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기!
최유정(동화작가)

어제는 바빴다. 작가의 말도 써야 하고 매달리고 있는 난징관련 동화 원고도 마무리해야 했다. 출판사에서 속히 작업해서 보내달라는 수정 원고도 책상에 턱, 놓여 있었다. 그 와중에 두 달 전 덜컥 약속해 버린 북 토크도 다녀와야 했다. 저녁엔 대학 동아리 모임도 다녀와야 했다. 물론 대학 동아리 모임이야 안 가도 그만이지만 개인적인 일에 도움을 받고 관심을 모아준 친구들에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가 미안했다. 마음 빚을 쌓아두기가 싫었다. 그래서였다. 어제는 쓰는 일 보다 앞에 나가 말하고 분위기에 동승해 일부러라도 이런 저런 말들을 해야 했다. 참, 바쁜 하루! “말”이 힘든 나에게는 정말 힘든 하루였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으면 ‘말’보다는 ‘글’을 통해 전달하려 노력한다. 말 보다는 글이 편하고 글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나답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 서툴기 때문에 취하는 낭만적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글을 쓰면서 갖는 만남에 더 익숙해져 있다. 글을 매개로 만나는 순간만큼은 나 자신 또는 상대방에 훨씬 더 진솔해지는 느낌이다. 내 진실이 왜곡되지 않게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내가 글을 더 선호하는 이유이다.

지금이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내 모습을 오랜 동안 긍정하지 못 했다. 사람 앞에만 나서면 쭈뼛거리는 내 모습이 싫었고 사람을 낯설어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지독한 열등감에 허덕이기도 했다. 어제 북 토크에서 있었던 일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 한 분이 고민을 보내주셨다. 아이가 밖에 나가 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틀어 박혀 아이가 만날 책만 읽는다고 걱정을 하셨다. 나는 사연을 듣는 내내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아이가 꼭 어릴 적 나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새 나는 그 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 걱정에 고통스러워하시는 어머님을 두고 나는 어느새 그 아이 등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책을 보는 네 모습이 멋져 보인다고 칭찬해 주고 있었다.

물론 그 아이 모습이 고립적,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나중 사회생활에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수도 있다. 그 어머니의 고민이 무엇이고 어느 맥락에서 걱정이 되는지 충분히 이해도 되고 인정도 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나는 그 어머니에게 아무 걱정을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걱정을 하시기보다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부탁드렸다. 걱정이 되는데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니! 얼토당토않은 내 말에 어머니는 무척 의아해하셨다.

생각해보면 정해진 틀을 만들고 정해진 틀을 강요하는 건 어른들이다. 정해진 틀을 강요하면서도 상상력과 창의력을 요구하고 나답게, 행복하게 살기를 요구하는 것도 어른들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는 절대 나다울 수 없고 정해진 틀 안에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말이다. 그 아이 문제, 문제가 아닌 문제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책’을 읽는 순간을 즐기는 능동적 주체다. 행복한 순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복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능동적 주체! 그 아이가 주위로부터 ‘소외’ 되었다고, 소외를 자초하고 있다고 규정하는 건 그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이를 그렇게 바라보는 어른들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은 어른이 문제다.

익숙한 것에 굴복하고 질서에 순응하고 일정한 형식이나 틀을 강요하면 ‘나’와 만날 수 없다. ‘나다운 나’를 만들 수 없다. 나만의 방법으로 세상과 만나고 나만의 방법으로 파격을 시도하고 나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돌파해나가도록 도와 줘야 한다. 나답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긍정해줘야 한다. 적어도 부정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그 어머니에게 외톨이였던 내 어린 시절을 말씀드렸다. 어린 시절 나는 소외 된 적이 있었고 그 소외 때문에 힘들고 고통스러웠다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그래서 ‘작가’가 될 수 있었고 작가가 되어서 지금은 참 행복하다고 말씀드렸다. 소외가 없었으면 소외를 극복하는 과정이 없었을 것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슬픔과 기쁨, 고통과 좌절을 치열하게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경험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씀드렸다. 얼토당토않은 내 대답에 의아해하셨던 어머님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셨다. 기뻤다! ‘말’이 서툰 내가 모처럼 말을 통해 소통을 이룬 느낌이어서 기뻤으며 상상 속 그 아이가 이제는 긍정 속에서 마음껏 제 시간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그리고 기대도 됐다. 그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그 성장이 궁금했다. 삼십 년 쯤 후 그 아이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디 그 아이가 제 시간을 방해 받지 않고 ‘나답게’ 자라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마침내 눈부신 성장을 이룬 한 그루 튼튼한 나무가 되길 바란다. 생각해보니 말을 많이 해서 힘들긴 했지만 어제는 ‘어린’ 나를 다시 만나는 그래서 조금은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아이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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