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61. 보부상 박승직과 두산그룹

남도에서 장사 밑천 모은 보부상 박승직, 두산을 세우다

해남에서 모은 300냥 종잣돈 삼아 10년 행상 부 축적

방방곡곡 활동무대 산골마을 다니며 베 사들인 뒤 도매

1896년 종로 4가에 박승직 상점 차리며 거상으로 도약

장남 두병에게 가업 잇게 한 뒤 두산(斗山) 이름 지어줘

광복 후 소화기린맥주 인수 OB맥주로 기업지명도 높여

한국 최장수 기업…두산은 글로벌 중공업기업으로 우뚝

박용만 회장, 조부 상인정신 간직하려 해남까지 뚜벅 걸음

대한상의, 남북정상회담 막후 비중 큰 대북경협 창구 역할

두산창업주 박승직 선생. 박승직은 개성상인과 병영상인의 투철한 상인정신을 익히고 실천했던 최고의 보부상이었다.
■남북경협의 숨은 주인공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대한상의 회장)

남북한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뜨겁게 포옹하며 파안대소하는 모습은 ‘한반도의 봄’을 실감케 한다. 남북정상은 2018년 4월부터 9월까지 세 차례나 만났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에 북핵문제 해결은 남북 두 정상의 의지와 뜻대로만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북핵문제 해결이 우선이냐, 아니면 각종 경제·문화 협력을 병행하면서 북핵문제를 풀어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미국은 북한이 완전하게 핵을 폐기해야 북한제재를 풀 수 있고, 남북한이 경제협력을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 폐기 일정을 더욱 순탄하게 하려면 일정 수준의 교류 강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정부는 이에 따라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을 비롯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문화·체육·예술 분야 교류 등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한국 정부의 뜻을 10월 EU방문 때 적극 피력했었다. 문 대통령은 대북제재 완화를 유럽 각국 정상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대북제재 지속 요구에 세계 각국의 대북제재 완화는 사실상 어려움이 크다. 그렇지만 개성공단·금강산 사업재개로 상징되는 남북경협사업은 어떤 형태로든 재개돼야 할 필요성이 크다. 유엔안보리제재결의안 완화와 남북경제협력은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북한 경제협력은 한반도 평화시대를 여는 실천적 방안이다. 문 대통령의 지난 9월 방북 때 재계 인사들을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대거 동행토록 했다. 특별수행원 가운데 17명이 경제인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문 대통령을 따라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경제·산업 현황을 살펴보았다. 경제계 인사들은 이번 방북을 북한 진출을 위한 사전답사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경제계 인사들은 이번 방북 일정 동안 바쁘게 움직였다. 황해북도 조선인민군 122호 양묘장과 소학교와 평양교원대학을 방문했다. 또 대동강 수산물 시장을 둘러보며 평양시민의 일상을 헤아려 보았다. 문 대통령과 함께 북한이 자랑하는 집체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경제계 주요 인사들의 방북은 ‘북한과의 경협’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과 두려움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왼쪽)이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 환영 만찬에서 가수 조용필씨(우측)와 현송월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단장(가운데)과 함께 기념촬영한 모습.(박용만 회장 페이스북)
그런데 남북경협의 구심점으로 17만 회원사를 갖고 있는 대한상의가 작용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4월 1차 남북정상회담 때 재계 인사로는 유일하게 판문점 행사에 초대됐다. 9월 평양정상회담을 앞두고는 윤종원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경제사절단 구성 문제를 놓고 긴밀하게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상의가 대북경협의 창구가 되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전경련과의 거리두기’와 관련이 있다. 전경련에 가입돼 있는 대그룹 총수 상당수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있다. 이재용 삼성부회장 등 상당수 총수들이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해 유죄판결을 받은 상태에서 문재인 정부가 전경련과 밀접한 관계가 돼 남북경협을 논의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한상의는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국제상업회의소(ICC)를 매개로 해서 북한 조선상업회의소와 남북경협을 논의했던 경험이 있다. 대한상의는 UN의 대북 제재가 완화될 경우, ICC를 통해 국내 중소·대기업들의 북한 진출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남북경협은 대한상의를 중심으로 해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개성공단의 경우에서처럼 소규모의 남북경협은 중소기업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박용만 회장이 이끌고 있는 두산그룹이 아주 오래전 전남 해남을 비롯 강진, 영암 등 전라도 산간오지 지역 사람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행상 박승직, 종로에 상점을 차리다

두산(斗山)의 창업주는 매헌(梅軒) 박승직(朴昇稷)으로 박용만 회장의 할아버지다. 박승직은 1864년 음력 6월 22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탄벌리에서 빈농인 박문회(朴文會)의 셋째 아들(5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박문회는 임의실(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에서 여흥 민씨의 논 15마지기를 소작하고 있었다. 민영완(閔泳完)은 총명하고 부지런한 소작인의 아들 박승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권용정이 그린 부상.(간송미술관소장)
민영완은 1881년 전남 해남의 신관 사또로 부임하게 된다. 그때 민영완은 17살의 박승직을 책실(방자:사또의 개인 비서)로 데려갔다. 박승직이 해남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민영완의 밑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아니면 민영완을 떠나 다른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박승직은 관가에서 방자로 있으면서, 혹은 따로 독립해서 장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박승직이 1920년 자신이 쓴 글에서 ‘해남에서 엽전 300냥을 모아 맏형(승완)에게 보냈고 맏형은 그 돈으로 포목장사를 시작했는데, 3년 후 내가 와서 본즉 그 돈이 물건에 잡혔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박승직이 책실과 같은 일을 하면서 300냥이라는 큰돈을 만들 수는 없었다. 민영완을 따라 오기 전 몸에 배어있었던 장사꾼 기질을 발휘해 돈을 모았음이 분명하다.

조선시대 부보상
당시 해남에는 관두량이, 강진에는 마량항이 제주도로 오가는 배의 출입구였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실려와 팔리는 특산품 중 인기가 높았던 것은 말총을 꼬아 만든 갓이었다. 박승직이 갓을 대량 구매해 중간상인들에게 넘겼을 가능성이 높다. 또 한편으로 박승직은 해남을 기반으로 해 나주, 무안, 영암, 강진 등지를 돌아다니며 싼값에 포목을 매입해 비싼 값에 넘기고, 개화상품(성냥이라 구리무)을 싸게 받아 이윤을 붙여 파는 등 행상을 통해 돈을 벌었다.

짐을 지고 가는 부보상
박승직은 해남에 내려온 지 3년 만인 1883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여 농사를 짓다가 본격적으로 행상으로 나선다. 박승직은 농사일을 해서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금 100냥으로 발품을 팔아 포목행상에 나섰다. 박승직은 산골 아낙네들이 짠 베를 싼값(1필에 10전)에 산 뒤 이를 서울로 가져가 20전에 팔았다. 두 배의 이윤이 남는 행상이었다. 박승직은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는 물론 멀리 함경도까지 행상을 나갔다.

박승직의 꿈은 한양에 가게를 내는 것이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산골 외진 곳을 찾아가야 조금 헐값에 베를 살 수 있었기에 그는 해남이나 강진 옴천, 경상도 의성이나 의홍, 강원도 정선·원통과 같은 찾아가기 어려운 곳을 주로 다녔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이 그의 활동무대였다. 그의 (환포)행상은 10년 넘도록 이어졌다. 부지런한 천성과 타고난 장사 수완으로 상당한 돈을 모았다.

구한말 부산의 옹기장수 행렬
박승직은 1896년 여름, 그토록 꿈꿔왔던 ‘박승직 상점’(朴承稷商店)을 한양 종로 4가 15번지(배오개)에 열었다. 그의 나이 33세 되던 해였다. 박승직이 한양에 입성한 것은 청계천 일대에서 무쇠솥(鐵鼎) 장사를 했던 맏형 박승완(朴承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승완은 장사가 잘되지 않아 잠시 쉬고 있었는데 박승직은 1889년에 종로 4가에 집 두 채를 마련해 앞채에는 박승완이 살도록 했고 뒤채는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박승직 상점이 초기에 취급했던 상품은 포목이었다. 서울에 상점을 연 박승직은 10여 년 동안 전라도 해남과 영암, 나주, 무안, 강진 등지를 돌며 무명을 수집했다. 그리고 서울로 가져와 팔았다. 그가 행상을 하면서 친분을 쌓아두었던 전국 각지의 포목상들이 그의 주요 거래처였다. 물량이 커지자 그는 많은 사람들을 풀어 산간오지 마을의 베를 사들였고 이를 도매로 풀었다.

거래처가 커지자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평강 등지에 지점을 두고 판매망을 확충해 나갔다. 1910년대 후반부터는 장춘 하얼빈 등 만주 지방으로까지 진출했다. 박승직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무렵에 동대문시장의 거상(巨商)으로 자리 잡았다. 1905년 7월에는 동대문시장의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광장주식회사(廣藏株式會社)를 설립했다. 광장주식회사에는 종로 및 동대문 일대의 포목상들이 참여했는데 자본금이 7만8천원(圓)에 달했다. 이 회사에 박승직은 대주주로 참여했다.

종로 4가에 문을 열었던 박승직 상점
박승직 상점에서 취급하는 품목도 차츰 많아졌다. 포목 외에도 쌀보리와 소금, 저울, 면화 등을 취급했다. 주요 생필품은 거의 모두 판매했다. 박승직은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면서 기독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기독교 신자가 됐다. 그의 타고난 성실함과 근면함은 신앙적 양심과 결합됐다. 박승직은 더욱 신용이 높은 사람이 됐다. 누구나 박승직을 신뢰했으며 이 신뢰는 박승직상점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었다.

박승직은 한양의 거상이 됐다. 거상 박승직의 위치를 헤아려볼 수 있는 것은 1919년의 고종의 장례와 1926년 순종의 장례 때 박승직이 상민봉도단장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봉도단은 임금의 상여를 매는 조직으로 왕가봉도단, 상민(常民)봉도단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박승직은 임금장례에 두 차례나 상민 대표로 선발됐다. 박승직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승직 상점
■박승직 상점에서 내놓은 화장품 박가분(朴家粉)

박승직 상점은 1916년에 박가분제조본포(朴家粉製造本鋪)를 열고 박가분(朴家粉)이라는 화장품을 내놓았다. 지금으로 치면 ‘화장품 자체브랜드’였다. 박가분은 ‘대박’이 났다. 박가분을 써본 여성들은 앞다퉈 이를 다시 샀다. 얼굴이 고와지면서 화장도 잘 먹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이다. 박승점 상점은 단숨에 국내 화장품 업계의 최고 자리에 올랐다. 박가분의 인기는 박승점 상점의 주력 판매 상품인 포목의 매출에도 좋은 영향을 끼쳤다.

박가분 광고
박가분은 박승직의 아내 정정숙의 작품이었다. 박가분은 정정숙이 집안에서 소량 제조해 주요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건네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박가분이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생산해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박가분이 인기를 얻으면서 이 화장품은 박승직상점의 유통망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1920년에는 연지동으로 생산시설을 옮겼는데 당시 박가분 제조에 종사하는 여공만 30여명에 달했다.

박가분
박승직의 장남 연강(蓮崗) 박두병(朴斗秉)의 회고록에는 박가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박가분이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판매고가 한 창 올라갔을 때는 1926년부터 1930년 사이였다. 분 1갑 출고가격이 42전5푼이었으며 소매로는 50전씩 팔았다. 1상자를 분 20갑씩 단위로 포장했고 1궤짝에 50상자를 담았다. 이 기간에는 보통 평균 10궤짝씩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1상자 가격은 8원50전, 1궤짝의 가격은 425원이었으니 평균 10궤짝씩 나갔다 하면 4250원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낸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 일본산 고급 화장품이 조선에 유입되면서 박가분의 인기가 크게 줄었다. 일본 화장품에 밀린 것이다. 박승직은 일본 화장품 업체에 근무한 적이 있는 제조기술자를 초빙해 제품의 질을 높이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소비자들의 마음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할 수 없이 박승직은 1937년에 박가분 제조 본포를 닫고 박가분 생산을 중단했다.

박가분
■소화기린맥주(OB맥주)와 박두병

조선을 강점한 일본의 전쟁수행으로 조선경제는 나날이 힘들어졌다. 조선총독부는 물자를 통제하는 한편 긴축재정을 단행했다. 불황이 조선 상인들을 덮쳤다. 박승직은 경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산을 정리했다. 그리고 기업 공개를 단행했다. 1925년 박승직상점은 자본금 6만원(현재의 72여 억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됐다. 박승직은 1주당 50원(현재의 600 여만 원)으로 총 1,2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다행스럽게도 주식회사 박승직상점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즈음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이 은행원 생활을 그만두고 가업에 종사하게 된다. 박두병은 박승직의 4남 6녀 중 장남으로 1910년 10월 9일에 서울 종로 4가 92번지에서 태어났다. 심상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거쳐 1929년에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사업장이 커지자 가업을 잇기 위해 박승직상점을 운영하게 된다.

박승직과 박두병은 1930년대 초반 기린맥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삿포로’(札幌), ‘기린’, ‘사꾸라’(櫻)등 일본산 맥주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일본산 맥주 소비량이 늘어나자 일본 맥주회사들은 조선 내에서의 맥주생산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물이 좋고 땅값과 인건비도 싸서 맥주생산 공장을 세우기에는 매우 적합했다. 일본 기린맥주는 1933년 자회사인 소화기린맥주를 설립했다.

소화기린맥주의 자본금은 300만 원(圓)이었다. 1주당 50원씩 총 6만주를 발행했는데 기린맥주가 5만7천주, 박승직과 김연수(삼양사그룹 창업자)가 각각 200주씩을 보유했다. 소화기린맥주는 1934년 4월 13일부터 시제품을 생산, 4월 20일부터 ‘기린비루’를 공급했다. 본사와 생산공장은 영등포에, 영업소는 남대문 통에 두고 맥주 생산과 유통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박두병은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 권을 갖고 있었다. 박두병은 동생 우병(玗秉)에게 소화기린맥주 대리점 경영을 맡겼다. 맥주사업 시작 후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맥주는 배급제로 공급됐다. 맥주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런데 1945년 광복이 됐다. 박승직은 상점을 닫고 사태추이를 관망했다. 그러데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의 자치위원회 사람들이 박승직을 찾아와 맥주회사를 인수해 운영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런 전후사정이 박승직이 소화기린맥주를 운영하게 된 배경이다. 이후 두산그룹의 2대 회장인 연강 박두병은 삼양사의 창업주인 수당 김연수로부터 기린맥주의 국내 판매업체인 소화기린맥주의 지분을 인수받아 본격적으로 주류 생산에 뛰어들었다. 박두병은 나중에 소화기린맥주 이름을 바꿨다. 그 유명한 OB맥주(동양맥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글로벌 기업 두산 중공업

박승직은 73세 되던 1936년에 후계자인 장남 박두병을 박승직상점의 상무로 취임시켰다. 그리고 ‘두산’(斗山)‘이라는 새로운 상호를 지어줬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생각하게 하는 상호였다. 두산은 ‘한 말 한 말 쉬지 않고 쌓아올리면 태산같이 커진다’는 뜻이 담긴 상호였다. 박승직 상점이 자신이 내디뎠던 한 걸음의 발품에서 비롯됐음을 후손들이 명심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박승직은 1950년 경기도 광주의 향리에서 8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박승직은 행상으로 사업밑천을 모은 뒤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부를 일군 인물이다. 박승점 상점은 OB맥주로 변신해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두산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술소재사업과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 등 경공업회사가 모인 그룹이었다. 병뚜껑을 만드는 삼화왕관, 코카콜라를 유통하던 두산음료, OB맥주 같은 소비재 기업이 주력 기업이었다.

두산은 1982년에 프로야구단인 OB 베어스를 창단했다. OB 베어스는 지금 두산 베어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외환위기에 앞서 두산은 선제적으로 기업체질을 변화시켰다. 소비재에서 생산업체로 탈바꿈을 시작했다. IMF 전에 그룹을 이끌던 박용성 前 회장은 돈이 되는 해외 프랜차이즈 식당 기업들과 ‘종갓집 김치’등을 모두 팔아넘겼다. 외환위기 전이라 모두 비싼 값에 팔렸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한 박용성 전 회장은 2001년 한국중공업을 인수해 중공업 그룹으로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했다. 두산은 해외에서도 많은 중공업설비관련 회사들을 인수해 글로벌 경영체제를 갖추었다. 두산은 세계를 상대로 각종 선박·항공엔진과 대형 첨단기계들을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현재 두산은 맥주회사의 영역을 벗어나 세계적인 중공업회사로 자리 잡고 있다. 두산은 2008년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기도 했다. 인재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최장수 기업 두산과 위대했던 보부상 박승직

두산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이 1896년 8월 문을 연 박승직 상점을 시초로 하고 있으니 122년이나 된 기업이다. 국내 최장수 기업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박승점 상점보다 1년 뒤인 1897년에 설립된 동화약품을 최장수 기업으로 뽑기도 한다. 동화약품은 한 상호와 한 상품으로 계속돼 왔으나 두산은 박승점 상점이 업종변경을 거쳐 이어왔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력상품과 체질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한 상품과 상호를 고집했다고 해서 동화약품을 한국의 최장수기업으로 꼽는 것은 좀 편협하다는 생각이다. 이 글은 두산을 홍보하거나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전남의 역사 속에, 더 나아가 우리 역사 속에 담겨 있는 행상의 악착같은 생존력과 개척정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박승직을 재조명했을 뿐이다.

박승직은 맨손과 맨발로 부를 이룬 인물이다. 그 후손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부국강병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세계를 상대로 중공업강국이자 무역한국의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 시작이 박승직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천부적인 상인기질과 근면함으로 해남에서 종잣돈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업자금을 모았다.

장돌뱅이(화개장터. 조현대 블로그 캡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정신 중의 하나가 보부상 정신이다. 한 푼의 이익을 위해서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갔던 투철한 상인정신. 그리고 성실과 신용을 밑천으로 삼아 장사를 했던 정직함을 지켜야 한다. 박승직은 개성상인과 병영상인의 투철한 상인정신을 익히고 실천했던 최고의 보부상이었다 생각된다.

박승직은 위대했던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은 ‘보상’과 ‘부상’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보자기나 걸망에 짐을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장수를, 부상은 등이나 지게에 비교적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등짐장수를 일컫는다. 조선말과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보부상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보부상 박승직의 자취는 길이 남아있다.

박승직은 전라도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박용만 회장은 얼마 전 매주 주말이면 임원들과 함께 해남의 땅끝 마을을 향해 4㎞씩 걸었다. 할아버지이자 창업주인 박승직 선생의 정신을 잊지 않고자 하는 행군이었다. 아마도 박용만 회장은 해남까지의 길을 걸으면서 무거운 등짐을 지느라 흘러내리던 조부의 땀과 그 먼 길을 걸었던 조부의 부르튼 발을 생각했을 것이다.

창업주의 정신과 인내를 마음에 새기면서 사는 재벌 2세들이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보부상 박승직이 걸었던 그 길을, 기업인 후손들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해남과 강진의 길 위에서 또 한명의 존경할만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비록 전라도가 박승직의 탯자리는 아니지만, 상인 박승직을 태어나게 한 곳이니 그 또한 의미가 크다. 어쩌면 박승직이야말로 진정한 병영상인 중 한명 인지도 모른다.


도움말/김성수, 한국경영사학회, 김종호


사진제공/조현대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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