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198>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너만 똑똑하냐?”

이여송이 낙상지에게 퉁을 주었다. 지까짓 게 뭔데 사대주의 찾고, 주체성, 주인의식 따위 술맛 없는 말만 읊는가. 누구는 몰라서 말을 안하나. 이여송의 핀잔에 다른 장수들이 유쾌하다는 듯 껄껄껄 웃었다. 사람 병신 만드는 데는 순간이었다.

“연회에 가면 저런 인간들이 꼭 한둘은 끼어있다니까. 어이, 낙상지, 낙지인지 낙상지인지 모르겠다만 술먹는 자리에서까정 고상한 척해야 하니?”

다시 좌중에서 와크르 폭소가 터져나왔다. 낙상지가 뒤통수를 맞은 듯 멀뚱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여송은 사실 지쳐있었다. 그는 간쑤성 닝샤[寧夏]에서 몽골 귀화인 출신 보바이(?拜)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 제독으로 제압하고 북경에 개선한 지 얼마 안된 상황이었다. 보바이난을 평정한 공으로 도독(都督)으로 승진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임명되어 곧바로 조선으로 파병된 것이다.

그러나 모병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도리없이 누루하치의 일부 병력까지 흡수해 압록강을 건넜는데, 와보니 군 기강이 개판이었다. 도처에서 약탈과 부녀자 겁탈이 일상화되었다. 평양 1차전에 투입되었다가 패전한 조승훈 패잔병들까지 기어들어와 삭주 영변 안주 평산 의주 등지는 백성들이 살 처지가 못되었다.

이여송은 처음에는 묵살했지만 도가 지나쳐서 짜증이 난데다가, 그가 받은 방해어왜총병관 직책도 내버리고 싶었다. 송응창 경략(經略) 지휘를 받아서 기분이 내내 좋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은 문을 숭상하고 무를 아래로 두는 경향이 있어서 직업 무장 출신인 이여송이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문신 송응창 아래 벼슬에 머물렀다. 무장이 도독으로 승진하는 것도 어려우니 보바이 전투 승리로 도독 승진까지 했으니 무인으로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지만, 공적도 없는 송응창이 단지 문신이란 이유로 그의 밑에 깔리니 기분이 잡치는 것이었다. 거기다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출병하게 되었다.

“씨발놈들, 공은 무인이 세워서 나라를 굳건히 지키는데 권력은 지들이 독차지한단 말이야. 승패는 병가지상산데, 패전이라도 하면 당장 목을 치고, 내가 조선반도 진격사령관으로 가도 지면 목을 칠 것이 아닌가.”

거기다 의주 땅을 밟자마자 조선 왕은 물론 좌의정 윤두수, 도체찰사 유성룡, 병조판서 이항복, 예조판서 이덕형, 이조판서 이산보가 연일 어린애처럼 매달려 적을 무찔러달라고 간청한다. 술을 먹는데도 이런 주문이 따르니 술맛 달아나고, 결과적으로 비싼 술을 먹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복건성 출신의 낙상지라는 촌놈이 병서를 왼 품으로 고상한 체를 한다. 야전 경험이 많은 사령관 앞에서 주접떠는 게 영 마땅치 않았다. 그래도 분위기 모르고 또 낙상지가 말했다.

“군인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군인은 명예를 존중하고 투철한 충성심, 진정한 용기, 필승의 신념, 임전무퇴의 기상을 견지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는 것이오.”

“야, 이새끼야, 아가리 안닥칠 거야? 그런 것 다 교본에 있어. 조선 군대도 부대마다 써붙여 놓은 거야!”

이여송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키는 육척 장신에 기골이 장대한데다 조선족의 피를 받은 탓으로 잘 생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입이 험했다. 낙상지가 눈치 모르고 한마디 하려 하자 그가 가로막았다.

“너는 평생 훈련대장이나 해. 야, 임마, 이곳은 내 선조의 땅이야. 지금 한가하게 문자 써서 고상한 척 할 때가 아니야. 왜의 척후병들이 이 연회에도 깔려있다는 것 알라. 내일부터 당장 왜의 첩보사항을 챙겨와. 이것이 오늘 술먹는 값을 하는 고야. 그리고 말 먹이는 것 잊지마라. 말 먹이는 병졸만 하는 일이 아니라 군관이든 천총이든 구분하지 말라. 우리만 배불리 쳐먹으면 말도 먹어야 한다는 것 알란 말이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부리나케 백마를 타고 사라졌다. 기병 출신답게 그는 말을 몹시 아꼈다. 전투 승리는 말의 역할이 칠할이고, 군인의 검은 삼할로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 출병에서도 대기병집단을 몰고 왔다. 일본군은 보병 중심의 군대를 이끌고 조총으로 전투를 전개하지만, 이여송 군대는 기병을 주축으로 우마차에 포를 실어 적진에 포를 쏘는 통큰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기마병단을 이끌고 영하의 전투에서 보바이 반란군을 쓸어버렸다.

연회가 파장이 된 상태에서 낙상지가 정충신을 불러 물었다.

“적의 첩자들을 찾아낼 방도가 있겠나?”

“마침 왜의 간자들 세 놈을 체포해 영창에 집어넣었습니다.”

“잘 됐다. 그 자들을 움직여서 적정을 탐지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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