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고통 계속되고 있는 여순사건

일제의 강점과 광복, 분단, 6·26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우리 근현대사 전개과정에서는 수많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광복 이후 남북한은 미군과 소련군 진주를 계기로 상극의 사상과 국가체계를 받아들이면서 이념갈등이 심화돼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좌우이념갈등은 남북한의 동포를 같은 민족이면서도 적으로 여기게끔 했다.

남북한 이념갈등과 사상경쟁에서 터져 나온 것이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이다.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사건이다. 봉기세력의 점거·통치와 정부군의 진압·토벌 과정에서 여수지역에서만 1천200여명의 민간인을 포함 5천여 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제14연대가 봉기하자 전남지역 남로당원과 동조하는 좌익인사들이 함께 여수·순천·보성·고흥 일대를 장악하면서 경찰과 경찰가족,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봉기군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더 큰 피해가 속출했다. 이승만 정부는 ‘반군’과 ‘반군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다수의 민간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차별 처형했다.

제14연대에 소속됐지만 봉기에 가담하지 않고 부대를 이탈한 다수의 군인들도 반란군으로 지목돼 희생됐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한 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정부차원의 ‘여순사건에 대한 조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가 절실한 이유다.

여순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좌우익 희생자 유족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한자리에 앉기를 거부하고 있다. 양 진영 간의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려면 무엇보다 여순사건이 이념갈등과 수많은 모순,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과도한 진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야하는데, 이 실타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여순사건 70주기를 맞아 19일 전남 여수시 중앙동 이순신광장에서 열리는 합동 추념식에 안보·보훈단체 회원들이 참석키로 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경찰 유족회는 같은 시간 여수경찰서에서 경우회 주최로 열리는 ‘여순사건 70주년 순국경찰관 추모제’에 참석한다. 화해를 위한 정부차원의 지원과 특별법 제정 등 치유책 마련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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