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일본 교토 코무덤 평화제(위령제) 화보

400년 세월 일본 하늘 헤매고 있는 조선의 영혼들

히데요시 조선정벌 독려위해 왜군에 조선사람 코베기 지시

소금에 절여 보내온 10만여 개 코, 수레 싣고 다니며 자랑

위세자랑하려 대불전 앞에 코무덤 조성, ‘자비 베푼다’ 위선

일본 제국주의자들, 코무덤에 모여 조선침략 야욕 다지기도

재일동포 ‘코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매년 위령제

코무덤 조성한 (1597년) 9월29일 맞춰 조선인 혼령 달래

올해는 전국 각지 춤·소리꾼·儒道會員 日 교토로 가서 참여

코무덤 희생자 많은 전라도 지자체 관심 적은 것은 아쉬움


일본 교토/최혁 주필·류기영 차장

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守閣). 오사카성은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했다. 일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소실과 재건이 반복됐다. 천수각은 성곽 중앙에 위치한 혼마루(本丸)에 고층으로 건설됐다. 전쟁 시에는 최후의 방어거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조가 매우 견고하다. 임진·정유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성에 머물면서 조선정벌을 지휘했다.
교토에 있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 코무덤으로부터 5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에도 막부군을 추격하기 위해 관동으로 향하던 중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사당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기간 동안 막부군과는 달리 천황을 우대했었다.
코무덤 평화제에 참석한 구루시마 보존현창회 무라세 아키오 회장(가운데)과 진도향토사학자 박주언씨(좌측), 남도일보 최혁 주필. 무라세 아키오 회장은 한·일간의 아픈 역사를 치유하기 위한 한일 양국의 노력과 협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쿄토 코무덤 평화제에서 학춤을 추고 있는 이규번, 김동찬씨. 이들은 코무덤에 묻혀 있는 영혼들이 새처럼 훨훨 좋은 곳으로 날아가라는 의미로 학춤을 췄다.
코무덤 평화제를 주관한 일본거주 한인 측 대표 배금한 선생. 배금한 선생은 일본거주 동포들이 결성한 ‘코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표를 맡고 있다. 지난 1995년 이 모임에 가입한 뒤 코무덤을 널리 알리는 한편 매년 위령제를 갖고 원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코무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문길(金文吉) 한일문화연구소장(前 부산외국어대 교수:맨 우측). 김 소장은 1984년 오카야마현(岡山縣) 비젠시(備前市)에서 한국인 학자로는 최초로 조선인 코무덤을 발견해 이를 국내에 알렸다. 이후 40여 년 동안 일본 내 코무덤 연구에 전력해오고 있다. 김소장은 188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코무덤 앞에 모여 있는 조선정벌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코무덤 앞 비석에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다짐이 새겨져 있다.
코무덤을 찾은 변민수씨 가족. 세종시에 살고 있는 변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교토 코무덤을 찾아왔다. 과거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서 들렸다고 했다. 변씨가 코무덤에 얽힌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코무덤 앞에 놓여 있는 이총 안내문. 교토시청은 공원안내문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적어두고 가로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 덧붙였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러우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자 자신들의 야만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치졸함에서 비롯된 일이다.
코무덤 앞의 석책들. 일본 막부는 조선정벌을 소재로 한 공연극(가부키)을 만들어 주민들로 하여금 즐기도록 했다. 조선정벌 관련 가부키를 공연했던 극장과 배우이름이 새겨져 있다. 1592년 조선을 침략 한 뒤 300년이 지난 다음에도 일본 우익인사들은 조선정벌을 주장하며 정한론을 확산시켰다. 교토 코무덤은 일본 극우인사들이 모여 조선정벌의 야욕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코무덤 옆에는 재일동포가 사는 ‘까치네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미즈는 내가 죽거든 코무덤 옆에 있는 이집을 재일한국인들이 사게끔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도상태씨(우측)가 이 집을 매입해 내부수리를 하고 ‘까치네 집’이라 이름 지었다. 코무덤의 영혼들이 곁에 한국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까치는 길조이기 때문에 코무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코무덤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도씨의 셋째 아들과 며느리가 곧 이집에 들어와 살 예정이다.
현의송 전 농민신문사장(우측)과 무라세 회장. 현의송씨는 현재 한일농업농촌문화연구소 한국 측 대표를 맡고 있다. 2005년 이후 일본 곳곳의 농촌을 찾아다니며 한국농촌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현씨의 알선으로 진도를 방문했던 히로시마시 수도대학 히구마교수가 진도 왜덕산의 존재를 알게 돼 이를 일본사회에 알렸다. 현씨는 왜덕산과 코무덤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한일 두 나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코운반 그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코를 잘라와 코무덤을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을 정벌해 일본의 국위를 높인 영웅이라 칭했다.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1933년 발간한 조선을 정벌해 일본국위를 높인 <보통학교국사권2>에 실려 있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코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검수관 옆에서 조선에서 잘라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내용이다.
조선에서 보낸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
살풀이춤. 코무덤 평화제에 참여한 김영자씨가 정유재란 당시 억울하게 숨진 조선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살풀이 춤을 추고 있다.
‘길닦음’ 제. 코무덤 평화제에 참여한 오신숙, 오정민, 김현숙, 박윤희, 김영자씨등이 원혼들이 좋은 세상에 가시라는 의미의 ‘길 닦음’ 제를 지내고 있다.
코무덤 평화제에 참여해 조상의 넋을 기린 사람들. 일본 교토에서 열린 코무덤 평화제에는 한국 측 인사로 진도 향토사학자 박주언씨와 현의송 전 농민신문사장, 김길문 한일문화연구소 소장, 진도군투자유치자문위원 임여안씨 등이 참석했다. 또 전남 진도와 순천, 부산, 경북 성주 등지의 소리꾼, 춤꾼, 진도 북놀이 보존회원들이 사비를 들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측에서는 재일한인들이 결성한 ‘코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 대표 배금한씨,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왜장을 기리는 구루시마보존현창회 무라세 아키오 회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이날 코무덤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한·일 간의 평화를 염원했다. /김대현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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