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59.일본 교토 코무덤과 조선인 희생자

교토 코무덤의 한과 치욕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관광객 찾지 않는 도쿄 풍국신사 앞 코무덤
풍신수길, 전투독려 위해 “조선인 코베어 보내라”
여자·아이까지 무차별 학살 후 20여만 개 코 잘라
소금 절여 10여만 개 도쿄로 보내자 코무덤 조성

야만 숨기려 日人들 이총(耳塚:귀무덤)이라 불러
日 제국주의자들, 코 무덤에 모여 조선침략 결의
수익성 없다며 한국여행업체 관광코스에서 제외
자강(自彊)과 극일(克日) 교훈 얻는 장소 삼아야

■豊臣秀吉의 조선정벌과 코베기 지시

교토의 코무덤.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에 있는 무덤이다. 당초는 코무덤이라 불렸지만 일본인 스스로 너무 야만스럽다하여 일본 내에서는 귀무덤으로 불리고 있다. 무덤 위에는 ‘고린토’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다.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을 맞아 일본 명치정부는 대대적으로 ‘풍공(豊公)300년제’를 거행했다. 코무덤 앞에는 일본 우익인사들이 조선정벌의 의지를 담아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인 1597년 9월 28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교토에 무덤 하나를 세웠다. 도요토미의 폭악한 성정을 그대로 드러낸 무덤이었다. 무덤에는 조선에서 보내진 코 10만 여 개가 묻혔다. 조선군사와 백성들의 시체에서 잘라낸 코들이었다. 그 코들 중 일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베어낸 것도 포함돼 있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 것도 부지기수였다.

도요토미는 1592년 20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은 곧 무너지는 듯 했다. 그러나 조선의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곳곳에서 왜군과 싸웠다. 명나라 군사들도 원군으로 들어왔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5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군사와 병기를 보충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조선에 있던 왜장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오사카성(大阪城) 천수각(天守閣). 오사카성은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했다. 일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소실과 재건이 반복됐다. 천수각은 성곽 중앙에 위치한 혼마루(本丸)에 고층으로 건설됐다. 전쟁 시에는 최후의 방어거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조가 매우 견고하다. 성 주변에 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인공하천(해자)가 설치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회유책을 썼다.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보내면 그 수만큼 땅과 보상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선에 보낸 왜장들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597년 6월14일 히데요시는 대마도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우끼다와 소서행장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히데요시는 왜군 1명당 한 되의 코를 보내라고 했다. 왜장들은 이 명령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명당 세 명의 조선인 코를 잘라서 바칠 것을 명령했다. 이때부터 왜군들의 ‘조선인 코 수집’이 시작됐다. 코를 모으는데 혈안이 된 왜군들은 죽은 사람,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조선에서 보낸 코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

코베기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왜군들은 자른 코를 소금에 절여 자루나 통발에 넣어 일본으로 보냈다.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들은 그 수를 헤아려 영수증을 발급했고 논공행상의 근거로 삼았다. 히데요시가 1597년 9월 13일 부대장 시마쓰다다도요에게 보낸 코영수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269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나가모리 나쓰가마사이에, 이시다미쓰나리, 마에다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1597년 9월 13일 풍신수길

시마쓰다다도요 귀하

히데요시의 잔혹했던 조선인 코수집과 이와 관련된 영수증(감사장)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약사출신으로 임진·정유재란 연구 및 자료수집에 반평생을 헌신한 고 조중화씨의 공이 크다. 조중화씨는 수십 년 동안 히데요시의 코베기 명령과 조선에서의 코반출, 코무덤 조성에 대한 연구를 했다. 그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오사카성 천수각을 비롯 에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땅 곳곳에 은밀히 보관돼 있던 코 영수증들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의 연구결과는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학민사)에 담겨 있다.

일본에 남아있는 ‘코 영수증’을 보면 왜군들의 코베기는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한 뒤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남원성 함락은 곧 전라도함락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 발을 붙이지 못했던 왜군들은 남원성 전투 이후 전라도 곳곳을 유린했다. 한편 1597년 9월16일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대승을 거뒀다. 왜군은 명량참패의 분함을 진도, 해남 지역 조선백성들을 죽이면서 풀었다. 전라도 해안지역 인구의 삼분의 일이 정유재란 때 죽임을 당할 정도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정유재란 후 길거리에 코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적혀있다.

교토에 있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 코무덤으로부터 5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에도 막부군을 추격하기 위해 관동으로 향하던 중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사당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기간 동안 막부군과는 달리 천황을 우대했었다.

-소금에 절여 보내온 10만여 개 코항아리 수레에 싣고 자랑

도요토미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들을 항아리에 담아 마차에 싣고 오사카와 도쿄를 돌면서 일본 백성들에게 구경을 시켰다. 조선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를 보여주면서 정벌의 위업을 과시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방광사(호코지)대불전 앞에 코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는 고린토(五輪塔)라 불리는 오층석탑을 얹었다. 무덤위에 육중한 석탑을 올리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원혼들이 일본 땅으로 나오지 못하게끔 취한 조치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국민학교(초등학교)역사교과서에 실려있던 코운반 그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에서 코를 잘라와 코무덤을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을 정벌해 일본의 국위를 높인 영웅이라 칭했다. 그림은 조선총독부가 1933년 발간한 조선을 정벌해 일본국위를 높인 <보통학교국사권2>에 실려 있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코 숫자를 헤아리고 있는 검수관 옆에서 조선에서 잘라온 코를 지켜보고 있는 내용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 코무덤에 모여 조선침략 야욕 다지기도

그러나 이 코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차츰 잊혀졌다. 대신 일본인들은 조선정벌에 대한 향수를 두 편의 가부키로 만들어 오사카에서 공연하곤 했다. 하나는 <본조 삼국지>이며 다른 하나는 <신공왕후 삼한책>이다. <본조삼국지>는 도요토미의 조선침략을 윤색한 극화다. 조선 삼국왕이 피로 쓴 항복문서를 히데요시가 받아내고, 히데요시 군사들이 조선병사들의 귀를 잘라와 교토에 묻는다는 내용이다.

<신공왕후 삼한책>역시 서기 249년 신공왕후의 한반도 정략을 다룬 공연극이다. <일본서기>와 <고서기>에는 신공기 49년에 ‘신공왕후가 물고기의 도움을 받아 직접 배를 몰고 가서 신라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어 고구려와 백제왕이 신하가 돼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니 속국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토대로 해 공연극을 만든 것이다. 물론 모두 조작된 역사기록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이를 사실로 믿는다.

코무덤 앞의 석책들. 일본 막부는 조선정벌을 소재로 한 공연극(가부키)을 만들어 주민들로 하여금 즐기도록 했다. 조선정벌 관련 가부키를 공연했던 극장과 배우이름이 새겨져 있다. 1592년 조선을 침략 한 뒤 300년이 지난 다음에도 일본 우익인사들은 조선정벌을 주장하며 정한론을 확산시켰다. 교토 코무덤은 일본 극우인사들이 모여 조선정벌의 야욕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1719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들도 이 가부키에 대해 분노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 교토 코무덤에는 메이지 시대에 이 두 개의 조선정벌과 관련된 가부키가 공연됐던 극장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새겨진 돌담(석책)들이 있다. 코무덤 앞쪽에 늘어서있는 석책에 새겨져 있는 배우들이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조선정벌에 관한 내용을 노래하면서 연기하고, 또 그것을 관람하던 일본인들은 얼마나 신나했는지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듯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있던 코무덤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천황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띄우기를 시작하면서 부터다. 1868년 메이지 천황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에도 막부군을 추격하기 위해 관동으로 향하던 중 오사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사당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기간 동안 막부군과는 달리 천황을 우대했었다.

이런 이유로 교토와 오사카 여러 곳에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세워졌다. 1890년에는 극우제국주의자들이 풍국회를 결성했다. 1898년은 히데요시가 죽은지 300년이 되는 해였다.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을 맞아 일본 명치정부는 대대적으로 ‘풍공(豊公)300년제’를 거행했다. 군사를 키워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하러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야말로 자신들의 대륙정벌 야욕에 부합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1894년)의 승리로 대륙정벌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높아지고 있었다. 정한론자들은 히데요시의 ‘미완의 위업’을 후손들이 달성하자며 조선침략과 식민지화를 적극 추진했다. 이런 상황인 만큼 교토의 코무덤 이야말로 조선정벌의 의지를 다질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교토 코무덤은 정한론자들이 모여 조선정벌의 야욕을 다짐하는 곳이 됐다.

■일제가 조선식민지화를 다짐했던 코무덤과 그들의 야욕을 새긴 비석

정한론자들은 코무덤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리고 코무덤 앞에 큰 비를 세우고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넣었다. 새겨진 음각들은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씻어지는 바람에 읽기가 불가능하다. 조중화씨가 어렵사리 번역해놓은 비석의 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유재란 때 한반도 전선에서 일본군이 연전연승하여 처 죽인 조선군의 코를 베어 전공의 표시로 바친 것이 수만 개가 되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조선 전사자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그 코를 호코지(방광사, 方廣寺) 앞에 큰 무덤을 만들어 묻고 코무덤이라 이름 지어 비석을 세웠다. 그 뒤 잘못 불러 귀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석의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相國寺) 주지 쇼다이가 쓴 것이다. 쇼다이는 왜군이 조선인의 코를 벤 것이 왜군들의 자발적인 충성심과 용맹심에 의한 것이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더 나아가 조선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로 다 죽이고, 코를 베어오라고 지시한 히데요시를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로운 사람으로 바꾸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인과 신체훼손을 지시한 히데요시가 전쟁 중에 죽은 조선인의 영혼을 딱하게 여겨 코무덤을 만들어 위무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절로 코웃음이 나온다. 일본의 어용 역사학자들과 우익인사들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더 참담한 것은 상당수 한국인들이 코무덤이라 하지 않고 귀무덤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인 한국인들이 히데요시와 왜군의 야만성을 희석시키는 귀무덤이라는 용어를 스스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경남 사천시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옆에 있는 묘 이름은 이총이다. 사천의 이총은 삼중스님이 교토 코무덤에서 채취한 흙을 항아리에 담아와 만든 무덤이다.

이 이총의 이름부터 코무덤(비총)으로 바꿔야 한다. 이총이 아니라 당연히 비총이다. 우리 스스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면서 일본에게 역사왜곡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 역시 분명히 코무덤으로 불러야 한다. 코무덤은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역사탐방지가 돼야한다. 그래야 극일과 애국의 정신을 키울 수 있다.

2018년 9월 28일 코무덤 평화제가 열리던 날, 세종시에 사는 변민수씨가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다. 변씨는 이날 평화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왔다. 단지, 과거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서 들렸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를 마다하고 일부러 코무덤을 보기위해 교토에 왔다고 했다. 이런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먼저 여행사들의 각성이 절실하다. 현재 터치더월드(Touch the World)라는 조그만 여행사만이 코무덤을 방문해 헌화하는 여행일정을 넣고 있다. 대형 여행사들은 코무덤을 관광코스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수지가 맞지 않아서라고 한다. 뭐라 할 말이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풍국신사)는 데려가면서 코무덤은 외면하고 있다. 풍국신사와 코무덤 사이의 거리는 불과 500여m에 불과하다. 코무덤의 조상들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코무덤이 귀무덤이 된 이유

코무덤 앞에 놓여 있는 이총 안내문. 교토시청은 공원안내문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적어두고 가로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 덧붙였다. 이곳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부터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러우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역사에 대한 왜곡이자 자신들의 야만성을 희석시키기 위한 치졸함에서 비롯된 일이다.

교토에 있는 코무덤은 공식적으로는 이총(耳塚, 미미즈카)이다. 교토시청이 코무덤 앞에 세워놓은 안내문에는 ‘耳塚(鼻塚)’이라 표기돼 있다. 耳塚(귀무덤)이라고 적어두고 가로 안에 鼻塚(코무덤:하나즈카)이라 덧붙여 놓은 것은 코를 묻은 무덤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곳 무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가 조성할때부터 줄곧 코무덤이라 불렸다.

그런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러우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뒤부터 코무덤이 귀무덤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신들의 야만성을 감추기 위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역사를 왜곡하는 극우성향 일본인들의 이중적 모습을 그대로 볼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 정부와 자치단체는 교토 코무덤을 이총이라 하고 있지만 한일 역사학자들은 이 무덤이 비총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지난 1997년은 히데요시가 코무덤을 만든 지가 400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계기삼아 실시된 학술토론회에서 한일역사학자들은 ‘풍신수길이 코베기 명령을 내린 것은 정유재란 때이며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은 이유는 후세에 자랑하기 위해서’라는데 대부분 동의했다.

그리고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이라는 이름이 잔혹하다며 ‘귀무덤’으로 이름을 바꿔 부른 것도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양식 있는 일본 학자들은 훨씬 그 이전부터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었다. 메이지 시대 도쿄대학 호시노 박사는 그의 논문에서 ‘교토 코무덤은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이다’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나카오히로시씨 역시 ‘코영수증’인 깃가와가 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 문서(鍋島家文書)를 제시하며 교토무덤이 ‘코무덤’임을 단정했었다.

■코무덤에는 몇 개의 코가 묻혔을까?

교토 코무덤에 묻혀있는 코 숫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고 조중화씨는 그의 책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에서 1598년 1월경 왜군이 자른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의 코가 21만4천752개라고 적었다. 그리고 2년 뒤 <바로잡은 임진왜란사>(삶과 꿈, 1998)에서는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코를 3천276개로 정정했다. 그는 왜장들이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상당수에 달하는 코영수증을 위·변조한 사실이 있었다며 엄격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이 같은 숫자를 제시했다.

그러나 코무덤 연구자인 나카오히로시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장은 31,477개라 주장하고 있다. 또 역사학자 금병동씨는 10만 개 이상, 도쿄대 호시노 박사는 ‘5만 개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견해를, 박삼중스님과 김문길 전 부산외대교수 12만6천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학자들은 왜장들이 받은 코영수증을 근거로 해 각각 코무덤에 묻힌 코의 수를 추산했다. 사실상 어떤 것이 옳은 지는 규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재까지는 12만개 이상의 코가 교토 코무덤에 묻혀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교토 코무덤과 최경회 장군의 수급

코무덤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문길(金文吉) 한일문화연구소장(前 부산외국어대 교수:맨 우측). 김 소장은 1984년 오카야마현(岡山縣) 비젠시(備前市)에서 한국인 학자로는 최초로 조선인 코무덤을 발견해 이를 국내에 알렸다. 이후 40여 년 동안 일본 내 코무덤 연구에 전력해오고 있다. 김소장은 1880년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코무덤 앞에 모여 있는 조선정벌을 다짐했다고 밝혔다. 코무덤 앞 비석에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다짐이 새겨져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일본 내 코무덤을 연구하고 있는 김문길(金文吉) 한일문화연구소장(前 부산외국어대 교수)은 코무덤 관련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교토(京都) 코무덤(鼻塚)에 최경회(崔慶會)장군의 수급(首級:잘라진 머리)이 묻혀 있다는 최기록을 찾아냈으며 이를 곧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경회 장군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분이다.

2018년 9월 28일 교토 코무덤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석한 김 소장은 “최근 발견한 교토 코무덤 관련 자료에서 왜군이 최경회장군의 수급을 가져와 비총에 묻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며 “관련 자료를 정리해 곧 공개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교토 코무덤에는 12만 여 개의 조선인 코가 묻혀있다고 알려져 왔으나 조선인 장수의 머리가 묻혀 있다는 사실(주장)은 처음 알려진 것이다.

김 소장은 1984년 오카야마현(岡山縣) 비젠시(備前市)에서 한국인 학자로는 최초로 조선인 코무덤을 발견해 학계에 보고한 이후 40여 년 동안 일본 내 코무덤 연구에 전력해왔다. 김소장은 오카야마현 쓰야마(津山)시를 비롯 대마도와 오까야마(岡山),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등지에서 코무덤을 발견했다. 코무덤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왜장들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조성한 무덤이다.

김소장이 교토 코무덤에 수급이 묻혀 있다고 밝힌 최경회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처절했던 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절한 분이다. 전라우의병장겸 경상우병사였던 최경회 장군은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싸움당시 전라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창(薩川創)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접근을 막아내 진주성 전투 승리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1593년 6월 10만 여 명의 왜군이 대공세를 편 2차 진주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최경회 장군을 비롯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의병장 김천일·고종후·문홍헌·오유·강희보·강희열 등이 이끄는 3천의 군사와 7만 명의 백성들은 9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끝까지 싸우다 왜군의 칼에 장렬히 순절했다. 지금까지는 최경회장군과 김천일·고종후 등 상당수 의병장들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회 장군의 고향인 전남 화순에는 장군의 충정을 기리는 충의사가 있다. 의로운 여인 주논개(朱論介)의 남편이 최경회 장군이다. 어렸을 때 최경회장군의 은혜를 입고 곁에서 성장한 논개는 정실부인의 권유로 후실이 된 뒤 남편과 함께 왜군들과 싸웠다. 2차 진주성싸움에서 남편이 죽자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 기생으로 변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남강가로 유인해 같이 죽었다. 충의사에 논개를 기리는 의암영각(義岩影閣)이 있다.

일본 교토 코무덤에 최경회장군의 수급이 있다는 것은 임진·정유재란 연구사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조선장수들의 시체에서 일부러 목을 잘라내 일본까지 가져간 것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2만 여 명의 부하를 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복수심과 왜군장수들의 전공과시 욕이 맞물려 빚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요토미는 평양성 전투 이후 조선철군을 준비하면서 왜장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진주성만큼은 꼭 함락시킬 것을 독려했었다.

■코무덤 옆의 까치네 집

코무덤 옆에는 재일동포가 사는 ‘까치네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미즈는 내가 죽거든 코무덤 옆에 있는 이집을 재일한국인들이 사게끔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도상태씨(우측)가 이 집을 매입해 내부수리를 하고 ‘까치네 집’이라 이름 지었다. 코무덤의 영혼들이 곁에 한국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까치는 길조이기 때문에 코무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코무덤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도씨의 셋째 아들과 며느리가 곧 이집에 들어와 살 예정이다.

코무덤 옆에는 재일동포가 사는 ‘까치네 집’이 있다. 이 집은 원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미즈는 내가 죽거든 코무덤 옆에 있는 이집을 재일한국인들이 사게끔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도상태씨(우측)가 이 집을 매입해 내부수리를 하고 ‘까치네 집’이라 이름 지었다. 코무덤의 영혼들이 곁에 한국인 후손들이 살고 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라는 생각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까치는 길조이기 때문에 코무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코무덤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방문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도씨의 셋째 아들과 며느리가 곧 이집에 들어와 살 예정이다.

과거 왜군들이 사용했던 신표는 행운을 가져오는 물건이 돼 풍국신사등지에서 판매되고 있다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자리한 코무덤(일본 현지에서는 이총공원)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도움말/ 김문길·박주언·현의송·김세곤

사진제공 /류기영·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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