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최혁주필의 ‘무등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야 일본을 이겨낼까?
최혁<본사 주필>

기자는 지난달 27일 일본 교토로 코무덤 위령제 취재를 갔었다. 30일 귀국예정이었는데 일본을 강타한 24호 태풍 짜미 때문에 발이 묶여 버렸다. 도톤보리 입구에 있는 카스미야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이곳은 제법 비싼 호텔이었다. 간사이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예정에 없는 3박(三泊)을 더 해야 했다. 호텔 숙박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조금 싼 호텔로 옮겼다. 니폰마치 전철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아파(APA)호텔에 다시 짐을 풀었다.

호텔 룸은 아주 작았다. 룸에는 침대와 책상이 있었는데 여유 있는 공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화장실도 겨우 일을 볼 정도 작았다. 최소한의 공간에 최대한의 편의시설을 배치한, 아주 효율적인 룸 구조였다. 그렇지만 시설은 깔끔했다. 침대는 깨끗했고 바닥도 청결했다. 그런데 시선을 끄는 것은 벽에 몇 개의 책과 각종 안내문이 비치돼 있는 것이었다. 혼자서 여행하고 있는 숙박 객을 위해서 마련해둔 것으로 짐작됐다.

무슨 책인가 싶어 펼쳐보았다. 세권의 책 중 한권은 아파호텔의 성공에 관한 홍보 책자였다. 나머지 두 권의 책은 일본의 근현대사와 미래전략에 관한 책이었다. 그런데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책은 영문으로 쓰였는데 제목은 The Real History of Japan THEORETICAL MODERN HISTORY 3권과 같은 책 4권이었다. 저자는 세이지 후지(Seiji Fuji)였다. 책 내용을 살펴보니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을 과격한 문체로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책은 일본의 핵무장 필요성과 북한의 위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면 선제적인 군사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식의 논문 여러 편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자신들의 번영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서 전쟁을 벌여도 된다는 식의 패권주의적 발상이 가득했다. 그리고 일본이 동북아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자(Peace Keeper)가 되려면 중국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주를 이뤘다.

기자는 책을 읽으면서 등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교토 코무덤 앞에 서있던 일 제국주의자들의 ‘조선침략다짐의 비’를 보는 것 같았다. 1898년 일본 우익인사들이 대부분이었던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은 교토 코무덤 앞에 모여 조선지배를 위해 힘을 모아갈 것을 결의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어둔 코무덤은 조선정벌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이루지 못한 과업을 자신들이 해내겠다며 다짐했다.

정한론자들에게는 교토야말로 조선침략의 야욕을 불태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20만 대군으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도요쿠니(豊國神社)신사가 있고 신사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는 10만 여 개의 조선인 코를 묻어둔 무덤이 있으니 교토야말로 욱일(旭日)을 다짐하는 최고의 장소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0년 뒤 을사보호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5년 뒤 조선을 완전히 삼켰다.

태풍 짜미가 오사카 등 일본 관서지방을 강타했던 30일, 기자는 호텔 방에 갇혀 있었다. 모든 전철이 운행 중단됐고 상가도 문을 닫았으니 어디를 갈 수가 없었다. 거센 바람이 불고 있어서 다칠 우려도 컸다. 호텔에 비치돼 있는 산케이신문(産經新聞)을 가져와 들여다보니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논란’기사가 실려 있었다. ‘한국정부가 제주도 관함식에 참가하는 일본자위대 군함에 욱일기를 내려달라고 했는데 매우 부당하다’는 내용이었다.

산케이 신문은 일본 우익보수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사이다. 욱일기 논란 기사 논조 역시 매우 거칠었다. ‘일본의 자랑이자 상징인 욱일기를 어찌 감히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너희들이 내리라고 요구할 수 있느냐’는 식이었다. 기사를 읽고 나니 언짢았다. 코무덤 취재를 마친 뒤 착잡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기사를 송고한 뒤끝이어서 기분이 더 좋지 않았던 듯싶다. 한국을 하대(下待)하는 일본을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깊었다.

해답은 일본의 본모습과 속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사카와 교토는 조선침략의 전진기지였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성(大阪城)에서 조선정벌을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교토에 조선정벌을 자랑하는 코무덤을 세웠다. 그런데 우리는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보지 못한다. 천수각(天守閣)의 웅장함에 감탄만 할뿐이다. 한국관광업체들은 교토의 도요쿠니 신사에 들려도 길 건너 코무덤에 한국 관광객들을 데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관광만 있고 역사는 없다. 역사를 알아야 사람이 바뀌고 미래가 바뀐다. 극일(克日)은 한일 간의 참혹한 역사를 아는데서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집단인격’을 개선해야 한다. 집단인격은 민족성이라 말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핸드폰 울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일본 전철안의 풍경과 누가 있든 말든 큰 소리로 전화 받으며 떠드는 우리 전철안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우리를 먼저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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