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6>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이게 선물이라는 거요?”

이여송이 단박에 사람 놀리느냐는 식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항복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표정에는 조선반도 지도를 선물한 뜻을 헤아려 보라는 주문이 담겨있었다. 정충신이 그에게 진언한 이유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지도에는 멀고 가까운 우마차 길과 산길과 샛길, 민가의 밀도와 들판, 험악한 산세와 군사요새지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특히 한양-개성-평양-숙천-개천-영변-정주-안주-태천이 눈에 보이는 듯이 그려져 있었다. 정충신은 광주 목사관에서부터 틈틈이 천문, 지리, 한의학, 마의학을 익혀왔고, 전라도에서 한양-개성-평양-의주를 두 차례나 왕복했다. 그 도중에 눈썰미 있는 시선으로 지형지세를 파악해 종이에 그려놓았다.

“이 접반사, 혹 장난하자는 것 아니지요?”

이여송이 노기를 띠며 다시 물었다. 이항복은 정충신의 진의를 알아차린지라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가볍게 목례했다. 명의 장수들도 아직 헤아리지 못하는 듯 뭐 이 따위야,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한 장수가 무릎을 탁 치더니 아는 체를 했다.

“아, 조선 땅을 우리에게 바친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가 조선을 접수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장수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군요. 이런 통큰 선물이라니, 참 대단한 보물을 받았소이다.”

“조선 지도를 선물로 주었다면 조선 땅에서 명군 수만 명을 살리는 일과 같소. 조선의 지형지물을 빠삭하게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명군이 위험한 곳, 역습할 곳, 주둔할 곳, 산과 강을 바꿔탈 곳, 이런 지형과 지세를 알게 해주는 것 아니겠소?”

“바로 그것이오. 그러잖아도 조선 출병이 갑갑했는데, 지도를 얻게 되었으니 작전 전개에 있어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오이다. 백미 수만 석, 기생 수백 명을 선물로 받은 것보다 값진 선물이오이다 그려.”

“그렇소이다. 지도는 작전 전개의 등불이요, 뱃길을 열어주는 나침반과 같은 안내자올시다. 조선은 참으로 선물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오. 조선의 권문세족이 타락한 줄 알았더니 이렇게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것 보니 싹수가 있소. 근래 지배층이 교체되었다더니 사고들이 창의적이고 진취적이오.”

“그렇지요. 광해라는 젊은 세자가 앞장서 왜를 쳐부수는데, 백성들이 많이 따른다지요? 젊은 세자의 명민함이 눈에 잡히는 듯하오.”

그들은 제각기 해석하고, 난해한 문제를 푼 수험생들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을 던져주면 그것을 가지각색으로 유권 해석하고 유추하는 방식. 마치 상징시를 해석하는 평론가들과도 같다. 머리가 없는 자일수록 아는 척 현학적이기까지 하다. 이항복이 곁에 서있는 정충신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너의 지혜는 이미 성공하였도다. 정충신은 그러나 시치미를 따고 장창을 굳게 쥐고 앞만 바라보고 서있었다.

“이런 선물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요.”

한동안 시쿤둥하게 종이조각을 내려다보던 이여송이 마침내 동의했다. 그 자신도 무식하고 꽉 막힌 장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병사들이 또한 길을 안내해드릴 것입니다.”

이항복이 더욱 공손하게 말하자 이여송 곁에 있던 낙상지 참장이 나섰다.

“좋소. 그런데 의주 땅에 웬 성을 그렇게 많이 쌓는답니까? 의주 산 능선마다 성을 쌓는다는 것은 왜군을 방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명군을 방비하겠다는 뜻 아니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항복이 강하게 부정했다.

왕이 의주로 몽진(임금이 먼지를 쓰고 뒤집어쓰고 피난함)한 이후 행재소가 착수한 첫 업무가 백성들을 동원해 성을 쌓는 일이었다. 의주 백성들은 그동안 홍건족, 거란족 등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각 성을 쌓았지만, 방치한 통에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것을 다시 축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낙상지가 보는 견해는 달랐다. 그것은 엉뚱한 노역이었다. 왜군에게 쫓기면 뒤로 밀려 오도가도 못하게 성에 갇히게 된다.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압록강을 건너오는 명군이나 후금군을 막는 성채 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우군의 진입을 막는 모양새인데, 여기에 막대한 노동력을 투입하고 있다.

“전쟁은 민심부터 살피는 것이 기본 전술입니다. 쓸데없이 주민을 괴롭히는 것은 민심 이반을 가져오지요. 축성은 왕권의 권위를 위해 쌓는 것일 뿐, 적의 방비와는 무관하오. 실용성으로는 목책 하나만도 못할 수 있소.”

이해가 안된다는 듯 이항복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낙상지가 다시 설명했다.

“내 상세하게 설명하리다. 축성은 양병(養兵)보다 못하다는 것이요. 복건성과 항주, 영파의 용맹한 남방 군단을 보시오. 그들이 성을 쌓아 강병이 되었소? 아니오. 오히려 성을 부숴서 강병이 되었소. 성을 부수고 쳐들어가 승리한 것이오. 잘 훈련된 양병들의 모습이오. 조선 지도를 선물로 주셨는데, 살펴보면 모두 험준한 산악지대요. 이 산악이 모두 성벽 역할을 하오이다. 은폐물과 엄폐물로 이 이상 좋은 성채가 없단 말이외다. 그런데 자기들 힘 안든다고 에먼 백성들 잡아다 족치면서 노역에 동원하고 있소. 불만이 없겠소? 조선의 행정가들은 왜 이따구로 주먹구구고, 비현실적이요? 애민사상을 그런 식으로 발라도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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