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8.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美黃寺)

불경 실었던 소는 간 데 없고 고운 절만 남아있네

인도에서 불경·불상 받아 세워진 절

고운울음 美와 금인 黃 합쳐 美黃寺

주춧돌·부도 등에 거북이·게·문어 조각

미황사 연기설화와 깊은 관련 있는 듯

색 바랜 대웅전 기둥은 말간 여인 얼굴

반야용선 상징 龍頭는 피안 향해 꿈틀

정유재란과 해난 사고로 원혼 많은 지역

대웅보전 마당에 괘불 내걸고 천도 법회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해남 미황사

미황사 전경. 미황사는 인도에서 바로 전해진 불경과 불상을 받아 세워진 절이라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바다생물과 관련된 조각이 절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유재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 대규모 수륙재가 벌어졌다.

해남 미황사는 단아한 절이다. 그리고 기품이 있다. 미황사는 큰 절이 아니다. 여인의 몸처럼 작은 절이다. 작지만 전체적으로 군살이 없이 날렵하다. 겉치장을 하지 않았지만 좀처럼 시선을 떼기 어려운, 고운 여인 같은 절이다. 미황사의 대웅보전은 40대 여인의 말간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막 세수를 하고 화장을 지운 얼굴이다. 다른 전각들도 마찬가지다.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은 탓에 더 시선이 가는, 깨끗한 손 같은 전각들이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목재들은 단청이 모두 씻겨 나가있다.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뽀얀 속살이다. 나뭇결은 은은하다. 결 따라 군데군데 실금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희미한 잔주름 하나가 눈가에 자리한 40대 여인의 얼굴이다. 미황사 당우의 배치는 달마산을 배경으로 누워있는 여인의 몸 같다. 넉넉지 않은 산자락에 자리한 가람이라 좌우로 날렵하고 전후로는 폭이 넓지 않다. 여린 여인의 몸 같은 절이다. 목선은 우아하고 허리선은 굴곡이 깊다.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이들의 가람을 여인의 몸으로 비유하는 것에 대해 적절치 않다고 나무랄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겠다. 고운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좀처럼 미황사에서 시선을 돌리기 어렵다. 우연히 마주한 여인의 깊고 그윽한 눈길이다. 놀란 마음에 얼른 시선을 비켰지만 마음은 그 여인을 쫓듯이, 미황사는 마음을 빼앗아간다. 미황사는 연심(戀心)을 품게 하는 절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절이라는 뜻이다.

미황사 입구

미황사는 내력이 깊은 절이다.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이라 전해진다. 부처님의 말씀과 불상, 탱화가 인도에서 바다를 거쳐 한반도로 직접 전해졌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흔적들이 미황사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9세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불적(불경과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미황사가 세워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할 수 있는 기록이나 문헌은 없다.

그렇지만 미황사 창건 및 연기 설화는 미황사가 인도불교의 도래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기다가 대웅전 주춧돌과 스님들 사리탑, 미황사 괘불 등에는 바다생물이나 용왕과 용녀 등 바다 관련 인물이 그려져 있다. 미황사가 바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절임을 매우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황사는 임진·정유재란 때 죽은 백성들의 영혼을 구제하고 유족들의 슬픈 마음을 위무하는 절이었다.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죽어간 의병들의 영혼과 왜군의 칼에 억울하게 숨진 원혼들을 달래는 법회가 끊임없이 열렸다. 해남지역은 정유재란 때 백성들의 삼분의 일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인명피해가 컸었다. 해남과 인접한 진도와 강진, 영암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들 지역은 왜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생계를 꾸리다 사고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미황사 석축. 미황사는 석축도 아름답다.

이런 이유로 미황사에서는 구천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법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렇지만 미황사는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버렸다. 그 뒤 세 차례에 걸쳐 중창됐다. 미황사는 조선 중·후기에 융성을 거듭하다가 18세기 중반 폐찰이 돼버렸다. 중창불사를 위해 절의 스님들이 군고단(軍鼓團:해남지방의 전통농악단)을 꾸려 완도 청산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모두 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고로 미황사는 하루아침에 버려진 절이 돼버렸다.

1980년대 초반까지 미황사는 이름만 남아있는 폐찰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현공스님과 금강스님(현 주지스님)이 중창불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중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미황사는 많은 외국인들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힐링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만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벽안의 외국인들이 미황사에서 마음을 다스리다 가곤 한다.

달마산. 지난해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총 연장 17.74km의 둘레길이 생기면서 많은 이들이 달마산을 찾고 있다.

미황사는 괘불재와 작은 음악회, 노을맞이 행사 등으로 차츰 이름이 알려지다가 최근에는 달마고도라는 달마산 둘레길이 만들어지면서 방문객들이 부쩍 늘었다. 달마고도는 송지면과 북평면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만들어졌다. 지난 2017년 11월 18일 개통됐다. 달마고도는 미황사에서 시작해 큰바람재, 노시랑골, 몰고리재 등 달마산 주능선 전체를 아우르는 총 연장 17.74km의 둘레길이다.

미황사 둘레 길에서는 서남해안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바다 위에 올망졸망 떠있는 섬들을 바라보면서 걷는 재미가 대단하다. 달마고도는 미황사 스님 40여명이 수년에 걸쳐 직접 손으로 나무뿌리와 돌덩이들을 치워 만든 길이다. 1구간부터 4구간까지 나눠져 있으며 전체 구간을 걷는 데는 6시간 정도가 걸린다. 마음과 몸이 절로 씻어지는 길이다.

■미황사

해남은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한 곳이다.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갈라져 호남평야로 치달으며 남긴 산들이 바로 무등과 월출, 두륜산이다. 달마산은 호남정맥 줄기가 바다를 만나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멈춰서면서 생긴 자락이다. 한반도의 끝 산이다. 길을 막아선 바다가 원망스러우련만 어깨동무하는 것처럼 바다와 같이 길을 가는 모습이다. 땅의 끝인 해남에, 그것도 바닷가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니 미황사 역시 한반도 최남단의 사찰이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년인 749년에 의조(義照)가 창건한 고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숙종 재위 18년인 1692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6~1694)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蹟碑)에는 절의 창건 및 연기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신라 경덕왕 8년인 749년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구에 다가왔다. 어부가 안을 살피고자 했으나 그럴 때마다 배가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런 뒤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주조한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었다. 배 안을 살피니 금함(金函)속에 <화엄경>과<법화경>을 비롯 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미황사 석축에 그려진 검은 소. 미황사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조와 제자들이 불경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논의하는데 흑석(黑石)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곧바로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우전국(優塡國:인도)왕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불경과 불상을 모실 곳을 구하고 있다.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곳에 불경을 봉안하고 절을 지으라. 그리하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말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가 한 곳에 이르자 크게 울면서 누웠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누웠다. 의조화상은 소가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소가 마지막에 걸음을 멈추고 누운 곳에는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아름다울 ‘미’(美) 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하는 ‘황’(黃) 자를 택한 것이라 한다.

■미황사 당우의 깊은 맛

미황사 대웅전과 응진당 전경

기록에 따르면 1264∼1294년 사이에 중국 남송(南宋)의 학자와 관리들이 미황사를 찾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 권 35 영암군(靈巖郡) 산천조(山川條) 달마산(達磨山)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지원 신사 년 겨울에 남송의 큰 배가 표류해와 이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남송의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들에게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달마산인가? 라고 물었다. 주민들이 그렇다고 하자 그 고관은 산을 향해 예를 갖추고 송나라 사람들은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 영험한 산 옆에서 태어나 자라니 부럽고 부러울 뿐이다’

이 내용을 참조해보면 미황사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에 불타버리면서 관련 기록들 역시 모두 없어져 버렸다. 1598년 만선(晩善)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660년(현종 1) 성간(省侃)스님이 중창했다. 1751년(영조 27) 덕수(德修)스님이 중건해 금고각(金鼓閣)을 짓고 1753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오고 대흥사 마을 사람들이 공사를 도와 대웅전·나한전을 중건했다.

그 뒤 고승 유일(有一, 1720∼1799)이 주석했으며 1858년(철종 9)에는 의현(義玄, 1816∼1874)이 만일회(萬日會)를 열었다.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황사는 40여개의 당우에 암자만 12개에 달할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지금은 대웅보전을 비롯 달마전(達磨殿)·응진당(應眞堂)·명부전(冥府殿)·세심당(洗心堂)·요사채 등의 당우가 남아있다. 이외에 석조(石槽)·당간지주(幢竿支柱)·부도군(浮屠群)·사적비(事蹟碑) 등의 문화재가 있다.

○대웅보전(대웅전)

미황사 대웅전과 대웅전 앞 괘불지주. 대웅전은 260여년 된 대웅전 기둥나무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단청이 바래진 탓에 드러난 나무의 맨얼굴을 대할 수 있다. 괘불지주는 대웅전 마당에서 법회를 비롯한 야단법석을 벌일 때 괘불을 내걸던 돌 구조물이다.

미황사의 중심 전각은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보물 제947호로 지정돼 있다. 대웅전은 1598년에 중건된 뒤 1754년과 1761년에 중수됐다. 1982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된 <대법당중수상량문(1754년)>에 따르면 응진전과 함께 1751년에 중수됐다. 막돌로 허튼 층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바닷게나 거북이를 새긴 연화문 초석을 두었다. 배흘림기둥은 싸리나무로 추정된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용두

단청이 모두 바래져버린 대웅전의 기둥은 앞에서 말한 대로 세수를 막 끝낸 여인의 정갈한 얼굴을 연상시킨다. 미색의 나무속살이 눈이 부시다. 결마저 아름답다. 정면 어칸문 좌우기둥에 돌출시킨 용두(龍頭)는 마치 살아있는 듯싶다. 금방이라도 기둥 속에서 뛰쳐나올 것 같다. 동쪽의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서쪽의 용은 맨입이다.

대웅보전의 용머리는 대웅보전이 바로 반야용선(龍船)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사는 세상을 차안(此岸)이라 한다. 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는 피안(彼岸)이다. 그 중간에는 고통의 바다(苦海)가 있다. 중생들은 수도와 깨달음을 통해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널 수 있는데 그때 타고 건너는 배가 반야용선이다. 부처님을 모신 법당이 바로 극락 행 반야용선이고 용머리는 그 용선의 뱃머리를 상징한다.

미황사 대웅전 내부천정에 그려진 인도어와 1천명의 부처

또 한편으로는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석선(石船)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도에서 경전과 부처님 상을 싣고 온 배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과 후불탱화가 자리하고 있다. 천장에는 천 명의 부처가 그려져 있다. 세 번만 절해도 삼천 배(三千 拜)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1751년에 중수된 대웅전은 해남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미황사 대웅전에서 유심히 살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주춧돌이다. 대웅전에는 열두 개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있는데, 전면 오른쪽 초석 넷과 오른쪽 측면 초석 둘에는 연꽃무늬(연화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곳에는 연화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북이와 게가 도드라지게 조각돼 있다.

미황사 대웅전 주춧돌에 새겨져 있는 거북이와 게

주춧돌에 새겨져 있는 것은 바다 풍경이다. 거북이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연꽃 건너편에 있는 게를 열심히 쫓아가는 모습이다. 거북이와 게는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과 불상, 탱화가 인도에서 바다를 거쳐 왔음을 바다동물과 생물을 통해 주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닷가에 위치한 절인 만큼 어민들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거북이와 게를 새겨 넣었다는 해석도 있다.

○응진당

미황사 응진당.보물 제1183호이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598년 만선(萬善)스님이 신축했으며 1751년 중수됐다. 1971년 주지 이하덕(李河德)이 일부 보수했다. 보물 제1183호로 지정돼 있다. 응진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과 아난, 가섭존자가 모셔져 있고 16나한상과 인왕상, 시자상, 동자상 및 불상명패가 봉안돼 있다.

응진당은 미황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당우다. 자연, 전경이 제일 좋다. 저 멀리 펼쳐져 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손을 뻗으면 바로 만져질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다. 해가 질 무렵, 미황사 앞바다는 붉게 물든다. 바다도 물들고 대웅전의 용머리도 물든다. 응진당에서 바라보는 노을 풍경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미황산 궤불

미황사괘불

대웅전 뒤편의 목궤에는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부처님이 그려진 대형 걸개그림을 일컫는다. 미황사 괘불은 폭이 5미터, 높이 13미터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대형 불화다. 보물 1324호이다. 미황사 괘불이 큰 것은 정유재란 당시 해남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과 해난사고가 잦아 한꺼번에 수 십 명이 수장(水葬)당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하고 천도(薦度) 시키려면 재를 지내야 한다. 이를 수륙재(水陸齋)라 한다. 불교에서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부처님의 말씀과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이다. 해남 일대에서는 워낙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은 탓에 수륙재를 미황사 법당 안에서 거행할 수가 없었다.
 

미황사 괘불. 대웅전 마당에서 벌어지는 수륙재에 사용하기 위해 부처님 그림을 크게 그려 내걸었는데 법력이 큰 괘불로 알려졌다.

그래서 부처님 모습을 크게 그려 걸개에 걸어놓고 대웅전 마당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괘불이 등장한 이유다. 괘불은 영조 3년인 1727년에 제작됐다. 괘불은 중앙에는 부처님이 아주 크게 그려졌다. 그리고 그 아래 왼쪽에 용왕이, 오른쪽에는 용녀가 각각 조그맣게 자리하고 있다. 괘불은 전체적으로 화려하다. 장엄하면서 다양한 무늬가 그려져 은은한 분위기도 풍긴다.

괘불에 용왕과 용녀가 등장하는 것은 미황사와 바다의 인연을 강조하는 한편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유재란 때 울돌목 인근은 물론이고 해남·진도·강진 바다에서는 수많은 조선수군과 백성들이 왜 수군과 싸우면서 목숨을 잃었다. 왜 수군도 수 천 명이 남해와 서해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에 의해 수장됐다.

병자호란 등으로 비명에 횡사를 한 이들도 많았다. 미황사 앞에서 바라보이는 바다와 미황사 일대의 육지는, 그래서 고통의 바다였으며 원혼이 사무치는 땅이었다.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년)스님이 미황사에 머물며 원통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수륙재를 열었다고 전해온다.

미황사의 괘불은 천도의식(薦度儀式)인 수륙재(水陸齋)와 영산재(靈山齋)에 걸렸다. 또 기우재(祈雨齋), 풍어재(豊漁齋)에도 사용됐다. 영산재는 49재의 한 형태이다. 49재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 만에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이다. 49재는 절차나 세부적인 뜻에서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각배재(各拜齋)·영산재 등으로 나눠질 수 있다.

미황사 괘불은 이를 직접 대하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전해진다. 괘불 아래쪽에는 괘불을 제작한 18세기 화승인 탁행(琢行), 설심(雪心), 희심(喜心), 임한(任閑), 민휘(敏輝), 취상(就詳), 명현(明現) 등의 이름이 보인다. 또 왕과 왕비, 세자의 장수를 축원하고 국가와 백성이 평안해질 것을 소망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다.

수륙재를 펼치는 풍경(이육남 작)

미황사 괘불은 수륙재를 위해 가을에 한번 대웅전에서 마당으로 모셔진다. 주지 금강스님이 괘불에서 착안해 시작한 미황사 괘불재는 이제 축제의 성격이 강해졌다. 본래의 의미는 잃지 않았지만 미황사 괘불재는 명성 높은 사찰 음악회로 알려져 있다. 불법을 듣는 야단법석(野壇法席:야외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자리)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얻는 ‘현대판 야단법석’이 된 것이다.

○명부전(冥府殿)

명부는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저승세계를 말한다. 염마왕(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유명계 또는 명토(冥土)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악을 행한 사람들은 지옥에 가게 되는데 이 지옥중생들을 변호해주면서 죄를 가볍게 해주는 이가 바로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은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을 미룬 분이다.

저승에 당도한 망자(亡者)는 염라대왕 앞에 있는 업경대를 지나가게 된다. 이때 업경대에는 망자가 살아있을 때 저지른 모든 일들이 비춰진다. 업경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서기가 죄목을 일일이 두루마리 문서에 받아 기록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죄가 무겁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가 극락왕생토록 인도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이므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한다. 128개 지옥을 나누어 다스리는 심판관 시왕을 모신 곳이므로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불린다. 또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미황사 명부전에 있는 시왕을 조각해 모신 분은 공재 윤두서이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는 아들이 없자 아들을 얻기 위해 절 근처에 있는 은행나무를 베어 10대 시왕을 조각했다고 한다. 이후 공재는 10명의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실수로 네 번째 시왕의 두 눈을 서로 다른 크기로 조각했는데 넷째 아들도 눈 크기가 달랐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식 이야기지만 명부전 시왕상이 공재의 조각 작품이라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미황사 부도밭(浮屠殿)

미황사 부도전

미황사 부도군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한 곳의 부도군에는 26기(基)의 부도와 설봉당(雪峯堂)·송파(松坡)·금하(錦河)·낭암(朗巖)·벽하(碧霞) 등 대사비(大師碑) 5기가 있다. 다른 한 곳에도 5기의 부도가 있으나 모두 도굴된 상태다. 특이하게도 미황사 부도 밭에서는 18세기 중반 무렵의 부도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40여명의 미황사 스님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150여 년 전 해남 치소마을 출신의 혼허(渾墟)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미황사 중창불사를 위해 절의 스님들이 농악대(軍鼓團:군고단)를 꾸려 해안지방을 돌며 시주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설쇠를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이 유혹하는 꿈을 꾸고 매우 불길한 징조라며 완도 청산도에서 예정돼 있던 마을공연을 쉬자고 말했다. 그러나 마음이 바쁜 주지스님은 공연을 강행했다. 배를 타고 청산도로 가던 중 때마침 불어온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해 미황사 스님 모두가 목숨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미황사 부도 밭에 1800년대 중반 입적한 스님들의 부도가 없는 것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을 암시하고 있다. 부도에는 고기와 게, 문어, 거북이 등이 조각돼 있다. 미황사가 바다와 깊게 관련이 돼 있음이 여러 곳에서 엿보이고 있다.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미황사 부도 밭은 그 독특한 분위기와 적요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가신 분들의 삶과 나 자신의 삶을 찬찬히 돌아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도움말/김종호, 박소정, 박미례

사진제공/위직량, 문화재청 해양유물전시관, 이육남, 춘양목, 황세옥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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