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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25>

이항복의 말을 듣고 이여송은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것 역시 지혜임엔 틀림없었다. 사실 명군은 전쟁터에서 싸우던 말이 부상당하거나 폐마가 되어 죽음에 이르면 땅속에 파묻었다. 그동안 수고한 데 대한 예의로 그렇게 해주었다. 그들의 말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자심(慈心)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수의 마음일 뿐, 굶주린 군사들이 견디다 못해 파묻은 말을 몰래 꺼내 먹다가 식중독에 걸려 죽거나 돌림병에 걸려 신음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름, 혹은 두세 달 지난 부패한 것을 파헤쳐 먹으니 병사들이 배탈이 나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부상당한 폐마를 잡아먹는다. 전쟁터에 끝없이 끌고 다니면 전력을 약화시키고, 말 자신에게도 고생시킨 것이 된다. 그래서 일찍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군사들은 산 것을 삶아먹으니 뒤탈은커녕 원기가 왕성해진다. 힘이 없는 병사가 이것을 먹고 다음날 거뜬히 힘이 솟구쳐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이런 지혜들이 언제부터 생겼소?”

“요번에 이 젊은 장교가 고안한 지혜요.”

이항복이 창을 들고 마상에서 그를 보위하고 있는 정충신을 가리켰다.

“참으로 쓸모있는 생각이오. 폐마가 죽을 때도 끝까지 자기 몫을 다하다니... 낙상지 참장과 훈련도감 만들겠다고 계획을 말한 저 청년장교 생각이란 말이오?”

“그렇소이다.”

이항복은 정충신의 기지로 이덕형을 대신 접반사로 내보내고, 그 사이 명군이 노략질한 양곡을 싹 거두어 명군 본진에 가져왔다는 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이런 계략까지 굳이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이항복이 옹색하게 웅크리고 앉아있는 이덕형을 바라보며 이여송에게 물었다.

“제독 각하, 내 대신 이덕형 형판이 접반사 역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여전히 궁금하군요. 대접을 훌륭히 받았습니까?”

순간 이덕형은 저 쳐죽일 자가 또 장난하는군, 하고 이항복을 노려보았다. 이항복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덕형을 무시하고 이여송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우리가 결례를 했소. 그런 사정도 모르고, 여전히 호궤 소식이 없어서 화가 난 나머지 내 휘하의 압송대장이 역원에 달려가 접반사를 압송해온 것 같소. 잘못 모셨다면 이건 철저히 내 불찰이오. 접어주시오.”

이여송의 정중한 사과는 이덕형에게 보내는 사과이기도 했다. 이것을 이항복이 받아낸 것이다.

“이봐라, 저 조선의 대감을 정중히 모셔라.”

이여송이 말하자 이덕형이 풀려나고, 곧바로 잔치상이 마련되었다. 그제서야 한음 이덕형은 오성 이항복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속으로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잔치상에 시중드는 여자들이 나왔는데 끌려온 평성·평양 근교 부녀자들이었다. 그중에는 관문참 아랫 마을에 사는 무당 화선 부녀도 끼어 있었다. 화선이 웃음을 날리며 음식을 나르고 교태를 부리는데 무당의 변신은 끝이 없어보였다.

정충신이 화선에게 다가갔다.

“신을 모시는 사람이 이번에는 명장(明將)을 모시는군?”

“에그머니나, 난 또 누구라고? 간자(間者) 아니시오?”

“말을 해도 왜 고따구로 하는가? 간자라니? 나는 척후장이여. 나는 그대가 점사도 봐주고 신도 모시는 줄만 알았더니 명장을 모시는데도 도가 트였군. 명장 얼굴을 보니 뭐가 보이는 게 있는가? 뭔가 보이면 한 말씀 좀...”

“호호호, 지송하지만 지가 지금 잔치상을 차리고 있네요. 잔치가 끝나면 만납시다. 일러줄 것이 있으니께...”

“자네 반응이 왔다는 것이여?”

무당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더니 말했다.

“왔다니께, 왔어.”

신령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이 무녀라고 하지만, 정충신이 보기로는 그녀가 꼭 요녀 같았다.

“자네는 아무래도 요녀 아니면 사기녀인 성 불러.”

“그런 소리 하면 천불 맞어. 신령님 볼기 한번 맞아볼텨? 선령님·악령놈과 직접 통화하는 성녀(聖女)를 고렇게 싸잡아 비틀어버리면 내 섭하지. 능력을 보여줄테니 뒷말 말고 잔치 끝나고, 해시(亥時)쯤에 대숲으로 와. 인간의 화복(禍福)은 신의 뜻에 따라 좌우되니, 재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신과 접촉하는 나를 가까이 해야지. 멀리하면 인생사가 복잡해진다니까.”

무녀의 묘하게 웃는 품이 깊은 우물 속같은 무언가가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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