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 기념

<고려건국과 전남의 해양세력> 학술회의

전남 지역의 고려 해양역사 문화자원으로 가꿔야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 동안 열렸다. 학술회의에서는 전남이 품고 있는 고려의 해양정신과 유산을 발굴·정리해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12일부터 13일까지 이틀 동안 열렸다. 한국중세사학회 소속 교수들 및 향토사학자, 시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학술회의는 12일 목포대학교 목포캠퍼스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13일에는 나주·영암·무안·강진 일대 고려시대 유적지를 답사하며 현장에서 활발한 토론회를 가졌다.

이번 학술회의는 전남의 고려 관련 역사와 유적지를 재조명하는데 있었다. 고려 건국을 전후해 전남지역에 존재했던 해상세력의 존재와 그 역할, 산재하고 있는 관련유적지를 살펴봄으로써 웅혼했던 해양개척정신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다. 전남이 품고 있는 고려의 해양 정신과 유산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되살리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과 한국중세사학회,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가 주최 및 주관하고 전남도가 후원했다. 전남도는 학술회의 등을 통해 도출된 전남지역 고려관련 유적지에 대한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를 자원화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전남지역 내 고려사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토론진행 및 토론자

○황상석 조선대초빙교수(장보고글로벌재단)

○신성재 해군사관학교 교수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종순 나주시청 공무원

○이병희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토론진행)윤용혁 공주대 교수

■참석자

○김기섭 한국중세사학회장

○(학술회의 사회)홍영의 국민대 교수

○최성환 목포대 교수

○정명섭 전남도 문화자원과장

○한정훈 목포대사학과교수(총괄진행)

<기조발제>

■고려시대 전남지역 해양사의 전개와 의의

○강봉룡 목포대 사학과 교수(도서문화연구원장)

왕건은 견훤이 포괄하지 못한 서남해지역을 장악하고 그 위세를 몰아 918년에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했다. 후백제의 건국과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전남의 해양세력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고려시대의 해양활동, 즉 造船과 해운의 능력에서 전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빼어났다. 고려는 주로 전라도에서, 전라도산 나무로 배를 건조했다. 조운제도 전남지역 중심으로 운용했다.

전남, 특히 서남해지역은 고려시대 대중국 해양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말여초에 ‘신문명 3종 세트’(선종, 차, 청자)의 유입 관문으로서의 나주 회진포, 흑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북쪽의 ‘산동반도’(적산포)와 남쪽의 영파로 이어지는 한중해로의 발착항구로 기능한 영암 상대포, 중국 북쪽의 적산포 및 남쪽의 영파와 서남해지역을 이어주는 한중해로의 분기점이자 합류점으로서의 흑산도 읍동포구 등은 고려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다.

김봉룡 교수가 왕건의 몽탄 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3세기에 들어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직면하게 된 국난을 타개하는데 전남지역 도서해양세력의 역할이 상당했다. 고려 무인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섬을 거점 삼아 바닷길을 사수하는 ‘도서해양전략’을 내세워 몽골 침략군에 맞섰는데, 그 가운데 특히 1256년의 압해도 해전은 전세의 국면을 뒤바꾸어 놓은 중대 전기를 마련했다. 삼별초가 진도로 재천도를 단행하고 서남해지역의 도서해양세력과 함께 여몽연합군에 대항해간 점은 의미가 깊다.

해양활동에 전념하며 국가 운영에 기여해온 전남지역의 도서해양세력은 ‘지는 해’의 운명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麗蒙이 그간 삼별초의 저항해 가담했던 도서해양세력을 위험세력으로 낙인찍어 그들의 생활기반인 섬을 비우는 ‘공도’의 조치를 강제로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자위세력을 상실한 도서연안지역은 왜구의 침탈을 받아 버림받은 황폐의 공간으로 전락해 갔을 것이다.

1996년에 바다의 날(5월 31일)이, 그리고 올해 2018년에 섬의 날(8월 8일)이 국가기념일로 확정되었다. 섬과 바다와 강이 한 묶음이 되어 최고의 해양환경을 갖추고 있는 서남해지역이 고려시대에 이어 다시 한번 국가사회에 기여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이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활기를 띠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장보고의 해양유산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교수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교수

장보고가 청해진을 운용하였던 기간은 13년에 불과하였지만 그가 전개한 각종 활동은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이었다. 특히 그의 활동무대가 해상을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대부분의 역사적 활동이 육지에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여, 장보고의 주된 활동 무대는 바다를 통하여 전개되었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청해진의 설치 및 운용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청해진의 관할 구역이 어디까지 퍼져나갔을까 하는 점이다. 청해진의 장보고와 관련된 유적지는 오늘날 완도읍 장좌리 맞은편의 장도(將島)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완도 지역의 지형과 면적을 고려할 때 1만 명의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청해진의 관할 구역을 완도 일대에 한정하지 않고 신라의 모든 해상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청해(淸海)’의 의미를 ‘해적을 말끔히 소탕한다’는 청해진의 설치 목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해진에 뒤이어 당성진이 건립되었고, 또 당시 통신과 교통수단의 현실을 고려할 때, 청해진이 신라의 전 해상을 통제하였다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의 섬에 통일신라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목장(牧場)이 상당수 존재했다. 서남해 해상세력을 제압한 청해진 세력이 이들의 어량(魚梁)과 염분(鹽盆)은 물론이고, 때로는 목장과 우마(牛馬) 까지도 직접 장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청해진 장보고 세력이 중국 남부 무역항과 한반도 및 일본을 연결하는 남부 사단항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보여진다.

■왕건의 고려 건국과 나총례, 오다련, 최지몽

○김갑동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김갑동 대전대학교 교수

고려 왕조 성립기에는 전남 출신 인물들의 활약이 컸다. 우선 궁예 통치 시절에 羅聰禮는 왕건과 결탁하여 나주가 궁예에게 귀속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에 궁예는 왕건을 나주에 파견하였고 이 일대를 점령한 후 금성군에서 羅州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공으로 후일 나총례는 三韓功臣으로 책봉되고 土姓으로 분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주의 지배세력이 된 그들은 가끔씩 중앙의 관인을 배출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 나유·나익희·나영걸·나흥유 등이 있었던 것이다.

왕건은 또 나주에 출정하였다가 나주 오씨 부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오씨 부인의 아버지는 吳多憐이었는데 딸과 왕건과의 혼인을 통해 유력한 호족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주 오씨 부인의 아들인 武가 태자로 책봉되고 태조의 뒤를 이어 惠宗으로 즉위하면서 급부상하였다. 혜종이 죽은 후에는 혜종에 대한 사당을 건립하고 그를 제사함으로써 지배세력으로 남을 수 있었다.

영암 출신의 최지몽은 태조 8년 경 왕건에게 발탁되어 왕건의 사부 역할을 하였다. 꿈에 9층탑에 올라간 것이 후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해몽으로 ‘知夢’이라 이름을 하사받았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 대에는 왕규의 모반을 미리 예견하여 혜종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였다. 혜종은 무인이었던 박술희의 보필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전남 지역의 인물들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것은 왕건 집안이 해상세력으로 일찍부터 전남 지역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회학 교수

왕건이 나주 서남해를 공략함에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 이외에 독자세력인 압해도 능창이었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압해도는 서남해 뱃길은 물론이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으로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군사적 거점 역할도 가능한 섬이 압해도였다. 이 같은 압해도에 당시 수전을 잘한다 하여 수달(水獺)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던 해상세력이 능창이었다. 왕건과 능창은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나주 완사천에서 교수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912년에 능창은 갈초도(葛草島, 葛草渡, 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창마을)에 있는 소적(小賊)과도 서로 연결하며 왕건을 해치려고 하였다. 수적으로 불리한 능창 입장에서는 바다의 싸움에 익숙한 자신의 특기를 살려 왕건을 처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첩보망을 늘여 놓은(종첩縱諜) 왕건의 술책에 능창은 자신의 이동로를 들키어 사로잡혔다. 그런데 왕건은 능창을 즉결처분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태봉의 수도인 철원(강원도 철원)으로 올려 보냈다.

남해신당은 고려 때 국가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능창을 대면한 궁예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모욕을 주면서 살해하였다. 왕건이 즉위한 후에도 나주 서남해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왕건이 통일의 주인공이 됨에 나주 서남해가 큰 역할을 해주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과정 중에서 압해도 수달 능창을 제압한 것은 왕건에게 큰 사건이자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왕건은 용이 되어 통일의 완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능창은 이무기가 되어 역사의 패자로 기록되었다.

■고려 태조의 訓要 8조에 대한 재검토

○김병인 전남대 사학과 교수

김병인 전남대 사학과 교수

고려 태조의 훈요 8조에는 관직 등용불가의 대상으로 ‘차현이남 공주강외 주군인’과 ‘官寺奴婢와 津驛雜尺에 속하는 자들’이 함께 지목되어 있다. 태조의 훈요 8조가 후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변용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앞으로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한 논증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훈요 8조가 변용되었다면, 그것의 원래 형태가 어떠했는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변용ㆍ개작ㆍ조작ㆍ위작ㆍ날조 등은 원래의 ‘사실’ 혹은 ‘진실’을 토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그 ‘사실’ 혹은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밝혀야 하는 것은 그러한 주장의 마땅한 책무일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변용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을 행한 주체가 있어야 할 터이니, 본문에서와 같이 ‘현종대의 관료들’ 정도의 간략한 언급을 뛰어넘어 그 주도세력을 드러내야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즉, 현종대 정치세력 가운데 태조의 훈요를 변용해서라도 ‘차현이남 공주강외 주군인’의 득세를 제어하려 했던 주도세력을 분명하게 밝혀낼 때 ‘변용설’이 한층 힘을 받을 것이다. 아울러 당시 ‘고려’를 위해 복무했던 신료(들)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려를 세운 ‘태조’의 유훈을 과연 변용할 수 있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도 끊임없이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 전남 동부지역 해상세력의 추이

○문안식(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문안식(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청해진이 혁파된 이후 전남의 연안지역은 군소 해상세력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심에 오다련과 능창 등 영산내해와 서남해 연안지역의 해상세력이 자리하였다. 순천만과 광양만 등 전남 동부의 연안에도 박영규와 김총으로 상징되는 해상세력이 존재하였다. 광양 마로산성에서 출토된 신라 말기의 海獸葡萄文鏡과 中國製 陶瓷 등은 순천만 일대에서 羅唐日 삼국을 잇는 대외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반영한다. 

박영규와 김총은 견훤의 거병, 무주 점령과 후백제 건국의 기틀 마련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백제는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된 후 나주를 경유하여 고려로 망명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견훤의 망명 이후 박영규도 고려에 투항할 의사를 전달하였다. 박영규와 김총 등 전남 동부지역 출신의 해상세력들이 신검정권을 등지면서 후백제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박영규는 후삼국 통일전쟁 최후의 순간에 왕건을 지지하였고, 그 결과 두 딸이 왕후에 책봉되는 등 국가의 원훈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박영규는 ‘海龍山神’으로 추숭되는 등 순천의 지역사회 통합과 결집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김총도 박영규와 마찬가지로 순천부의 ‘城隍堂神’으로 존숭되었다.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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