕조의 막을 내렸단 말이요. 왜 그란줄 아시오?”

“내가 지금 그딴 걸 생각해게 됐어?”

“포악하기 그지없는 시황제와 그의 뒤를 이은 철부지 호해 황제와, 그를 눈먼 바보로 만들어 놓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환관 조고 땀시 붕괴돼부렀지라우.”

“너 뭘 말하려고 그러는 거야? 장기에나 신경쓰라니까.”

그러나 정충신이 그의 말을 묵살하고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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