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14>

정충신은 낙상지 장수의 안내로 이여송 제독을 만났다.

“제독 각하, 조선의 젊은 청년장교 정충신 파총을 소개합니다.”

낙상지가 말하자 이여송이 새삼스럽게 소개한다는 듯 말했다.

“알고 있잖나. 어서 오시게. 그런데 무슨 용무인가?”

“낙상지 참장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자 낙상지 참장이 나섰다.

“제독 각하, 정충신 파총을 명군의 향도로 쓰고자 합니다. 명민함이 귀신 촉이고, 용맹함이 호랑이와 같습니다.”

향도란 대오의 선두에서 진격 방향과 진격 속도를 조절하는 군사의 중요 직책이다. 두뇌와 용맹이 요구되는 자리다. 지리를 잘 알아야 하고, 전술도 꿰야 한다. 오백 리 길을 멀리 달려갔다가 되돌아오기를 수십 차례, 그런 가운데 선두와 후미를 조절해야 하니 말을 잘 타야 한다. 단독군이 아니라 연합군으로 구성된지라 조명군과의 유격 거리, 유기적 협력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향도를 맡는다면 우리의 군호와 군사 언어를 알아야 할 텐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남방병사 군마 중군장 동충평으로부터 중국말을 배웠고, 명군 조직체계도 숙달했으며, 말 달리기도 제대로 익혀서 비호 같습니다. 우리 또한 조선말이 서투르니 정 파총이 선봉의 향도로서 통역 가교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낙 참장은 너무 사람이 좋아. 한번 믿는 사람은 철석같이 믿으니 말일세.”

그러나 이여송은 낙상지를 아끼고 있었다. 그는 요양 사람으로 이여송의 부친 이성량과 대를 이어 이여송 집안을 섬겼고, 절강성의 남방 병사들을 잘 훈련시켜 4차 평양성 공격에 참가하기 위해 의주에 들어와 있다. 몸이 육척장신에 근력이 천근을 든다고 해서 낙천근이라 이름붙은 장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상하게 조선에 우호적이다. 이여송 자신의 조상이라고 알고 그런 식으로 충성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여송은 자신이 조선족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지 오래다. 대대로 모계가 중국 여인이니 이제 조선의 피가 사라질 때도 되었다.

이여송이 생각에 잠겨 별 반응이 없자 낙 참장이 다시 나섰다.

“지난번 제독 각하께 선물로 바친 조선 지도를 정충신 파총이 제작해서 올린 것입니다.”

이여송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응, 그래, 금붙이 수만 냥을 받은 것보다 값진 선물이었지. 세밀하게 그린 지도더군. 그러나 온 군사가 동원되어서 제작한 지도가 아닌가?”

이때 정충신이 각지게 읍하고 앞으로 나섰다.

“제독 각하, 저는 저 멀리 전라도라는 곳에서 올라온 사람입니다. 전라도에서 의주까지 이천오백리 길이온데, 북경에서 의주 오는 길과 같습니다. 저는 이 길을 두 차례나 왕복했나이다. 오며가며 네 차례나 산하를 살핀 것이옵니다. 중요한 요새, 강과 나루터, 산의 협곡과 평야를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지형에 대해서만은 안심하십시오. 아침 새보다 먼저 일어나고, 한밤 중 부엉이보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명군을 안내할 것입니다.”

이여송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보다는 행동이 우선인즉, 두고 볼 일이다”

“그러면 승인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낙 참장이 말하고, 정충신은 곧바로 병조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대번에 조정에서 난리가 났다.

“명 구원병이 우리 군사와 연합하여 평양성을 진격하는데 정충신 파총이 조명연합군 향도로 나서게 되었사옵니다.”

이항복 병판이 정충신을 대동하고 왕 앞에 이르러 아뢰자, 왕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주 잘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충신에게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총부(都摠府) 경력(慶曆)을 겸하여서 선전관으로 임명하노라.”

“네?”

이항복의 눈이 먼저 휘둥그래졌다. 기분대로 벼슬을 내리면 되나. 다른 관원들 이목도 있는데... 왕이 감정에 충실한 기분파라는 것은 알지만, 이것은 좀 지나치다. 화를 자초할 수 있다.

“상감마마, 평양성 승리를 이끈 다음에 벼슬을 내려도 늦지 않사옵니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 더 잘하라고 벼슬을 내리는 것인데... 비바람 눈보라를 먼저 맞을 향도는 어떤 장수에 못지않은 역할이다. 명군 총사령관이 임무를 부여했다면 우리 역시 그에 상응한 예법을 갖춰야 한다. 조선의 예법이 그러하지 않느냐. 정 파총이 지난번 지도를 가지고 이 제독을 감복시킨 것으로도 장수 열이 할 일을 정충신이 해낸 것이다. 그 값으로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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