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62. 왕건과 서남해 패권을 다툰, 압해도 능창(수달)

서해바다를 호령했던 압해도의 바다사나이 능창

궁예 위협했던 바다의 강자였으나 왕건에 잡혀 처형당해

고려가 간직했던 호쾌하고 담대했던 해양세력의 한 줄기

능창이라는 인물 통해 남도인 해양정신과 기상 되살려야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원장 ‘능창 재조명과 알리기’에 앞장

전남 신안군 압해면 본섬 전경. 왕건과 서남해 패권을 다투던 능창이 본거지로 삼았던 섬이다.
■압해도의 걸출했던 인물 능창

먼 옛날 전남 신안 압해도에는 ‘걸출한 인물’ 한 명이 있었다. 통일신라가 무너져 후삼국이 쟁탈을 벌이고 있었을 때다. 그 걸출한 인물은 능창(能昌)이라는 자다. 능창은 수전(水戰)에 능하다 하여 수달(水獺)이라고도 불렸다. 능창은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를 기반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 장군이 암살된 후 그 공백기에 세력을 일으켜 세운 지방호족이었다.

능창은 압해도 일대 섬을 장악하고 위세를 자랑했다. 능창이 거느린 군사들은 수전에 능하고 매우 용맹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건조차도 맞서 싸우기를 꺼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능창은 왕건의 기습작전 와중에 사로잡혀 궁예가 있는 철원으로 보내져 참수 당한다. 장보고 이후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호령했던 장수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최후였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왕건에 맞서 싸웠던 걸출한 인물 능창은 ‘해적의 두목’정도로 전락한 상태다. 왕건은 용이 되고 능창은 ‘헤엄 잘 치는 수달’ 정도로만 위상이 낮춰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능창은 왕건의 지략을 드러내는 조연에 불과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심지어 대부분은 능창이라는 인물,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

수달장군 능창 기념비 제막식 (2017.12.21)
그러나 능창은 바다를 개척하며 힘과 용기를 키웠던 한반도 서남해안 사람들의 기상과 용맹을 상징하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옛적부터 서남해안 사람들은 배를 잘 다루고 물길을 잘 알았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을 자유자재로 누비고 다녔다. 또 군사력을 키워 약탈을 일삼는 왜구와 맞서 싸웠다. 지략과 용맹함을 겸비했던, 자랑스러운 바다사나이들이었다.

그 용맹한 바다사나이들의 표상이 바로 능창이다. 능창으로 표현되는 서남해안 바다사나이들의 기상을 되살릴 필요가 크다. 능창이라는 인물과 그 활동상에 대한 조명이 절실한 이유다. 능창은 비록 불의의 기습을 받아 적군에 사로잡힌 뒤 처형당한 패장이었지만 서남해안 해양사에 있어서는 장보고 장군의 뒤를 이어 서남해안의 패권을 장악했던 걸출한 장수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바다사나이 능창

압해면 송공산성 입구에 있는 수달장군 능창 기념비
최근 들어 능창은 신안군민들에 의해 부활됐다. 2017년 신안군은 압해읍 송공산 입구에 ‘수달장군 능창 기념비’를 세웠다. 능창을 기리는 기념비는 높이 6m, 가로 3m의 자연석으로 제작됐다. 왜구들의 침략에 맞서 섬(지금의 신안지역 일대)을 지켜 주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고, 강성했던 왕건 군사에 맞설 정도로 힘을 키웠던 주인공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 존경은 바다를 무대로 해 힘을 키워갔던 조상들에 대한 외경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사이 육지가 주 무대가 돼 버렸다. 그러나 먼 고대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주 무대는 바다였다. 바다를 장악했던 세력이 한반도의 주인공이었다. 비록 능창은 왕건에 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우리가 기려야 할 용맹한 바다사나이였다.

그동안 여러 역사학자들이 능창이라는 인물을 주목했다. 특히 목포대 도서문화원(島嶼文化硏究院) 원장인 강봉룡 교수는 고려건국 초기에 활약했던 능창을 21세기로 이끌어낸 학자이다. 강봉룡 원장은 오래전부터 능창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현지답사를 통해 ‘수달장군 능창’을 걸출한 용장(勇將)으로, 압해도와 고이도를 해상세력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기념학술회의와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원(島嶼文化硏究院) 원장

강봉룡 원장의 계속되는 능창 조명과 기념사업 필요성 제기에 따라 신안군과 주민들은 능창기념비를 세우게 됐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업도 서두르게 됐다. 이런 와중에 강 원장을 비롯한 한국중세사학회 소속 교수들, 연구소, 박물관, 해군사관학교 교수 등 50여명의 학계 전문가들은 2018년 10월 12일 목포대학교 캠퍼스에서 세미나를 갖고 능창을 역사무대로 올려 그에 대한 평가 작업을 벌였다.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가 지난달 12일부터 13일까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원에서 이틀 동안 열렸다. 학술회의에서는 전남이 품고 있는 고려의 해양정신과 유산을 발굴·정리해 문화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학술회의에 참석한 한국중세사학회 회원들
목포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린 학술회의는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을 기념하는 학술회의였다. 10월 12일부터 이틀 동안 계속된 학술대회는 전남지역, 특히 전남의 바닷가 곳곳에 담겨있는 격동의 고려사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고려시대 전남지역 해양사의 위상과 의의를 학술적으로 정리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을 비롯 ‘장보고의 해양유산’과 등 6개 분야 주제발표와 함께 토론, 현장답사가 이어졌다. 이번 학술대회는 고려가 포용하고 있었던 진취적인 해양개척정신의 한줄기를 전남 해안 일대 해양세력에서 찾아보고 이를 남도정신의 하나로 삼으려는 취지에서 이뤄졌다.

능창은 그런 취지에 매우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학술회에서는 비록 왕건에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신안 압해도를 중심으로 해 커다란 해양세력을 이루었던 능창에 대한 재조명과 역사자원화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능창은 자랑스러운 남도 바다사나이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마땅하다. 바다를 호령했던 장보고와 이순신 장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바다영웅으로 평가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강봉룡 도서문화연구원 원장
능창이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건국 이전의 후삼국 정치상황과 장보고 장군 이후의 서남해안 일대 세력판도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앞서 밝힌 대로 강봉룡원장은 수달장군 능창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내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학자이다. 강원장이 지난 2004년 <신안문화14권>에 게재한 <수달장군 능창의 섬 압해도와 고이도 : 우리 해양사를 빛낸 명소>라는 글이야말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가장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이에 강원장의 글과 2018년 10월 12일 한국중세학회 학술세미나에서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발표했던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에 대한 주제논문을 독자들에게 소개할까 한다. 두 학자의 글을 그대로 읽는 것이 능창에 대한 이해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지면관계상 강원장의 글은 전제하고, 김명진 교수의 소논문은 맺음말만 싣는다.

능창의 해양세력권
■강봉룡교수의 수달장군 능창의 섬 압해도와 고이도 <신안문화 14, 2004 중 발췌>

1. 문제제기

완도가 장보고의 섬이고 진도가 삼별초의 섬이라면 압해도는 수달장군 능창의 섬이다. 해양활동이 왕성했던 고려시대까지는 섬은 해로의 징검다리로서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고, 유력한 해상세력의 근거지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해양활동이 금지되면서 섬은 크게 쇠퇴하고 말았지만, 고려시대까지 빛났던 해양사와 해양문화의 흔적들이 섬의 도처에 남아있다. 이들의 흔적이야말로 신해양의 시대를 맞은 이 시점에 다시 부각시켜야 할 최고의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압해도는 우리 해양사의 최고 명소 중의 하나로 손꼽힐만하다. 압해도의 해양사와 해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아무리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압해도와 고이도의 해양사적 의미를 몇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서 제시하고, 그 활용방안까지 제안해 보기로 하겠다.

2. 압해도 및 고이도와 해양사

1) 압해도와 해양사

(1) ‘압해(押海 혹은 壓海)’의 의미와 군현(郡縣)의 치소(治所)

압해도의 ‘압해’란 명칭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백제시대의 아차산현(阿次山縣) 통일신사시대에 아차산군(阿次山郡)으로 승격되었고, 경덕왕 대에 압해군으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압해’란 ‘바다를 제압 한다’는 의미로서, ‘바다를 청소 한다’는 의미의 ‘청해(淸海)’와 ‘바다를 진호 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와 같은 의미이다. ‘청해’는 9세기에 동아시아 해상을 제패한 장보고가 그의 근거지였던 완도를 스스로 칭한 바였고, ‘진해’는 16세기 말에 침략세력인 일본 수군을 격퇴한 이순신이 머물렀던 여수의 좌수영을 ‘진해루(鎭海樓)’라 칭했던 사례로 저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압해도는 장보고의 ‘청해’ 및 이순신의 ‘진해’와 유비(類比)되는 한국 해양사의 대표 명소라 할만하다.

이런 압해도는 옛 군현의 치소였다. 백제시대에 아차산현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아차산군으로 승격되었으며, 경덕왕 대에 압해군으로 개칭되어 고려시대까지 서남해 도서지역의 행정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백제시대 아차산현의 현치는 오늘날 압해도 대천리 일대로 비정되고, 통일신라 이후 아차산군(압해군)의 군치는 신룡현 고읍촌 일대로 비정된다.

(2) ‘포스트장보고’를 꿈꾸던 해상세력 능창(能昌)의 거점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 수달장군 능창에 관한 기사는 다음 기사가 유일하긴 하나, 크게 주목할만한 기사이다.

드디어 광주 서남계(西南界)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의 경계에 놓았더니 압해현(壓海縣)의 적수(賊帥) 능창(能昌)이 해도(海島) 출신으로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들과 결탁하여 태조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를 맞아 해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적도가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만약에 힘을 아우르고 세력을 합하여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 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갈초도의 나룻가에 나아가 왕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라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이 말을 따랐다. 과연 조그마한 배 한 채를 잡아보니 바로 능창이었다. 궁예에게 잡아 보내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목베었다.?(<高麗史> 卷1 太祖世家1 즉위전 기사)

위 기록은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생포되어 제거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이다. 능창이 왕건과 대립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능창을 견훤의 부하로 보려는 견해도 있으나 능창은 견훤과도 대립한 압해도의 독자적인 해양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왕건이 능창에 대해서 정면승부를 하면 “승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고, 궁예가 “海賊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라고 과장된 언사로 호언한 것으로 보아 그의 위세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능창을 ‘적수(賊首)’ 혹은 ‘해적의 우두머리’라 표현하고 있고, 또한 ‘수전(水戰)을 잘하여 수달(水獺)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갈초도(葛草島)의 소적(小賊)들과 결탁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능창은 서남해 도서해양세력을 결집하여 강력한 해양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능창은,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841년에 암살당한 후 반세기만에 장보고를 대신하여 서남해지역의 해양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왕건 및 견훤 등과 쟁패를 벌인 유력한 독자적 해상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고려 말 몽고군 함대를 퇴치한 압해도인의 해상 투혼

막강 군단을 자랑하는 몽고군이 1231년 이후 고려를 집요하게 공격하였으나 강화도의 고려정부는 20년 넘게 버텨내고 있었으니, 그 힘의 원천은 바닷길을 사수한 고려의 해양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몽고가 이를 눈치 채고서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 서남해 해로의 요충지인 압해도 공략에 나섰다. 1256년 당시 몽고의 총사령관 차라대(車羅大)는 전함 70여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동원하여 압해도에 대한 공격에 나섰던 것이다. 다음 기사에 나타나듯이 압해도의 대몽고 항쟁은 매우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낭장 윤춘(尹椿)이 몽고군으로부터 돌아와서 … 말하였다. “…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주사(舟師) 70척을 거느려 성하게 기치를 늘어세우고 압해를 치려하여 저와 관인을 시켜 다른 배를 타고 싸움을 독려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은 대포 두 개를 큰 배에 장치하고 기다리니, 두 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차라대가 언덕에 임하여 바라보고 저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고 하고, 다시 배를 옮기어 치게 하였습니다. 압해 사람들이 곳곳에 대포를 비치하였기 때문에 몽고 사람들이 물에서 공격하는 모든 준비를 격파하였습니다.”(<高麗史節要> 卷之17 高宗安孝大王4 高宗 43年 6月條)

이 기사는 몽고의 장수 차라대가 주사 70척이라는 대규모의 함대를 조직하여 압해도를 치려했지만 압해도민의 치열한 항쟁에 직면하여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몽고에 투항했다가 돌아온 윤춘이 증언한 것이다. 차라대가 이처럼 대규모의 병력으로 압해도를 공격하려 했던 것은 그만큼 압해도가 서남해 도서지역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압해도민들은 큰 배에 대포 2대를 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 곳곳에도 대포를 비치하여 몽고의 압해도 공격을 결국 포기하게 만들었다고 하니 방어 장비가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강화도 최씨 정권의 각별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당시 압해도의 군세(郡勢)가 막강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2) 고이도(古耳島)와 해양사

(1) 고이도(高移島) : 엔닌(圓仁)의 바닷길 = 장보고의 바닷길의 거점

9세기 일본 천태종의 대성자(大成者)였던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835년에서 847년까지 12년 동안 중국 유학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귀국선은 장영(張永) 등 재당신라인들이 마련해주었다. 엔닌이 탄 배는 한반도 서남해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즉 엔닌 일행은 847년 9월 2일 정오에 산동반도의 적산(赤山) 막야구(莫耶口)를 떠난 이후 2일 만인 9월 4일 새벽에 충청도 서해에 이르고,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그날 오후에 고이도(高移島)에 이르렀으며, 다시 9월 6일에는 구초도(丘草島, 진도 거차도로 추정됨)에 이르렀다. 그리고 동행(東行)하여 9월 8일 오전에 안도(雁島, 여수 남쪽의 안도로 추정됨)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동남행(東南行)하여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규슈에 도착했다.

엔닌 일행이 택한 이 항로는 그 이전에 장보고 선단이 즐겨 다니던 항로이자, 당시 동아시아 무역선이 줄을 이어 다니던 주요 항로였다. 여기에서 고이도가 바닷길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이도(皐夷島) :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의 거점

<고려사>에 의거하여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 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912년에 서남해 원정에 나선 왕건은 서남해지방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점령하고, 이어서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皐夷島)를 위복(威服)시켰다. 이로써 왕건은 영산강구로 진입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되었다.

왕건과 견훤군사가 혈전을 벌인 곳으로 알려진 파군교에서 답사를 하고 있는 한국중세학회 회원들
이에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왕건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후백제군 500여급을 목베는 완승을 거두었다. 견훤은 작은 배에 갈아타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 <고려사>에서는 이 해전에 대해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였다. 이로써 고이도는 영산강구로 통하는 해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능창의 세력중심지였던 압해도 송공산성 전경(남서-북동)
3. 압해도 해양 역사문화자원의 활용방안

1) 압해도 역사문화자원의 연계성을 주목하자 : 고읍촌 군치-흙성안 토성-송공산성

압해도 번영의 비결은 해로의 요충지라는 점과 군치(郡治)의 연계망이 치밀하게 갖추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군치(고읍촌)와 토성(흙성안)과 산성(송공산성)으로 이어지는 연계망의 초점은 당시 바닷길의 감시와 관리에 맞추어져 있었다. 바닷길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적절히 활용한 압해도는 서남해 도서지역의 행정 중심지이자 국제 교역의 주요 거점의 하나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군치의 자리로 비정되는 고읍촌 일대에서 수습되는 유물들의 수준으로써 압해도 번영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 압해군으로서 번영을 구가한 군 치소를 조사하고 정비하는 일은, 압해도 시대를 준비하는 신안군의 미래 비전을 모색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안임에 분명하다. 고읍촌의 군치와 흙성 안 토성과 송공산성으로 이어지는 옛 압해군의 연계망을 복원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이 일대에 대한 고고학적 지표조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단순한 지표조사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압해도 역사문화자원의 연계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종합적인 문화컨설팅이 절실히 필요하다.

송공산성 전경(직상방)
2) 해양 역사문화와 해양 자연경관을 만나게 해주자 : 송공산

압해도의 해양사적 영광과 옛 압해군 시대의 번영을 집중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송공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송공산에는 군치와 연계되는 산성이 있어, 바닷길을 감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500년 전에 중국으로부터 송씨 성을 가진 장수가 난파당하여 송공리에 들어와 살면서 송공리 앞 바다에 있는 역도란 섬에서 말을 기르며 송공산과 매화도의 산을 말을 타고 날아다녔다는 설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또한 송공산에 올라 동쪽 방향을 바라보면 흙성 안 토성과 고읍촌 군치(郡治)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송공산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매화도-당사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장산도>로 에워싸인 신안군 다도해의 절경과 환상적인 해넘이를 감상할 수 있다. 이는 해양 역사문화와 해양 자연경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흔치 않은 명소라 할 수 있다.

송공산에서 자연스럽게 압해도의 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송공산성-흙성안-고읍촌>으로 이어지는 옛 군치(郡治)의 역사문화 적 연계망을 답사하는 것은 물론 <매화도-당사도-암태도-팔금도-안좌도-장산도>로 에워싸인 송공산 서쪽 바다에서 해양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구상한다면, 압해도의 품격과 위상은 크게 떨칠 것이다.

3) 압해도의 해양 명소 만들기를 위한 강조점

압해도가 “수달장군 능창의 섬”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능창을 중심으로 압해도의 강력한 해양 이미지를 창출할 것을 특히 강조하여 제안하고자 한다.

김명진 경북대교수
고려건국과 해양세력 학술회의 안내문
■김명진 교수의 학술회의 주제발표 논문 중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에서 부분 발췌

Ⅴ. 맺음말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은 즉위 이전부터 도서지역 공략을 중시하였는데 그 대표적 상대가 압해도와 그 해상세력인 능창(能昌)이었다. 신라 중앙정부가 제 역할을 못함에 지역세력(호족)들이 도처에 자리 잡았다. 지역 세력들이 난립함에 있어서 그 싹을 김헌창과 장보고가 제공한 측면이 있었다.

822년부터 발발한 김헌창과 그 아들 김범문의 난은 신라를 전체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결국 김헌창의 거사는 그가 목숨을 끊으면서 막을 내렸다. 김범문 역시 실패하며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828년에 장보고가 신라 흥덕왕의 재가를 받아 청해진(완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해적 소탕 및 해상교역을 통한 이익 등 그 순기능이 많았다. 하지만 841년에 장보고가 암살됨으로써 청해진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헌창과 장보고는 지역 세력이 뿌리 내릴 수 있는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김헌창은 육지에서, 장보고는 섬과 연안에서 지역민도 할 수 있다는 싹을 뿌리었다. 하지만 아직 신라가 멸망기로 접어들지는 않았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진성여왕 대부터였다. 889년(진성여왕 3)에 사벌주(경북 상주)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전국이 대분열되었다. 서남해(현 전라남도 일대)도 예외는 없었다.

서남해에서 고려 통일전쟁 기에 지역 세력이자 해상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및 가문은 다음과 같다. 여수현이 포함된 승주(전남 순천) 박영규(朴英規)와 김총(金摠), 영암(전남 영암) 최지몽(崔知夢) 가문, 나주(錦城郡금성군, 금산군, 전남 나주) 나총례와 장화왕후 오씨 가문, 그리고 압해도 능창 등이 이 지역 출신 주요 해상세력들이었다. 그 밖에 여러 섬에는 알려지지 않은 해상세력 및 작은 우두머리(속칭 소적小賊) 등도 있었다. 다만 김총은 지역세력 여부가 모호한 측면이 있다.

왕건과 능창은 해상세력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서로 통하지는 않았다. 왕건의 선대 중에서 호경과 강충은 원래 내륙에서 생활하며 어느 정도 부를 갖춘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보육의 대에 와서 해상으로 그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보육의 부인인 진의(辰義)의 자궁에서 부터 용(龍)을 가문에 연결시켰다. 이는 원래 평민 출신 집안이 점차 부를 갖추며 후대로 내려가면서 송악(개성)의 지역 세력이자 해상세력으로 뿌리내렸던 그 시작 과정이 설명된 것이다.

왕건 선대가 확실히 해상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때는 작제건 대부터였다. 이 가문의 제대로 된 용손 논리는 용건(왕륭)대부터 시작되어 왕건대에 완성되었다.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며 특이하게 나주 서남해를 바다 건너 공략한 것은 이러한 가문의 친 해상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다. 즉 왕건은 바다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었고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건이 나주 서남해를 공략함에 가장 강력한 견제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 이외에 독자세력인 압해도 능창이었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압해도는 서남해 뱃길은 물론이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으로도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한 군사적 거점 역할도 가능한 섬이 압해도였다. 이 같은 압해도에 당시 수전을 잘한다 하여 수달(水獺)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던 해상세력이 능창이었다. 왕건과 능창은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903년에 왕건은 금성군(나주)을 공략하였다. 이는 남의 경계(후백제)를 뛰어 넘어 영역을 확보한 것이다. 이러한 영역확보는 고려 월경지(越境地)의 시원이라 하겠다. 아무튼 금성군은 궁예의 영역이 되었다. 909년에 왕건은 염해현(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 후백제 견훤이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배를 노획하였다. 계속해서 그는 같은 해에 진도(전남 진도)와 고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도)를 점령하여 태봉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다음해인 910년에 견훤은 금성(나주 금성산성)에 포위집중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11년에 태봉의 궁예는 왕건을 금성으로 보내어 다시 주변 일부 군현들을 되찾은 후에 금성군을 나주라 하여 그 격을 높여 주었다. 이어서 912년에 덕진포전투(전남 영암)가 벌어졌다. 여기에서도 왕건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제 나주 서남해지역은 왕건의 활약으로 인하여 점점 태봉의 영역으로 공고화 되었다. 덕진포전투 결과가 왕건의 승리로 귀결되자, 견훤도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지만 압해도 능창은 점점 활동 반경이 좁혀지고 위축되었다.

KBS사극 태조 왕건에 등장했던 능창 수달(KBS화면캡쳐)
912년에 능창은 갈초도(葛草島, 葛草渡, 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창마을)에 있는 소적(小賊)과도 서로 연결하며 왕건을 해치려고 하였다. 수적으로 불리한 능창 입장에서는 바다의 싸움에 익숙한 자신의 특기를 살려 왕건을 처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첩보망을 늘여 놓은(종첩縱諜) 왕건의 술책에 능창은 자신의 이동로를 들키어 사로잡혔다. 그런데 왕건은 능창을 즉결처분할 수도 있었는데 굳이 태봉의 수도인 철원(강원도 철원)으로 올려 보냈다.

능창을 대면한 궁예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모욕을 주면서 살해하였다. 이를 통해 능창이 강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왕건의 즉위 전 기사 중에서 능창 포획 및 처형은 그 내용이 자세하고 분량도 많은 편에 속한다. 이러한 정황 등을 통해 나주 서남해에서 능창이 어떤 존재였는지 잘 이해된다. 이후 왕건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마침내 왕건은 918년 6월에 초심을 잃은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왕건이 즉위한 후에도 나주 서남해는 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왕건이 통일의 주인공이 됨에 나주 서남해가 큰 역할을 해주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과정 중에서 압해도 수달 능창을 제압한 것은 왕건에게 큰 사건이자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왕건은 용이 되어 통일의 완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능창은 이무기가 되어 역사의 패자로 기록되었다. 고려 통일전쟁 기에 나주 서남해에서 능창은 용이 아닌 수달로 만족해야 하였다.


도움말/강봉룡, 김명진


사진제공/신안군, 서대승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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