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잊힌 전쟁’ 기념비

최혁<본사 주필>
 

기자는 3주간의 미국취재를 마치고 어제 귀국했다. 미국에서는 중서부 5개주를 다니며 한인초기이민사 자료를 찾았다. 과거 유타와 콜로라도·와이오밍 주에 있는 고문서실과 대학도서관들을 몇 번씩 뒤졌지만 올해도 또 찾아갔다. 자료들을 꼼꼼하게 챙기려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보면 빠트린 자료들이 있었다. 또 촉박한 일정상, 도서관 사서들이 내준 자료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으로 발걸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번에도 많은 것을 느끼고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가장 절실히 느꼈던 것은 ‘팍스아메리카(Fox America)의 부활’이었다. 미국인들의 얼굴은 밝았다. 도시는 활력이 넘쳤다. 경기가 호황이었기 때문이다. 콜로라도와 유타의 주도(州都)인 덴버와 솔트레이크는 해외 및 국내 굴지기업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는 바람에 외곽에 고층건물들이 꽉 차있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 건물자리는 흙먼지 일던 황야였다. ‘잘 나가는 미국경제’를 실감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절감했던 것은 갈수록 확산돼 가고 있는 미국 내의 한류(韓流)였다. 찾아가는 한국식당 곳곳마다 벽면의 대형TV화면에서는 그룹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그 노래를 즐기고 있었다. 영어로 자막 처리된 가사를 따라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식당에는 미국인들이 가득했다. ‘AYCE(All You Can Eat)한식당’에서 양념갈비와 삼겹살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현대·기아차도 훨씬 많아졌다.

현재 미국사회에서 한국과 한국기업의 위상은 상당하다. 미국인 대부분은 ‘SAMSUNG’(삼성)과 ‘HYUNDAI’(현대)라는 브랜드를 잘 알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다. 그래도 여전히 KOREA는 낮선 나라였다. 기자가 1997년 미국에서 공부할 때 자주 받았던 질문 중의 하나는 “한국은 일본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걸리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황당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지금, 미국인 대부분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 더 나아가 한국과 북한이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미 언론에서 북핵문제와 트럼프대통령·김정은 위원장의 정상회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영향이 크다. 이 와중에 방탄소년단의 노래들이 빌보드 메인 차트를 석권하고 있으니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는 기자보고 “Japanese?”하고 물어보는 이가 많았다. 요즘에는 “Korean?”이라 묻는 이가 더 많다.

이유야 여러 가지일 것이다. 기자는 앞서 밝힌 대로 서울올림픽과 한인식당에서 맛볼 수 있었던 한국음식, 그리고 최근의 한국 아이돌그룹 때문에 ‘KOREA’가 널리 알려졌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미국취재를 다니며 ‘지금 미국에 불고 있는 한류의 근원은 미국 내 생존해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덴버와 솔트레이크, 라스베이거스에서 들렸던 ‘Veteran Memorial Park’에서 그런 생각이 깊었다.

이번 한인이민사 취재 도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Pikes Peak Region Peace Officers’ Memorial>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둘러볼 때이다. 이 공원에는 남북전쟁을 비롯 세계 1·2차 대전 등 미군이 참전했던 전쟁에 대한 기념비가 여러 개 세워져 있다. 공원 동쪽에는 한국전쟁기념비도 있었다. 한국전쟁에서는 미군 3만3천651명이 전사, 10만3천284명이 부상, 8천177명이 실종됐으니 미국 입장에서 보면 매우 희생이 컸던 전쟁이었다.

그런데 미군 전사·부상·실종자 규모와 대략적인 전쟁경위가 새겨져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 앞에는 <AMERICA’S FORGOTTEN WAR>라는 비석이 별도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에게는 잊힌 전쟁’이라는 것이다. 실제 그렇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한국전쟁(6·25전쟁)은 잊힌 전쟁이다. 미국에서는 참전용사와 가족들만이, 한국에서는 나이든 축들만 ‘그 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미국 내 한류의 연원(淵源)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초신(CHOSIN)전투’와 한국을 잘 기억하고 있다. 초신전투는 장진호(長津湖)전투다. ‘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발음이다. 한국전 참가 연합군이 일본어로 만들어진 지도를 사용했기에 ‘초신전투’가 돼버린 것이다. 장진호전투에서 미군은 7천 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6·25전쟁에서 남북한은 민간인을 포함해 45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초신전투는 희생이 매우 컸던 전투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우리의 피해보다는 적다.

그러나 정작, 6·25전쟁을 잊고 있는 것은 우리가 더 심하다. 남북한이 평화를 노래하는 지금, ‘6·25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시대를 거스르는 생뚱’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자랑스러운 KOREA’와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 내 자신이 잘나서 이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부모의 은혜도, 나라의 감사함도 망각하고 있다. 과거와 감사를 잘 간직해야 한다. 3주간 밖을 돌아다니며 새삼스레 느낀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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