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특집-<수몰 실향민의 귀거래사>

그리고 다시는 그리운 고향에 갈수 없으리…

민족 대명절 ‘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려

장흥댐 조성으로 물 속에 잠겨버린 태자리 눈에 아른거려

1994년 가을 공수평마을
1999년 봄 공수평마을 당산나무
신동규 소설가
마동욱 사진작가
민족의 대명절 한가위가 바로 코 앞이다. 올해도 예년과 다름없이 인구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 같다. 지체와 정체가 반복되는 콩나물시루 도로 위에서 장시간 시달리면서도 고향을 찾는 까닭이 자못 궁금하다. 단지 조상의 성묘와 혈육을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라는 간단한 말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정(情)’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 민족처럼 다정다감한 민족을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혈육과의 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과 친구와 이성 간의 정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쉽지 않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흔들리는 민족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북한 주민들도 좋아하는 초코파이라는 과자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인기 상품인 그 과자가 ‘情’이라는 상표를 사용한 후부터 매출이 급상승하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이름 잘 지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1994년 유치면 송정리 장터마을
고향 마을의 한가위는 보름달처럼 넉넉한 정을 포용하고 있다는데 필자는 그런 고향 마을을 갈 수 없어 서글픈 것이다. 태자리 고향 마을이 지금은 장흥댐 조성으로 물 속에 잠겨버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산자수려한 고장 장흥군 유치면 공수평 마을이다. 옛 면소재지에서 북쪽 방향 천년 고찰 보림사 방향으로 3㎞ 거리다. 지금은 장흥댐 상류 지점이 되어 마을이 있던 상공으로 호수를 가로지르는 아치교가 설치되어 있다. 그 아치교는 고찰 보림사로도 통하고 내지 마을로도 통하는데 머지않아 광주∼장흥 간 최단 거리의 관광도로가 될 것이라 한다.

긴 간짓대를 걸칠 수 있다는 보림사 협곡을 일컬어 ‘암챙이골짜기’ 라고도 부른다. 심심산골 유치는 호남정맥의 한 복판에 위치한다. 전북 장수군 주화산에서 시발해 무등산과 유치 산골을 경유하여 보성 방면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승주를 지나고 광양 백운산에서 지리산자락과 만나는 L자 형 산줄기가 바로 호남정맥이다. 이 호남정맥을 가리켜 유치산맥이라고 지칭하는 지리학자들도 있다. 지리산에 버금가는 유치 산골은 수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험하므로 예로부터 은둔자들의 아지트가 되곤 했다.

1995년 공수평마을앞 개울
동학농민혁명, 구한말 의병 봉기, 삼일 만세 운동 때부터 우국지사들의 은신처 구실을 하였다. 광복이 되고 정부 수립 직전의 뒤숭숭한 과도기에 발발한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때는 14연대 패잔병들의 은거지가 되었고 그로부터 이태 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역시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 정규군과 적치하에서 부역하였던 공산주의자들이 떼 몰려 와 몸살을 앓았다. 그들은 유치 산골에 잠시 머물다가 화순의 백아산과 곡성의 통명산을 경유하여 그들이 유토피아로 여기는 지리산으로 향했는데 유치는 그 루트의 시발점이 되었다.

1996년 겨울 공수평마을
유치 산골은 동쪽에 피재, 남쪽으로 빈재, 서쪽으로는 덤재. 이렇게 3면이 험준한 재로 형성돼 있다. 단 한 곳 낮은 목 빈재 기슭 부산면 심천 마을 앞으로 강이 흘러내리는데 그 게 바로 탐진천이고 그 탐진천을 가로막아 조성한 것이 바로 장흥댐인 것이다. 유치 안통 수 십 개 마을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수몰지구로 결정되고 태고적부터 대를 이어 둥지를 튼 수 천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 잃은 실향민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필자의 고향 공수평 마을은 극심한 가뭄이라도 들어 댐 상류가 마르면 앙상한 뼈대만 남은 옛터를 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지난해 극심한 가뭄 때 고향 마을은 잠시 옛 모습을 내보인 적이 있었다. 그 정보를 입수한 필자는 한달음에 달려가 옛 집터 주위를 서성이다가 허탈해져 귀가한 바 있었다.

고향 마을 어귀 동산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심어져 있어 물레방아간이 있던 선대모퉁이를 돌면 멀리서도 빤히 바라다 보였다. 필자를 비롯한 학동들은 그 느티나무를 등대 삼아 하교하던 터여서 그 추억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름철이면 무더위를 식혀주며 마을 사랑방 구실을 하던 마을의 수호신 그 위풍당당 하던 노거수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을 바로 뒤에는 한 골짜기가 부족하여 서울(수도)이 되지 못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아흔아홉골짜기 ‘엉골’이 위치하는데 다행하게도 지대가 높아 수몰을 면했다. 엉골에는 봄철이면 고사리, 곰취, 같은 나물 종류가 온 산에 그득하였고 가을이면 머루, 다래, 밤 등이 지천으로 열렸으며 사시사철 1급수가 흘러내리는 실개울에는 장어, 메기, 가물치 같은 큰 고기와 맵시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은어, 피라미, 산천어 등 물고기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그 개울물에 여뀌풀, 잰나무가루 같은 손 쉽게 구할 수 있는 독초를 짓이겨 물에 풀면 물고기들은 시들시들 하얀 뱃바닥을 드러내 보이곤 하였다. 그런 물고기들을 뜰채로 잡아 올려 어탕을 끓여 먹었던 추억 역시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1997년 가을 유치면 송정리 장터마을
고향 마을은 없어져 버렸지만 엉골만이라도 건재하여 세파에 찌든 필자의 마음을 동심의 세계로 이끌어 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솔직하게 말해서 필자도 이곳 엉골에 보금자리를 틀고 싶다. 그리하여 낮에는 산새 들새와 벗 삼고 노루,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등 야생 동물들과 노닐고 싶다. 밤에는 올빼미, 부엉이와 속삭이며 기운 달을 친구삼아 긴 밤을 보내고도 싶다.

2000년 여름 공수평마을
반소사음수 (飯蔬食飮水)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 낙역재기중(樂亦在其中) 불의이부차귀(不義而富且貴) 어아여부운(於我如浮雲)

‘거친 밥에 나물 먹고 팔 굽혀 그것을 베고 살더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으니 의롭지 않으면서 부하고 귀함은 나에게는 뜬 구름 같으니라.’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실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가르침대로 도연명(陶淵明)처럼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조리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아서 하염없이 만지작만지작 밑그림만 그리고 있다.

글/신동규<소설가·광주문협소설분과위원장>

사진/마동욱<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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