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63.문익점 선생과 남도 땅의 서원들

백성들의 등과 손발을 따습게 해준 문익점

원나라 사절갔다가 귀국 시 목화씨 들여와

추위 떨던 백성들 솜 대량생산에 두툼한 옷

보성 미력면에 부조묘, 남평·담양 등에 서원

문재인 대통령은 남평문씨(南平文氏) 48세손
 

문익점 선생영정

우리는 어렸을 적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서 붓 대롱에 목화씨를 숨겨와 심은 덕분에 목면 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고 배웠다.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나 위인전에 그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문익점 선생의 목화씨 반입과 보급’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문익점 선생(이하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까지 우리 조상들은 과연 어떻게 옷을 지어 입었을까? 그리고 붓 대롱에 숨겨서 들여올 정도라면 그전에 얼마든지 목화씨를 들여올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점 등이다.

그런 질문들이 절로 생겨난다. 그냥 곰곰이 따지지 않고 넘겼을 뿐이다.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전래와 재배·목면의 생산은 우리 조상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목화에서 생산되는 무명은 우선 일반 백성들도 싼 비용을 들이고도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게끔 했다. 포근한 솜을 이용해 이불도 가볍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솜은 심지로 만들어 호롱불을 밝히는데 사용됐다. 포탄의 심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솜은 생활 곳곳에서 매우 편리하게 사용됐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재배와 솜 생산은 고려 중기 이후 우리 조상들의 삶과 산업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퇴계 이황은 ‘문익점의 목면 전래가 조선의 의관문물을 새롭게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남명 조식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고 말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문익점 선생처럼 높은 공덕을 쌓은 이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선생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문익점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격변기를 지낸 인물이다. 문익점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엇갈린 해석이 있지만 어찌됐든 조선 조정은 문익점의 공을 높이 샀다. 그가 백성들에게 큰 이로움을 안겨주고 국가를 부요케 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태종은 문익점이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고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했다. 세종대왕은 영의정을 증직하고 ‘부민후(富民侯)’란 칭호를 추서하기도 했다.

문익점은 최영 장군과 함께 우리나라에 세워진 사당에서 가장 많이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문익점이 백성들을 이롭게 인물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조정은 문익점 사후에 큰 벼슬과 영예로운 칭호를 내리는 한편 곳곳에 부조묘를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문익점에 관한 기록이나 평가는 보는 이에 따라 사뭇 다르다. 사실과 다른 윤색이나 왜곡 등도 있다. 여말선초의 정치적 격변기를 살았던 탓도 있고 그의 업적을 필요이상으로 과장하려는 후손들의 ‘포장’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백성들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그의 충심이 매우 깊었다는 것이다.

■문익점의 생애와 정치역정

문익점생가터비

고려 말 문신인 문익점(文益漸:1328-1398)의 출생연도는 정확하지 않다. 1328년께로 추정된다. 선생은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초명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열 살 때 대유학자 이곡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스무 살에 시경을 가르치는 경덕재에 들어갔다. 스물세 살 때는 원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중서성이 주관하는 정동성 향시에 급제했다. 서른세 살 때는 신경동당시에 응시해 급제했다. 첫 벼슬은 정8품의 김해부사록이었으나 나중에는 사간원의 좌정언에 발탁됐다.

당시 고려의 왕이었던 공민왕은 원(元)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공민왕은 원에 맞서 국권회복을 시도했고 이에 반대하는 친원파 신하들을 숙청했다. 원은 그런 공민왕을 못마땅해 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원 정부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에 와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책봉해 고려에 보냈다.

이에 공민왕은 여러 차례 사절단을 보내 순제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원은 이를 거절하곤 했다. 공민왕은 다시 1363년 3월과 4월에 원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때 문익점은 문서기록을 담당하는 서장관 직책을 맡아 원으로 갔다. 이때 문익점이 공민왕 편에 섰는지, 아니면 덕흥군 편에 섰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에 따라 서로 다르다.

문익점시배사적비

<고려사>에는 이때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원나라에 있던 고려 관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공민왕과 덕흥군 중 한 명을 임금으로 선택해야만 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덕흥군 쪽에 서는 것이 유리했다. 과거에도 원나라는 충선왕과 충숙왕, 충혜왕 등을 폐위했다가 다시 복위시키기도 했다.

원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해 고려조정을 주무르곤 했다. 이때도 원은 군사 1만을 보내 덕흥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이성계와 최영이 나서 원의 군사를 물리쳤다. 덕흥군을 지지했던 문익점은 졸지에 역신(逆臣)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문익점은 고려로 귀국한 뒤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씨앗기

<고려사>에는 문익점의 정치적 입장과 목화씨를 얻은 경위가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번 올라 가 정언(正言)이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덕흥군에게 붙어 있었던 바 덕흥군이 패배하니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의 외삼촌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그것을 심었다. 처음에는 재배하는 방법을 몰라서 거의 다 말라 버리고 한 그루만 남았었는데 세 해만에 마침내 크게 불었다. 목화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켜는 물레들은 다 정천익이 처음 만들었다’

그러나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이 1464년에 편찬한 <가장>(家狀)과 남평 문씨의 가전을 집대성한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1819년)에는 이와 정반대의 기록이 등장하고 있다. <삼우당 실기>에는 문익점이 공민왕에게 충성을 다한 충신으로 그려져 있다. 그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문익점은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면서 원제와 덕흥군 쪽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내 지켰다. 그러자 원나라 황제는 42일간 문익점을 구류했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으니 남쪽 지방인인 교지(운남)로 유배를 보냈다. 문익점은 그곳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했다’

무명매기

<고려사>에서 문익점은 공민왕을 등지고 덕흥군을 쫓은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삼우당실기>에서는 공민왕을 섬기면서 덕흥군의 회유를 물리친 충신으로 묘사돼 있다.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기에 원나라의 미움을 받아 귀양까지 간 고려의 충신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상 <고려사>에 나오는 ‘문익점이 덕흥군 쪽에 붙었다’라는 표현은 실제와는 달리 다소 과장됐거나 고려조 신하를 폄훼했던 조선초 건국공신들의 시각이 반영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 문익점이 덕흥군 쪽에 다소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친공민왕 적 행보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문익점이 귀국 후 처벌되지 않고 공민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 받았다는 점과 여말선초의 여러 군주들로부터도 충신으로 대우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한 해석이다. 만약 ‘덕흥군의 편을 든 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목화씨를 들여와 고려·조선에 혁신적인 변화와 이로움을 가져온 인물이기에 과(過)보다는 공(功)을 더 높게 평가한 결과일수도 있다. 남평 문씨 후손들이 문익점이 충신으로 남기를 원해 <삼우당실기>에 ‘덕흥군 사람 문익점’을 ‘공민왕 사람 문익점’으로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치말기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편에 나와있는 문익점 졸기(卒記)에는 문익점의 출생과 입신, 그리고 목화씨 반입과 재배, 베 짜기 기술개발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다소 길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文益漸)이 졸(卒)하였다. 익점(益漸)은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사람이다.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科擧)에 올랐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익점은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글을 읽어 공민왕 경자년에 과거에 올라 김해부 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계묘년에 순유 박사(諄諭博士)로써 좌정언(左正言)에 승진되었다.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 조정에 갔다가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에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그 씨 반으로 본 고을 사람 전객 영(典客令)으로 치사(致仕)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이를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다만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天益)이 가을이 되어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이르러서는 그 종자를 나누어 향리(鄕里)에 주면서 권장하여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木)을 보고 기뻐 울면서 오늘날 다시 본토(本土)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 동안을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 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천익이 그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1필을 만드니, 이웃 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한 고을에 보급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익점을 불러 전의 주부(典儀注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였다. 본국의 조정에 이르러 의사(議事)하는 사람의 말로 참지의정부사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강성군(參知議政府事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江城君)으로증직(贈職)하였다. 아들은 세 사람이니 문중용(文中庸)·문중실(文中實)·문중계(文中啓)다’

실뽑기(물레질)

문익점 관련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문익점의 정치적 입장과 목화씨 구입경위, 그리고 정천익과의 관계이다. <고려사>에서 정천익은 문익점의 외삼촌으로 기록돼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장인이라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문익점이 붓통에 몰래 목화씨를 숨겨 들어왔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고려사>에서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문익점이 길가의 목면(木)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나타나 있다.

원이 목화씨 반출을 금지했다거나, 원의 감시를 피해 문익점이 붓 대롱에 목화씨를 숨겨 들어왔다는, 첩보영화식의 드라마틱한 장면은 사실상 없다. 원을 오갔던 고려 대신들은 중국대륙에서 흔하게 보았던 목화를 무심코 지나쳤다. 하지만 문익점은 이것을 가져오면 고려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애지중지 여기면서 가져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문익점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목화씨를 가져온 것은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걱정했던 평소의 마음가짐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익점이 자신의 호를 ‘삼우당’(三憂堂)이라 한 것은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고, 성인들의 학문이 널리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해 세 가지 걱정이 크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항상 나라의 부강함에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목화씨에 눈이 번쩍 뜨였을 것이다.

베짜기

■문익점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면화가 있었다.

문익점이 원에서 목화씨를 가져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솜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 이전에도 목화와 솜은 있었다. 다만 이 목화들은 목화 원산지인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지역에서 들여온 토종 종자여서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자연 면화생산량이 적어 일반백성들에게까지 몫이 돌아가지 못했다.

한반도에 백제시대부터 목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난 2007년 국립부여박물관이 부여 능산리 절터 유물을 정리하다가 백제 시대 면직물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능산리에서는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됐었다. 이곳에서 함께 출토된 창왕명석조사리감은 567년에 제작된 것이어서 이 면직물도 비슷한 연대에 짜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부여박물관 측은 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 유물에 대한 전시를 준비하던 중 ‘1999년 능산리 절터 제6차 조사에서 수습한 직물(폭 2cm, 길이 약 12cm)이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박물관 측의 정밀조사 결과 이 직물은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방식의 직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실물을 통해 확인된 국내 최고(最古) 면직물은 안동 태사자 묘에서 출토된 흑피화(黑皮靴) 안쪽에 붙어있던 직물이었다. 흑피화는 검정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형태의 신발로 안쪽 직물은 착용감과 보온성을 위해 붙여둔 것이었다. 제작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 때로 추정됐다.

따라서 백제 절터에서 발견된 실물 면직물은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보다 무려 8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500년대에 한반도에 이미 목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를 참조해보면 문익점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목화씨를 들여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문익점이 가져온 것은 대량재배가 가능한 개량종이어서 일반 백성들도 쉽게 기를 수 있었다.

백성들은 따뜻한 솜을 사용할 수 있게끔 해준 문익점을 은인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문익점=목화씨 재배’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으로 풀이된다. 문익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붓 대롱에 목화씨를 숨겨왔다’는 ‘영웅담’을 키웠고 결국은 ‘문익점 신화’(文益漸 神話)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이전 1천 년 전에 이미 한반도에 목화가 있었고 여기서 면직물들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595년 미수(眉?) 허목(許穆)이 지은 기언(記言) 제33권 원집(原集) 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상편에는 ‘미추가 졸하니 조분의 아들 유례(儒禮)가 즉위하여 사도(沙道)에 성을 쌓고, 사벌주(沙伐州 경북 상주)의 호부(豪富)들을 사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인관(印觀)과 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 두 사람은 솜(綿) 장수로 서로 사양하고 이익을 다투지 않았는데, 유례가 소문을 듣고는 어질게 여겨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례는 신라 제14대 왕인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이다. 그는 284∼298년 간 왕으로 있었다. 3세기 말 신라왕이 솜 장수였던 인관과 서조에게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은 우리나라 목화재배 시기를 200년대 말로 끌어올린다. <삼국사기>에는 672년 신라왕이 고구려 왕 안승에게 면(綿:목화)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미수가 기록한 면화관련 기록은 <삼국사기> 보다 388년, 문익점이 목화씨를 고려에 들여온 연대보다 1천79년이나 빠르다. 또 그 이전에도 면이 생산되고 있었으며 1200년대에 몽골이 고려에 면을 바치라고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어 한반도에는 문익점 목화씨 반입이전에도 소량이나마 목화재배가 이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동사강목>에는 ‘1096년 고려 숙종(肅宗) 원년 8월 왕이 향연(饗宴)을 베풀었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이어 의복·폐백·실·솜(綿)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221년 고려 고종 8년 8월 몽고(蒙古) 사신 저고여(著古輿) 등이 와서 토산물(土産物)을 요구했는데, 세모시(細苧) 2천 필, 면자(綿子) 1만 근 등을 요구했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우리 조상들은 무슨 옷을 입었을까?

목화의 종류는 30여 가지이다. 실제 재배되는 것은 육지면과 아시아면 2종, 해도면까지 네 종류에 불과하다. 아주 옛날 한반도에서 재배됐던 목화는 아시아면으로 키우기가 어렵고 생산량도 적었다.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재배되던 목화가 한반도로 전해져 신라·백제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재배가 쉬우면서도 수확량이 많은 육지면(Upland Cotton)은 전 세계 재배면화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육지면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송나라 고종 때인 서기 1000년 무렵으로 알려졌다. 문익점이 들여온 것은 이 육지면이다. 육지면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부 지배층만 여기서 나온 소량의 목면으로 옷을 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옛날 옛적, 조상들의 옷은 짐승 가죽옷을 제외하고는 무명옷과 비단(緋緞)옷, 삼베옷, 모시옷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무명옷은 목화에서 나온 솜으로 만든 옷이다. 비단옷은 누에고치 실을 짜서 만든 옷이다. 삼베옷은 삼나무(대마) 껍질로 만든 옷을 말한다. 모시옷은 모시풀로 만든 옷이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는 백성들의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목화에서 나온 솜은 백성들의 의복형태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겨울이면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이들은 비단(명주)천이나 따뜻한 짐승 털, 중앙아시아에서 들여온 토종 목화에서 나온 솜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그렇지만 일반 백성들은 겨울철에도 삼베나 모시, 칡넝쿨 껍질을 벗겨 만든 갈포로 지은 얇은 옷만으로 추위를 견뎌냈다.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옷이기에 보온성이 떨어져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이부자리는 낙엽이나 갈잎을 속에 넣은 삼베 요와 이불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금 여유가 있는 집이거나 사냥꾼 집에서는 짐승의 가죽을 벗겨 이부자리로 사용했다.

그런데 문익점이 대량생산이 가능한 목화씨를 가져온 뒤부터 일반 백성들도 따뜻한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게 됐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두툼한 무명옷을 지어 입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마니(섬) 옷이나 종이옷을 입기도 했다.

<인조실록> 10년(1632) 12월 26일 기록에는 군역을 치르기 위해 온 사람들이나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옷이 너무 가벼워 조치했다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서울에 번을 서려고 온 군사 가운데 옷이 허술한 사람에게 유의를 나눠 주도록 했다. 또 여러 곳의 수비 군졸과 옥중 죄인들에게 빈 섬을 나누어주도록 했다. 경미한 죄수들은 석방하라고 명했다’

유의는 무명 가운데에 솜을 넣어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옷이다. 섬은 짚으로 짠 것이다. 지금의 가마니는 쌀이나 곡식을 담기 위한 것으로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 이전의 섬은 짚으로 짜 길게 펼친 것으로 겉옷으로 사용됐다. 섬에 구멍을 뚫어 목과 손을 낼 수 있도록 하고 허리는 끈으로 동여맸다. 지금의 바람막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 낙복지(落幅紙)로 만든 옷도 있었다. 낙복지는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낙제자가 쓴 시험지를 말한다. 답안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겹친 다음 군사들의 옷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너무 추워 목화를 재배할 수 없었던 함경도에서는 백성들이 개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털배자를 입고 있는 여인(김숙진우리옷 작품한복 사진)

추위에 떨던 일반 백성들이 따스한 옷과 이불을 만들 수 있는 목화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목화에서 나오는 솜은 사람을 따뜻하게 했고 실로는 여러 가지 옷감을 만들 수 있었다. 목화씨로는 기름을 만들어 썼다. 솜은 조선시대 백성들의 옷 형태를 바꾸었다. 문익점 이후에 솜을 넣은 솜바지·저고리와 발을 따뜻하게 하는 버선, 추위를 막아주는 남바위, 조바위·풍차 등이 생겨났다. 또 팔뚝에 끼는 토시도 등장했다.

■문익점을 기리고 있는 곳들과 남평 장연서원

문익점은 생전에는 공적을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후에 그의 공이 크게 기려지기 시작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추위를 피하게 해준 문익점에 대해 감사와 숭상의 마음이 번져갔다. 문익점이 조선의 지배이념이 된 성리학의 학자였다는 점은 조선의 왕들이 문익점을 후하게 대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문익점은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케 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기리는 서원이 전국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보성미력문익점부조묘

문익점의 묘소는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다. 묘 근처에는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의 고향이자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됐다.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은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남 장흥의 강성서원(江城書院)에 제향됐다. 단성 도천서원(道川書院)의 사액은 정조가 1785년 직접 지어 내려 보낸 것이다. 장흥 강성서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644년에 건립됐다. 옛 이름은 월천사우(月川祠宇)였다. 1785년(정조 9)에 사액됐다. 문익점(文益漸)과 문위세(文緯世) 등을 배향하고 있다.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528-1번지에 있는 문익점부조묘는 문익점의 사당이다. 공식명칭은 ‘삼우당충선공강성군부민후문익점부조묘’이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제사 지내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문익점의 기일인 2월 8일에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문익점 부조묘는 원래 1398년(태조 7년)에 경상도 산청군 단성면에 세워졌었다. 그러나 문익점의 사손이 끊기는 바람에 외손인 합천이씨가 관리해 왔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철종 5년(1854년)에 남평문씨 후손들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보성 미력으로 부조묘를 옮겨왔다.

문익점부조묘의 사당. 부인후묘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보성 미력의 문익점 부조묘는 1963과 1986년에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중수했다. 1988년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65호로 지정됐다. 부조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골기와 건물인 사당과 내삼문을 갖추고 있다. 사당과 내삼문에는 ‘부인후묘’와 ‘충신문’이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대선후보시절 장연서원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에도 문익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장연서원(長淵書院)이 있다. 장연서원에는 남평문씨 시조인 무성공 문다성(文多省)과 문유(文裕), 문극겸(文克謙:1122~1189), 문유필(文惟弼), 문익점 등 고려시대 남평문씨 인물 5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18년 남평에 새로 들어선 1천500여 세대 규모의 ‘양우내안에 리버시티’ 아파트 단지 강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이 장연서원이다.

장연서원은 <장연서원속지>의 서문에 정조(재위 1776~1800) 대에 창건됐다고 기록돼 있다. 1871년(고종 8) 철폐됐으나 1923년 복설됐다. 1975년에 대대적으로 중수됐다. 사우(祠宇) 상덕사(尙德祠)와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악강당(嶽降堂), 영당(影堂)·동재 오사재(五思齋)·외삼문 영호루(永壺樓)·내삼문 양춘문(陽春門)으로 이뤄져 있다.

화순 남평의 장연서원. 문익점 선생은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그리고 나라를 부요케 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그의 충심과 애민정신은 목화씨를 들여오게 했다. 선생이 들여온 목화씨는 조선의 목면생산량을 늘려 일반 백성들이 따뜻한 옷을 입게끔 했다. 조선조정은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시로 곳곳에 서원을 세우고 그의 덕을 기리고 있다. 문익점 선생의 신위는 최영 장군과 함께 우리나라에 세워진 사당에서 가장 많이 모셔져 있는 인물이다.

1924년 건립된 영당에는 문익점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약했던 화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1928년에 그린 것이다. 외삼문 밖에는 오선생기적비, 장연서원창건기적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장연서원은 남평문씨 후손인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에 대선출마의 의지를 밝히거나 중요한 정치 일정 때 항상 찾던 곳이다. 문대통령은 대선후보시절이었던 2017년 1월 장연서원을 찾았다. 2012년 대선 출마선언 직후에도 첫 일정으로 이곳을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충선공파 33세손(孫)이다. 남평문씨 시조(始祖)에서 보면 48세손이다.

도움말/정수일, 김영조, 한눌, 안나(sylph58)

사진제공/문익점면화전시관, 보성군, 장흥군, 장흥문화원, 산청군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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