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77>제10장 의주로 가는 야망

윤인옥 교리가 소청에게 말했다.

“어서 안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거라. 저 자들 술방 앞으로 가지 말고 뒷꼍으로 가거라.”

소청이 두 손으로 찢긴 저고리 섶을 가리며 밖으로 나갔다. 윤인옥이 담담히 말했다.

“명의 조승훈 군대가 평양성에서 왜군에게 참패당할 때 소청의 가족이 죽었네. 저 아이가 살게 된 것은 여자였기 때문이지. 왜군에게 끌려가서 성놀이개가 된 것이야. 고을의 젊은 의병 몇이 숨어들어가 구출해 나온 것일세. 그때 저 아이 하체가 피로 범벅이 되어서 죽게되어 있었다는군. 왜 군사놈 대여섯놈이 달려들어서 어린 살을 마구 후볐으니 하체가 온전했겠는가. 왜놈들도 그 짓을 해놓고는 죽어가니 방치하고 물러가버린 것을 구해온 것이야. 그리고 흘러흘러서 의주땅까지 왔는데, 소녀가 갈 곳이 어디겠나. 객주집에 머물다가 주막으로 흘러들어와서 목숨 부지하는데, 내가 보기에 안쓰러워서 보살펴주고 있는 것이야. 기둥서방은 본의 아닌 것일세.”

“그런 사연이 있었구만요.”

“그런데 되놈 행패도 말이 아니란 말일세. 조선 여자들 씨를 말리고 있네. 원군으로 왔다고는 하지만 판판이 깨진 놈들이 요동성으로 도망을 가면서도 여자 오십 명, 백 명 내놔라, 인삼 오백근, 은 이천냥 내놔라, 난리가 아니네. 인삼이나 은은 내놓을 수 있지만 여자 아이를 오십 명씩, 백명씩 차출할 수 있겠는가. 끌려가는 아이들 절규하는 모습, 그 부모들의 피눈물을 보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윤 교리는 사서삼경이나 외는 창백한 선비로 알았는데, 그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평양에서 비밀회담이 끝났는데도 여지껏 조용하단 말이야.”

“비밀회담이요?”

정충신은 금시초문이었다. 명의 조승훈 군대가 섬멸되고 왜군이 평양성을 점령했는데, 잠시 잠잠한 사이 비밀회담이 열렸다. 회담에 나선 명일(明日) 양군 회담대표들이 회담 내용을 극비에 붙이기로 했다. 그러니 알려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윤 교리는 내막을 안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역강원에서 강습을 받은 한 역관으로부터 들은 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이 벗 심유경을 칙사로 조선에 보냈다. 석성은 왜군 사령관에게 명군이 맞서지 않을 것임을 알리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왜군이 요동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싸우더라도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인명으로 피를 흘리는 일이며, 자국은 어떤 희생도 강요받을 수 없었다.

왜군 1군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역시 싸움에 지쳐있었다. 두 달이면 끝낸다는 전쟁이 반년이 훨씬 지났고, 병참선이 끊겨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군사들 먹일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탈영병이 속출했다. 조선의 각 고을을 훑지만 그들 역시 죽은 시체를 거둬다 먹는 지경이니 제대로 된 양곡이 나올 리 없었다. 비밀리에 화평회담 제의가 오자 옳다구나 하고 선뜻 나서고, 평양 근교 강복산의 강복원에서 명의 사신 심유경을 맞았다. 회담장에 자리를 잡자 고니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천자 폐하의 말씀을 전하는 분이시니 칙사는 천자나 다름없으시지요. 칙사께서 멀리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가져오신 협상안은 천자의 말씀이시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 회담 결과는 극비에 붙여야 합니다.”

“아니, 회담 결과를 골고루 알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명나라는 물론이고, 우리 일본국, 조선도 알아야 하나하나 회담 내용을 이행하기가 쉬운 일 아닌가요?”

“그렇지 않소이다. 조선은 일찍이 병법은 약해도 예와 의를 숭상하는 나라요. 그들에게 예와 의가 없는 행동을 하면 칼이 목에 들어와도 굽히지 않소이다. 그래서 서서 죽는 한이 있어도 무릎 꿇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처처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 그것을 웅변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눈을 껌벅거렸다. 심유경이 덧붙였다.

“조선 몰래 조선반도를 두 토막 내서 서로 나눠가집시다. 싸움의 근원을 제거해야지요. 사실 우리가 싸울 일이 무어겠소. 그리고 서로의 조정에 이를 알리기 위해 두달간 휴전합시다.”

지쳐있는 고니시로서도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다만 함경도를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 2군사령관이 문제였다. 그는 호전광으로 전쟁에 취미를 갖고 있는 장수였다. 그것이 걱정되었지만 휴전은 성립되었다. 심유경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의주의 행궁을 찾아 왕을 알현했다.

“회담 성과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두 달간 휴전하기로 했나이다.”

왕에게 이렇게 보고하자 선조는 심유경의 손을 덥석 잡고 감격해했다.

“날뛰는 왜군을 잠재우다니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소. 우리는 이제 발을 뻗고 잘 수 있겠지요? 심 칙사만 믿겠소이다.”

여기까지 말을 들은 정충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발을 뻗고 잘 수 있다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 소중한 시간을 발뻗고 잘 일이 생겼다고요? 전쟁 준비할 시간을 허비하다니요? 당장 내전에 들어갑시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