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3>11장 청년장교

“신분증 까라.”

지금부터라도 궁궐 주변의 질서를 꽉 잡아야 했다. 멱살잡힌 자가 캑캑 밭은 기침을 뱉어내면서 사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던지 옷소매에서 패를 꺼내 내보였다. 과연 명군 패거리였다. 패를 도로 건네주자 그 자가 패를 호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면서 한 소리 했다.

“원군을 뭘로 보고 신분증 까라 마라 겐세이야?”

“겐세이?”

순간 정충신의 뇌리에 섬광과도 같은 것이 스쳐지나갔다.

“체포해라!”

정충신이 창검을 들고 서있는 초병들에게 명령했다. 초병들이 우루루 달려들어 포승줄로 묶으려 하자 그들이 일시에 검을 빼들어 반항했다. 그들의 칼솜씨는 뛰어났다. 눈 깜짝할 새에 초병 머리가 하나 날아가버리고, 또 한 초병이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정충신이 몸을 날려 한 놈 목을 베고, 환도로 대치한 사이 증원병이 들이닥쳐서 나머지 세 놈을 생포했다. 정충신의 판단력은 그대로 적중했다. 그들은 명군이 아니라 왜군 간자(間者)들이었다.

궁중의 비밀을 캐내려고 접근한 첩자들인데,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과 화평회담을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정탐병을 압록강 변경과 의주 행재소에 풀어놓고 적정 상황을 탐지하고 있었다. 정충신은 이 사실을 용호영 본부에 알리고 이들을 감옥에 구금했다.

정충신은 병조로 달려가 일직 중인 내금위장에게 말했다.

“용호영 초관과 초병의 복색을 제대로 갖춰주시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내금위장이 잠을 깨운 것이 불쾌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복장은 무슨... 여긴 옷깁는 집이 아닐세.”

“초관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아니하니 우린 그저 시중잡배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업신여기고 있소이다. 제대로 된 제복이 있어야 한다니까요.”

“환도하면 그때 맞춰 입으라구. 여긴 그런 걸 갖춰입을 처지가 못돼. 신료들도 일상 융복 차림 아닌가.”

길게 하품을 하고, 코를 후비던 그가 다시 말했다.

“너는 소문이 병판의 총애를 받는다더군. 어린 놈이 벌써 출세했어. 그렇다면 병판 나리께 직접 가서 말하려무나.”

“직속 상관에게 진언하는 것이 군의 질서 아닌가요?”

“군 질서? 우리가 언제 질서 찾고, 복색 찾고 살았냐. 잔소리 말고 돌아가!”

정충신은 그 길로 병조판서 집무실로 향했다. 벌써 왜의 간자 체포 소식을 보고받았던지 이항복 대감이 그를 반겼다.

“말 한마디로 단서를 잡아 첩자들을 때려잡았다고?”

“초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사옵니다. 그보다 초관일수록 위엄과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당연히 그렇지.”

“그런데 행재소의 신료나 군관의 복색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하찮은 융복 차림입니다. 비상 군사(軍事)시 입는 복장이므로 품계의 구분이 없습니다. 먼 길을 떠날 때나 갖춰 입는 복색이라서 체통이 서지 않습니다. 상하가 이렇게 엉성한 철릭을 입고 융사(戎事)를 접하니 오랑캐들까지 조롱하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북풍이 몰아치니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이 변방 오랑캐의 복색처럼 여우털이나 시라소니, 토끼털을 벗겨 아무렇게나 뒤집어쓰고 다니고, 사대부들 또한 그러하니 중국인들이 ‘그대 나라의 신료나 관원들은 산적떼들 같다’고 희롱하고 있나이다. 복색은 국체와 관계되는 것이니 초췌한 복색으로는 나라의 기강과 권위가 안섭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도감 낭청과 외방의 차사원들이 구타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있나이다. 제대로 된 의관을 갖추지 못한 소치가 이런 식으로 우스개거리가 되고 있나이다. 의장과 복색을 갖춰 초관의 체모를 살려주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일리 있다.”

이항복 대감이 머리를 끄덕였다. 며칠 후 용호영 초관의 복색이 달라졌다. 예조로부터 받은 군복은 초라해서는 안된다는 지시에 따라 꿩 깃이 달린 군모에 흰색 솜바지에 계급에 따라 청색 흑색 두루마기를 걸친 제복이 지급되었다. 임시 궁궐일망정 행재소의 궐문이 환해지고 절도가 분명해졌다.

어느날 이항복 대감이 정충신을 불렀다.

“내가 이여송 장군 접반사로 명받았다. 나를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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