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72>제10장 의주로 가는 야망

장기판 앞에서 정충신이 설명했다.

“진시황제의 사후, 진나라를 붕괴시킨 두 영웅이 바로 항우와 유방이란 장수요. 전쟁놀이인 장기도 유방의 한나라와 항우의 초나라 싸움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경기랑개요.”

“잔소리가 많아. 엉뚱한 얘기 집어치우구, 네 목 떨어질 것이나 염려하라구!”

“걱정도 팔자요. 유래와 뜻을 알고 장기를 두어야 장기의 진가가 나오는 법이요. 장기놀이가 주는 교훈은 영원한 승자란 없다는 것이요. 장기판은 누구에게도 평등항개요. 세상살이에는 특권 반칙 탈법 군림이 있지만, 장기판은 오로지 실력으로 싸우는 것이오. 촌놈이니 서출이니 무식쟁이니 그런 것은 장기판에선 통용이 안되지요. 나가 서출이 아닌디도 덮어놓고 서출이라고 몰아붙이는디 그게 될 말이요? 나도 양반자제랑개요. 그런데도 점잖게 사요. 전쟁터에서 서출에 천민이라고 해서 잘못 싸우고, 사대부 양반집안 자제라고 해서 잘 싸우요? 오히려 양반자제들이 더잘 도망갑디다. 전쟁터에 내보내는 대신에 자제들을 안전지대로 빼돌리는 사대부들이더랑개요. 자기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그렇게 하더란 말이요.”

“너 지금 유언비어 늘어놓기로 작정한 거야? 지금이 어느 세상이냐. 잡혀가면 그걸로 골로 가. 난세일수록 언어와 행실에 주의해야 한다. 이건 윤 교리의 마지막 충고다.”

그러나 정충신은 그의 신경줄을 건드리고 교란전술을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은연중 복수심 같은 것도 일어나고 있었다.

“촌놈도 서출도 나라의 동량인디 멸시하고 차별하니 전쟁터에서 도망가버리고요. 자기를 사람답게 살게 해주면 나라에 은혜를 갚는디 그런 것이 아니니 왜군을 환영하는 백성들까지 생겼더랑개요. 그런 세상에 전쟁을 이기겄소?”

“야, 포장 받어.”

그러나 정충신이 말로 윤인옥의 포를 때려잡았다.

“길이나 알고 장기를 두시오. 마 길에 포를 두다니, 나가 환장해불겄어.”

정충신의 장기는 무등산 원효사 스님에게서 배운 실력이다.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서 평상을 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스님과 맞대면하면 어느때는 정충신이 이기고, 어느때는 스님이 이겼다. 이런 때 스님에게 약을 올리면 감정조절이 안되어서 약이 오른 나머지 곧잘 무너졌다.

장기 알을 만지작거리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윤인옥을 바라본 정충신은 평상심을 잃은 원효사 스님 생각이 났다. 아무리 도를 닦았어도 수양이 덜돼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성질이 나오고, 끝내는 판을 그르친다. 정충신은 이런 상대방 유인전술에 능했다.

윤인옥이 포장, 마장을 받고, 끝내 졸장까지 받자 두 손을 들었다.

“삼세 번이야.”

“언제 삼시번이라고 했소?”

“장기는 삼세 번이야.”

그는 우격다짐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이런 자 요리하기는 이제 식은 죽먹기다.

“좋소.”

정충신이 응하며 다시 장기를 두는데 판세는 또 쉽게 기울었다. 외통수에 걸려 이번에는 열 몇 수만에 끝났다.

“목을 내놓으시오.”

마침 벽에 걸려있는 환도를 정충신이 빼어들었다. 길이만도 석자는 되어보였다. 방안인데도 환도의 칼날이 휘두를 때마다 번뜩였다. 백사 집안 대대로 물려온 명검이자 보검이었다.

“한번 봐주면 안되겠냐?”

그가 갑자기 쫄아서 사정했다.

“전쟁을 봐준 것 봤소? 군중(軍中)에서는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자 윤인옥이 앞문을 와락 열어젖히더니 쏜살같이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정충신이 더 날렵하게 그 앞에 서서 칼을 겨누었다. 그러자 내당 안방으로 달아나더니 그가 외쳤다.

“장모님, 이 자가 날 죽이려 하옵니다.”

안방에는 정경부인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윤인옥은 장모 뒤에 숨을 헐떡이며 숨었다. 정충신이 안방까지는 들어갈 수 없어서 문 앞에서 칼을 들어 방문을 겨누니 정경부인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에구머니나 충신아, 왜 이러냐. 너 혹 뭘 잘못 생각한 것이 있냐?”

“아니요. 윤 교리 목을 날려버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요, 마님.”

이때 백사 이항복 대감이 흥겨운지 시조가락을 흥얼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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