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74>제10장 의주로 가는 야망

윤인옥이 절퍼덕 앞으로 고꾸라지고, 웬 상투가 하나 숯덩이처럼 마루바닥에 툭 떨어졌다. 정충신의 장검에 윤인옥의 상투가 싹둑 잘려나가 바닥에 나뒹군 것이다.

“이것이 무슨 짓이냐?”

이항복이 소리치자 정충신이 대답했다.

“차마 목을 베진 못하겠습니다. 대신 상투를 베었습니다.”

“에이 못난 놈!” 이항복이 노기를 띠면서 덧붙였다. “당장에 목을 쳐야지, 고작 상투를 잘라? 그런 기백으로 무엇이 되겠느냐? 군인의 길을 간다면 도원수가 목표여야 하는데 그런 기개로 과연 도원수가 되겠느냐? 잘해야 부원수감이로다. 아쉽도다!”

고꾸라진 윤 교리를 붙들면서 정경부인이 외쳤다.

“어이쿠, 인간미 없는 인간. 사위 목을 치라니요? 당신은 정충신의 인정을 보고 배우세요! 그런 고지식과 몰인정으로 도원수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허허허, 고작 상투란 말이냐? 담력을 키워라. 사나이란 일찍이 기개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서릿발 같은 장부의 소신을 펴지. 소신은 호연지기에서 나오는 법, 글을 외는 한편으로 통군정에 올라 압록강을 바라보며 대륙을 호령할 호연지기를 길러야 하느니라.”

이 말을 남기고 이항복이 앞서 내당 뜰을 질러 사랑채로 들어갔다. 저녁상을 물리자 이항복이 정충신을 불렀다.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고 했느냐?”

“읽었습니다.”

“사마천이 누구냐?”

“기백이 하늘을 찌른 학자이시옵니다. 양심을 지키다 궁형(남자의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 여자는 질을 봉쇄하는 형벌)을 받은 역사학자시지요. 이런 사람이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 하였나이다.”

“어느 대목이 와닿더냐.”

“천도(天道)이옵니다.”

“천도? 천도의 이치를 아느냐?”

“사마천이 역사에 묻기를 천도(天道)가 과연 있는가를 절규하였나이다.”

“어떤 절규인가?”

정충신이 읽은 것을 줄줄이 외웠다.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덕행을 쌓은 사람의 편을 들고 악한 자를 벌한다고 한다. 그런데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肝)을 회치는 등, 포악 방자하여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으나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다. 그가 어떤 덕행을 쌓았단 말인가?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素行)이 도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종신토록 일락(逸樂)하여 부귀가 자손대대로 끊이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도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인가?<출처:김희진-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그렇다면 천도는 명명백백을 좋아하는군.”

“아니옵니다. 사마천은 옳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의해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간신배들이 인간을 모독하고, 권력을 농락한 자에 의해 백성들이 탄압받고 있는 현실에 진실로 하늘의 길이 있는가를 의심하였나이다. 도척과 같은 자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역사에 무슨 효용성이 있는가, 역사의 가르침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모욕하는 광기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 그런 오만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진실로 역사는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교훈을 주지 못한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묻고 있나이다. 역사의 허무를 말하기보다 효용성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이옵니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

“역사는 박물관에 보관된 고문서가 아니옵니다.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인본(人本)의 대안이옵니다. 두 번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고,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인류에게 부여하는 세상의 지침서이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니 역사의 무용성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끝없이 고통을 겪는가. 착하기만 한 백성들이 단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고, 가정이 찢기고, 부모형제들이 흩어지는 불행을 겪는가.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만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역사가 바른 것인가를 묻는 것이옵니다.”

“그것이 너의 평소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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