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의 물결, 나주와 개성의 자매결연을 꿈꾸며
강인규<전남 나주시장>

강인규 전남 나주시장

이른 감이 있지만 이래저래 잊지 못할 2018년이 될 것 같다.

4월 남·북 정상이 분단이후 최초로 판문점에서 만났다. 도보다리 위를 거닐며 담소를 나누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행원도 통역관도 없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한 민족임을 새삼 실감했다.

5천 년을 함께 살았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며, 이제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15만 동포 앞 대통령 연설은 민족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이 아닐까.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왜 한 핏줄인지, 왜 통일을 이뤄내야 하는지는 이 한 문장으로 충분했다.

한반도 전쟁종식, 비핵화, 이산가족 상봉 등 새로운 평화시대를 알리는 판문점 선언에 유독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선언문 1조 4항의 내용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 교류, 왕래의 주체로 당국, 국회, 정당 등과 함께 지방자치단체가 포함됐다.

남, 북 지자체 간의 교류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 축으로 다시 자리 잡은 것이다. 보수정권시절 개성공단이 문을 닫은 후, 유소년 축구경기 등 스포츠대회를 제외하고는 지난 수년 간 이렇다 할 지자체 간의 교류가 없었기에 더욱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수년 전부터 대한민국 수도 서울시가 평양시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급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각국 수도로서 위상과 규모로 보아 자매결연이 갖는 상징적 의미야 두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전국 광역자치단체들도 남북 교류 관련 조례제정서부터 ‘교류협력기금’을 조성하는 등 북한과의 교류확대에 적극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농업분야 먹거리에서부터 관광, 문화, 예술, 도시개발까지 교류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평화와 교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우리 나주도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할 때다. 필자는 나주시와 개성시의 자매결연를 꿈꾼다. 기회가 된다면 꼭 추진해보고 싶다. 두 도시는 천 년의 역사 속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알다시피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다.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개성은 서경(평양), 동경(경주)와 함께 삼경의 핵심지로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나주는 고려의 ‘어향’으로 불린다. 임금이 태어난 고향이다. 나주 땅을 기반으로 후백제 정벌에 성공하며,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은 나주의 ‘사위’다.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부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2대왕 혜종이다.

개경을 수도로 한 고려는 나주를 끊임없이 주목해왔다. 성종 2년(938)때 전국에 설치된 12목 중 한 곳이 나주다. 이후 나주목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주목을 유지했다. 8대왕으로 즉위한 현종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 1018년 강남도를 대표하는 전주와 해양도를 대표하는 나주의 지명에서 각각 앞 글자를 취해 지금의 전라도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2018년은 전라도라는 이름이 정해진지 1,000년이 되는 해다.

겉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광복 후 개성은 현대적인 문화·관광도시로 발전했다. 고려 500년의 도읍지답게 역사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나주읍성 4대문과 원도심 내 유구한 역사문화자원이 있듯이 개성도 고려의 수도성인 개성성과 근현대 다양한 형태의 주택,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두 도시는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다. 전남 서남부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나주는 목포, 해남 등 남도의 주요 시·군을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개성 또한 평양, 해주, 원산, 판문 등으로 통하는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 나주 중심부를 관통하는 영산강이 과거 전남 내륙지역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해상교역의 거점이었듯 개성도 임진강나루, 벽란도 등 여러 개의 나루와 포구가 있다.

전라도 정명 천 년을 맞아, 과거 나주가 얼마나 큰 도시였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이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료가 많지만 조선시대 임진왜란 후 곡식세금으로 나주를 설명하곤 한다. 당시 전국 세곡이 8만2천석이었는데 나주가 4만석을 냈다. 나주평야로 전국의 약 50%가량의 세곡을 충당한 셈이다. 전라도 2대 조창인 영산창이 있었고, 전국 각지로 세곡을 실어 나르는 세운선만 53척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인구 또한 당시 22,300호로 전국에서 무려 5위였다.

개성도 북한을 대표하는 곡창지대다. 농경지는 시 넓이의 30%가량을 차지한다. 농업생산에 유리한 지형, 기후, 토양 등 자연조건을 갖췄다. 그 중 쌀은 곡물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배, 복숭아 등 과수재배가 활발하다. 나주와 개성은 참 많이 닮아있다.

고려시대 개성이 중앙제도권의 중심지다면 나주는 호남, 지방의 중심도시였다. ‘영산내해’ 열린 바닷길과 통하던 그 시절, 영산강은 그 자체로 바다였다. 나주는 바다를 통해 보다 넓은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했다. 선진 문물의 창구였으며, 격동의 시대에 흐름을 좌우했던 역사적 힘을 갖고 있는 도시였다.

민선 7기 출범 후, 시정슬로건을 ‘함께여는 미래, 호남의 중심 나주’로 정했다. 전라도 정명 천 년의 해에 출범한 민선 7기 희망찬 미래를 11만 시민과 함께 열고, 나주를 다시 호남의 중심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머물고,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 때 쓰였던 문구가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였다. 괜시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나주와 개성, 고려왕조를 지탱했던 중앙과 지방의 두 도시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남북 교류의 물고를 튼다면 이보다 더 값진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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