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5>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매서운 북풍이 기러기떼가 날아가는 창공을 베고 지나갔다. 하늘은 맑은데도 얼음조각 같은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북방의 날씨는 가늠할 수 없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으나, 명군은 단련되었는지 끄떡이 없었다.

의주 남문 아래 드넓은 벌판에 이여송 총병관 환영식장이 마련되었다. 깃발이 펄럭이고, 수만 군사가 드넓은 야영지에 도열한 가운데 취타대가 요란하게 북과 피리를 불고, 기병과 보병이 도열한 가운데 이항복이 이여송 총병관을 천막으로 맞아들였다. 임시 천막은 몽골식 게르였지만, 그 안으로도 쉴새없이 모래바람이 날아들어 누구나의 입에 모래가 씹혔다.

“추운 날씨에 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이여송이 주인인 듯 받았다.

“어서 앉으시오.”

접반사 일행과 이여송 군 지휘관들이 자리에 앉았다. 전개되는 취타대의 요란스런 음악소리에 아랑곳없이 이여송이 이항복을 훑어보았다. 어떻게 골탕먹이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항복 뒤에는 조선 신하들이 배(拜)하고 앉았고, 정충신이 초관 자격으로 이항복 곁에 섰다.

“이 의주 땅은 우리에게 참으로 보배로운 땅이요.”

이여송이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마치 자기 땅이라는 태도였다.

“우리에게도 보배로운 땅이지요.”

이힝복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군사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외교전도 그에 못지 않다.

“왜 자랑스런 땅이란 말이오?” 이여송이 물었다.

“네. 의주 땅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태조 성상께옵서 복무했던 곳입니다. 바로 저 건너 강상에 보이는 위화도에서 태조 성상께옵서 꿈을 키웠던 곳이지요.”

이항복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손으로 가리켰다.

“태조는 한양으로 쳐들어가고, 그 자손은 의주로 도망오고, 참 볼만한 풍경이오.”

이여송이 껄껄껄 웃었다. 순간 이항복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거나말거나 이여송이 말을 이었다.

“홍건적이 의주땅을 피바다로 만들 때 우리가 도운 사실을 아시오?”

“알고 있소이다.”

“장사길 장사정 형제가 의주 백성들을 대신해서 홍건적을 맞아 싸우는데 역부족이었소. 이원계·이성계 형제도 역부족이었소. 후대 사람들이 두 형제가 전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구라요. 우리가 아니었으면 어림없었지. 그중 이원계가 물건이었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이런 개새끼가 다 있나. 내놓고 조선건국 왕을 깔아뭉개고, 조선조를 깎아내리다니? 더군다나 이원계를 치켜세운다? 물 먹이자는 수작이 완연하다. 이원계는 이성계보다 다섯 살이 많은 이자춘의 전실 부인이었다. 전실 부인 한산이씨는 병으로 일찍 죽고, 후실로 들어온 최씨 부인에게서 이성계 형제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이복형 이원계와 아우 이성계는 문과 무과 모두 급제하고, 함길도(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홍건족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 왜구가 침략하자 이원계는 군 원수로서 변안렬을 이끌고 조상의 고향 전라도로 내려갔다. 고려 우왕6년(1380), 왜구가 광주와 능주·화순 두 현을 침범하자 최공철 증원부대와 함께 왜구를 몰아냈다. 왜구는계속 충청·전라·경상 3도 연해에 쳐들어오자 3도순찰사 이성계가 임지 출병했다. 이때 이원계는 아우를 맞아 남원·운봉에서 왜구를 격퇴했다.

이성계가 회군을 하고, 고려를 무너뜨리자 이원계는 이성계와 길을 달리했다. 이성계가 끝내 고려를 멸망시키자 그는 자결했다. 아우의 편에 가담했으면 임금의 형으로서 큰 출세를 했으련만 불사이군이라는 신념을 지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것을 빗대 이여송이 조롱하고 있었다.

“도덕성이 결여된 자는 나라를 강탈하고, 양심을 지키는 자는 패자로 남고, 역사란 참 역설, 모순, 이율배반적이란 말이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소. 명나라 천병(天兵)이 홍건족을 물리치고, 이번엔 왜군을 섬멸하러 온 것이오. 그때나 이때나 명조(明朝)동맹은 변함이 없는 것이오. 든든한 군신관계 의리를 천군이 지키는 것 아니겠소, 하하하.”

이여송이 또 호방하게 웃었다. 건방기가 가득 묻어난 웃음이었다. 기녀들이 발발 떨면서 춤을 추고, 곁에서 술시중을 드는 여인들도 새파랗게 몸이 얼어있었다. 그런 중에 몇몇 장수는 벌써 기녀의 저고리 안으로 차가운 손을 집어넣어 젖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이 엄동설한에 사만삼천 병력을 이끌고 다시 출병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선물을 준비해왔사온 바, 부족하지만 너그러이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항복이 옷소매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꺼내어 이여송에게 두 손으로 올렸다.

“아니? 그런 선물도 다 있소?”

이여송이 의아하다는 듯 두루마리 종이를 받아들어 펴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건 조선반도 지도 아니오?”

그러나 이항복은 빙그레 웃으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사실 그도 두루마리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몰랐다. 정충신 초관이 설명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럴 바엔 아예 펴보지 말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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