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22>

“왜 걱정이 없다고 말하는가. 이여송 제독 성질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가.”

정충신이 백사 이항복 대감에게 별도로 말하겠다고 관원들을 물릴 것을 요구했다.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실로 자리를 옮기자.”

백사 대감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고, 정충신이 뒤따라 별실로 들어갔다. 백사 대감이 입을 열었다.

“이여송 제독이 나를 잡아들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호궤(?饋):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것)를 거부하고 명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자인즉 당장 체포해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호궤라니요?

“참의가 말하지 않더냐. 원병으로 출정한 명군에게 음식을 주어 사기를 올려주는 것인데, 그것을 생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곡이 있어야 말이지. 국고가 바닥이 난 지 언젠가...”

“대감 마님, 제가 척후병들의 보고를 접했나이다. 이들에 따르면, 명군이 지나가는 곳은 온통 약탈과 횡포가 자자하다 하옵니다. 마을마다 들어가 곡식을 끌어내 길가에 쌓아놓고, 부녀자는 잡아다가 겁탈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러니 양곡이 부족할 것은 당연하지요. 민심도 이반하고 있습니다. 명군이나 왜군이나 무슨 차이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방법?”

“그렇사옵니다. 한음 이덕형 형판 대감을 평양성 외곽의 역원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명군이 이덕형 대감 마님을 접반사로 알고 잡아갈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지. 친구에게 욕보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예판에서 형판으로 자리를 옮긴 지도 얼마 안되는데, 형조 직무를 숙지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야.”

“친구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조정신료를 내세우면 오해를 살 수 있지만 한음 대감은 오성 대감마님의 깨복쟁이 친구 아닙니까요.”

“그래도 꺼림칙하다. 친구 목숨까지 앗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

“나라가 있어야 형조가 있는 것 아닙니까. 명군이 가버리면 나라는 영영 엿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나라의 궁리만 회피하는 폐신(廢臣)이 된다.”

“폐신이 아닙니다. 대신 대감 마님은 명군이 쌓아놓은 양식을 회수하십시오. 명군이 지나간 박천, 안주, 숙천부사와 방어사를 동원해 길가에 쌓아놓은 곡식을 압수해 이여송 진지로 보내는 것입니다. 명군이 약탈한 것을 도로 찾는 것이니, 백성들이 환호할 것이며, 이것을 전투식량으로 징발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되돌려 준다고 백성들에게 증서를 써주면 백성들이 감읍할 것입니다. 그 일은 병판이 할 일이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이항복 대감이 머리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밀지를 준비하렸다.”

밀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덕형 형조판서에게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박천 안주 숙천 영변 부사와 방어사에게 각기 보내는 기병(起兵) 밀지였다.

밀지를 받은 이덕형 형판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박천 안주 숙천 영변 고을에서도 민병대가 구성되고, 우마차가 동원되었다. 이항복이 이들 고을로 나가 민병대를 지휘해 명군이 약탈한 식량을 회수했다.

“이 곡식은 백성들의 것이니 우리 조정이 회수한다. 우리가 평양성에 당도한 이여송 제독에게 직접 보낼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명군이 항의할 근거는 없었다. 우람한 채격의 이항복 병판이 마상에서 엄하게 호령하니 명군들이 그대로 쫄았다. 누가 보아도 의심할 여지없는 배포 큰 장수 풍모였다.

“어느 부대 군사들인가.”

“길봉하, 사대수 부대의 잔병들이옵니다. 식량 확보 때문에 머물러 있사옵니다.”

“너희들 하는 수작이 아름다우면 이여송 제독에게 상훈이 내리도록 하겠다. 걱정하지 말고 귀대하라.”

이항복은 군례(軍禮)에 따라 명의 장병들에게도 주정소(晝停所)와 호조에서 지급하는 일당 2전7푼씩을 나누어주고 술도 한 순배 돌렸다. 이들이 단박에 “씨에씨에(고맙습니다)”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환잉광린 워더쥬예!(?迎光?我的主?:도움되길 바란다).”

이항복이 중국말로 응대하자 그들이 더욱 머리를 조아리다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이덕형 형조판서는 이항복의 밀지대로 평양 외곽 역원에 들어가 앉았다. 밤이 깊자 명군 정탐병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이항복을 체포한다.”

이덕형은 곧바로 명군 진지로 압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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