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1>11장 청년장교

“네가 차석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내 사가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쯤 알렸다?”

이항복 대감은 뚱딴지같이 말했다.

“네?”

“네가 내 집에 있기 때문에 시관에게 달려가서 따진 것 아니냐. 내 힘을 믿고 따졌단 말이더냐?”

“아닌디요?”

“그건 권세를 남용하는 것이로다.”

엉뚱한 불똥이 튀고 있는 꼴이었다. 단순하게 의구심이 생기고, 승복할 수 없어서 따진 것 뿐인데, 어른들은 복잡하게 생각한다. 만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알아보자는 것인데, 그런 것조차 병판 대감 댁에 기숙하고 있으니 시관에게 달려가 따졌다? 묘한 논리였다.

“사달이 나라고 한 것은 아니고요, 승복할 수 없어서 가본 것입니다요.”

“가만히 있으면 끝나는 일 가지고 나서니 그게 사달이 아니고 무엇이냐.”

부당한 것을 제대로 항의도 할 수 없다는 것, 생각할수록 요상했다. 정충신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서있자 이항복 대감이 점잖게 나무랐다.

“보거라. 너는 내 사가에 있기 때문에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세상의 눈은 그러니라. 네가 내 집에 있는 사람이라 실력대로 장원급제 하였다 해도 남들이 사적인 정으로 봐주었다고 할 것이니, 억울한 경우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인간사니라.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인즉, 분이 나도 의연하게 눈감고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하느니라. 백성들이 네가 당하는 것보다 더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어디 하나 둘이더냐. 무지해서 넘어가거나, 알아도 체념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너는 훨씬 특권을 향유하고, 또한 실력이 도망가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이 없도다.”

“대감마님, 부당한 말씀이옵니다. 부당한 일을 보고도 묵인하고 넘어간다면 억울해서 살겄습니까요. 억울한 일이 있으면 풀어야지 덮고 가자는 것이 말씀이 되옵니까? 이래도 당하고 저래도 당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랫것들이옵니까?”

“아니다. 어떤 장수는 승진시험에서 서른번의 활쏘기를 하는데 수물아홉개를 맞추고 하나를 못맞췄다. 서른개를 다 맞출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한발을 맞추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는 줄 아느냐?”

“소인이 어떻게 알겠습니까요.”

“자만해질까봐서 그런 것이다. 그는 승진을 못했지만 더큰 장수가 되었도다. 너는 내 집에 와있으니 큰 도량을 갖추어야 한다.”

“고건 대감 마님 생각이고요, 내 권리는 내가 찾아야지요.”

“닥치거라. 내가 필부필부(匹夫匹婦)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로되, 네가 내 사가에 있으니 사람들은 오해할 것이니라. 힘은 아낄수록 힘이 나는 법이다. 알겠느냐.”

“몰겄는디요?”

대감은 자기 체면만 생각하나? 이항복은 당쟁과 파벌을 헤쳐나온 능수능란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침묵할 때 침묵하고, 말할 때 말하면서 누구나 나뉨이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그의 인품에서 나온 힘이었다. 이 대감은 일로써 승부를 보아야지 파벌의 뒤에 숨어서 그 힘을 빌려 어찌어지해보려는 사람을 경멸했다.

“제 지벌(地閥)이 하찮은 관계로 장원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옵니까?”

“그만큼 말했으면 알아들을 수 있으련만. 꾸역꾸역 내지르는 것 보니 내가 민망하구나. 열등감 때문인가. 속이 밴댕이 창자만 해선 안되느니라.”

이런저런 이치를 따지는 정충신을 바라보는 이항복은 그러나 속으로 옳거니, 했다. 불의에 대항하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사실 그도 조금은 화가 났다. 저 멀리 남녘에서 올라온 소년인데다, 별 볼일 없는 가대라고 시관들이 하찮은 존재로 업신여긴 것은 아닐까? 사대부가 들락거리는 궁궐 주변에 새카만 촌놈이 겁도 없이 설레발치고 나대는 꼴이 밉살스러워서 눌러버린 건 아닐까. 그러나 이 대감은 이렇게 타일렀다.

“천문학 성적이 부족했다고하니 더 천리를 익히라는 뜻이렸겄다? 북두칠성과 샛별자리를 보고 야간행군의 방향을 잡아 군졸을 어김없이 이끄는 지휘관의 병법을 개발하라는 뜻이렸겄다? 조숙한 벼는 먼저 모가지가 잘리는 수가 있겄다? 이렇게 이해하라. 인간지사 새옹지마니라.”

“장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데 그 자리를 놓치다니, 속이 뒤집어질라고 하누만요.”

“아직도 저것이! 인생에서 일등과 이등 차이는 한순간의 기분일 뿐이고, 저 아래 급료병이나 국출신, 권무군관도 별장, 중군장, 도원수가 될 수 있다. 일이 등이 인생승부의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너는 이번을 계기로 천문학은 물론 말 병을 고치는 마의학도 공부하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학도 공부해서 장차 병졸을 다스리는 지도자로 우뚝 서야 한다. 너는 내 사사로운 집안 사람이 아니라 성남, 정남, 규남, 기남에 이어 내 다섯째 막내아들이다.”

 

"광주전남 지역민의 소중한 제보를 기다립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남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