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19>

“요것 봐라, 못하겠소이다? 어디서 배운 말버릇인가. 우리 선전관청엔 못하겠다는 말은 사전에 없어! 밤송이를 좆으로 까라도 까는 곳이야!”

행수 선전관이 호통쳤다. 그러자 모두들 그릇 깨지는 소리로 와크르 웃었다. 정충신을 완전히 야지 놓고 엿먹이는 수작이었다. 정충신이 아랫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런 통과의례는 나는 못받겠소. 그 이유를 말하겠소이다. 첫째 이런 관습은 악습이오이다. 단합을 목적으로 하고 우애를 깊이 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단합을 결의할 일이 있소이다.”

“다른 것이 있다?”

“그렇소이다. 함께 백두산 등정을 하면서 조를 짜 야숙(野宿)을 하며 결속을 다진다든지, 뗏목을 띄워 함께 노 젓는다든지, 압록강 얼움물에 들어가 함께 몸을 담군다든지 하는 것이오.”

“혼자 군인 노릇 다 하누만. 잘났어. 야, 이 사람아, 얼음물에 빠져 디질 일 있어?”

참하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 눈밭에 들어가 호랑이 밥이 되라고? 웃기는 자일세.”

다른 선전관이었다. 하긴 이들은 행궁에 와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왕실과 육조의 행정은 마비되었으니 역할이 없는 것이다. 왕자 광해가 서북지방과 삼남을 오가며 왜군과 싸우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남해 바다에서 고군분투하고, 의승병들이 처처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의주 행궁은 이제나저제나 요동땅을 건널 생각이었다. 정충신이 장계를 품고 오지 않았다면 이들은 벌써 왕을 호위해 요동으로 건너가 조선을 뼈도 바르지 않고 왜에게 헌상했을 것이다. 이 자들은 생각없이 사는지라 비상시국에도 먹고 놀고 조지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정충신이 말했다.

“두번 째로는 수천 리 밖 타관에 홀로 나와있는 내가 무슨 수로 술과 안주를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전관은 누구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니까. 저 멀리 수천 리 밖 전라도 촌것이 술과 안주 하나 못내니, 이 자리가 가당치나 한가. 절대도 가당치 않지.”

“거럼 거럼!”

또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 안엔 비하와 조롱이 한껏 실려있었다.

“술과 안주는 낼 수 있소. 그러나 남의 신세를 지는 일이오이다. 백사(이항복) 대감의 마나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밥을 얻어먹는 것도 황공한 처지에 어떻게 술과 안주를 내도록 부탁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선전관은 아무나 하는 자리가 아니라니까.”

“통과의례가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하겠소이다.”

“어떻게?”

“호랑이 한 마리와 노루와 멧돼지 열 마리를 바치겠소이다.”

선전관들이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편으로는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네까짓 게 무슨 허풍이냐는 듯이 어이없어 했다.

“그걸로 내 신고식 받아주겠소?”

그 정도라면 어떤 초호화 잔치보다 앞설 것이다.

“말 같은 얘길 해라. 똥배포지, 가당치나 한 일인가?”

“나한테는 가당한 이야기요. 똥배짱이 아니오. 대신 선전관 다섯을 나에게 붙여주시오.”

그러자 참하관 하나가 흥미를 보였다.

“사냥을 하자 그건가?”

“그렇소. 밤마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인근 산에 호랑이가 몇 마리 살고 있소. 호랑이가 살면 먹잇감이 풍부하다는 뜻이오. 노루와 멧돼지 사슴이 널려있을 것이오.”

아닌게 아니라 삭주군으로부터 흘러내려온 강남산맥의 산록지대와 연이어지는 구릉지, 그리고 천마산 줄기엔 산짐승들이 많았다. 먹이사슬이 잘 발달해 무서운 산짐승에서부터 사슴 노루 멧돼지 삵괭이 여우 토끼가 풍부하게 분포되어 살고 있었다. 겨울철엔 눈이 쌓여 깊이가 2m를 넘으니 이것들은 지상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그것 참 기발한 발상일세.”

다음날 정충신은 다섯을 선발했는데 지원자가 열 명이 더 나왔다. 그들은 눈덮인 산으로 들어갔다. 조총이 네 자루가 있었으므로 정충신이 한 자루와 활을 지니고, 세 명에게 조총을 맡겼다. 나머지는 몰잇군으로 배치했다. 정충신은 무등산 비호답게 이 산 저 산을 바람처럼 누볐다. 선전관들은 사무실에서 먹고 노느라 배가 나와서 잘 움직이지 못했다. 정충신은 똥개 훈련시키듯 그들을 종횡무진 끌고 다녔다. 날아가는 꿩을 활로 두 마리를 동시에 잡았다. 문자 그대로 일전쌍조(一箭雙?)였다.

“와, 명포수여.”

따르는 선전관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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