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207>

12장 지체와 문벌을 넘다

이항복이 콧김이 나올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가 말했다.

“그래, 틀리지 않았다면 말해 보거라.”

“왜는 본래 조선의 하인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제 속에서 하인국으로 자처했고, 우리더러 인정해달라고 조공을 바치고, 신분상승 승인을 간청까지 했습니다요.”

“그런데?”

“하지만 우리는 그자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자만심만 가졌나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뒤집어져버렸습니다.”

“왜 뒤집어졌다고 보는 것이냐?”

“그자들은 책하고는 거리가 먼 종(種)들이지요. 못생기고 안짱다리에 성질만 급하지요. 그래서 조선에 늘 열등감을 갖고, 예를 모르는 하인국으로 자처했지만 조선의 사대부는 그들을 무시할 뿐, 대비하거나 다스릴 줄 몰랐나이다. 안으로는 신분을 이용하여 백성을 천한 종으로 인식하고 거드름 피며 안주하고, 세력을 쪼개서는 이익을 독점하려고 피투성이 싸움을 벌입니다. 공맹을 주절주절 외면서도 타락했습니다. 이렇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사대부는 차차 왜놈들도 우습게 보게 되지요. 존경했는디 알고보니 별 것 아니네? 저렇게 갈갈이 찢겨진 것 보니 힘 없겠네? 하고 봐버린 것입니다요.”

“그래서?”

“사서삼경이 왜놈들의 일본도보다 앞선다고 하는데, 사서삼경은 무를 잘라내지 못하지만 칼은 단박에 두 토막 내버리잖습니까요. 그래서 한 방에 훅 가버린 것입니다요. 조정 신료들은 지금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나이다. 세상 흘러가는 맥락을 모른단 말입니다. 백성들 쪄눌러 고혈을 짜니 부와 세는 유지되고, 호령하는 신분이니 변화할 생각이 없지요. 고리타분한 수구기득권에 매몰돼 있다가 개피 본 것입니다요.”

“그것은 너의 평소 생각이냐?”

“네, 평소 제 생각이옵니다. 그런데 대감마님, 고니시 유키나가와 중국 사신 심유경이 조선반도를 두 토막내서 한수 이남은 왜가 가져가고, 한수 이북은 명이 차지한다는 화평회담을 알고 계십니까?”

“뭐라고? 너 그 말 어디서 들었느냐.”

이항복이 뒤로 자빠질 듯이 놀라며 물었다.

“왜것들이 조선반도를 지들 꼴리는대로 도륙하고 있사옵니다.”

“그 말 어디서 들었냐니까.”

“간자들을 조자서 얻어냈나이다. 이 자들에 의하면...”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성 외곽 깊숙한 밀회장소에서 조선반도를 양분해서 서로 나눠갖는 일방으로 명일(明日) 간에는 전쟁을 갖지 않기로 협약을 맺었다. 심유경은 황제의 재가를 받기 위해 지금 북경에 체류중이다. 그들은 이 밀약을 절대 비밀로 하기로 했다. 만약 그것이 드러나면 조선 백성들이 가민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시끄러워질 것이다.

조선은 전쟁에 지기는 했지만 굴복하지 않았고, 굴복할 생각도 없었다. 침락받지 않은 호남과 전라좌수영 수군에 의해 왜군의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보급선이 막히자 왜군이 맥을 못쓰고, 대신 조선이 점차 맥을 쓰더니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일원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절에서는 승병이 기병해 왜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백성들은 병신은 물론 여자들까지도 들고 일어나는지라 왜를 물리칠 세가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조정은 이제나저제나 명군이 오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만 전국 처처는 이렇게 백성들이 낫을 들고 쇠스랑, 도끼, 활, 죽창을 겨누고 왜병의 뒤를 쫓았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비롯한 일부 주력은 심유경을 조선에 보내 조선 백성들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과 서둘러 조약을 체결할 의향이었다. 몽고족과 후금의 침략 때문에 군원(軍援)을 보낼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코빼기만 비치고 체면을 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칫 조선 백성들로 인해 체면도 명분도 실리도 살리지 못할 수 있다. 화평회담으로 손을 빼면서 부모국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충신이 무릎을 고쳐 앉으며 말했다. 그동안 벌 받는 것처럼 무릎 꿇고 앉아있었으니 발이 저렸다.

“상황이 이런 디도 우리 조정은 사태파악을 모르고, 여전히 사대(事大)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스스로 나라 지킬 생각은 않고 외세에 기대고 있단 말입니다. 자주국방 말 못들어보셨나이까?”

“사대, 자주국방, 그리고 조선반도를 두 토막낸다...”

이항복이 속으로 뇌며 생각에 잠겼다. 새파란 청년장교의 생각보다 깊지 못한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나 역시도 기득권의 한 자락을 붙잡고 안일하게 살았던 것이 아닐까. 정충신이 엉뚱한 제의를 했다.

“제가 평양성을 한번 갔다 와얄랑갑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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