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26>

대숲은 아늑했다. 삭풍이 대숲을 요란하게 흔들고 지나갔지만 대나무 숲속 구렁창은 놀기 좋은 뒷방처럼 그윽하고 아늑했다. 바닥은 무릎까지 차는 마른 잎사귀가 쌓여서 푹신하였다. 밤이 깊자 대나무 숲 아래에서 낙엽을 밟는 소리가 나더니 두터운 장옷을 머리까지 두른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와 있었구랴.”

장옷을 머리에서 내리자 화선이었다. 달빛에 어린 화선의 자태가 원숙해보였다. 두툼한 양단 당의를 입었지만 도련 선이 우아하여 깨끗한 목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화선이 정충신 곁에 앉으며 들고온 것을 내려놓았다. 찐 고기와 인삼 달인 물이 담긴 호로병이었다.

정충신은 문득 광주 관기 월매향 생각이 났다. 그녀 역시 잔치상에서 받아온 고기와 음식으로 그를 대접했다. 연상녀들이 유독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화선이 말했다.

“귀여운 낭군, 이거 먹어봐. 총기 가득한 눈을 보면 내가 한없이 빠져든다니까. 내 일찍이 정 파총을 알아보았어.”

화선이 찐고기를 정충신 앞에 펼쳐놓았다.

“지금은 파총이 아니여. 선전관이여.”

“어마나 놀래라. 그 무서운 선전관 나리라고? 젊은 사람이 벌써 출세했네. 내 진작에 알아보았지. 내 영험은 저 우주에 가 닿으니까.”

그녀의 몸에서 분 냄새가 풍겼다.

“이 밤중에 무슨 양단 당의여?”

“이여송 제독한테 선물 받은 거야. 내 점술이 영험하다고 해서 받은 거지. 중국 비단이 장사 왕서방한테 특별 주문해서 받아온 양단이래. 겨울 옷이라서 두께감이 있고, 화려하고 무늬가 두드러진 원단이야. 화사하고 고급스럽지.”

깃과 고름까지 광택 명주로 제작되어서 말 그대로 고급스러워보였다.

정충신이 화선을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부정 타는디 몸을 바짝 붙이면 어떡해? 남녀간은 유별이여.”

“나 무당 폐업했다네.”

정충신이 그녀 말을 묵살하고 용건을 말했다.

“물어볼 말이 있는디, 대답해주게. 화선이 왜장 놈을 만난 것도 알고 있고, 이번에는 명장(明將)을 만났잖아.”

“만났지. 그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되니?”

“잘못 따지자는 게 아닝개 들어봐. 어떤 놈 후장을 따버려야 내가 살 성 싶어. 그러니 나를 도와야지. 왜 장수들 이동공간을 알아야 한다니까.”

“왜장들 작전 모의하는 것 알고 있긴 하지.”

“그걸 이야기해야지.”

“하지만 나를 이렇게 무참하게 할 수가 있남? 내가 늙었다고 그러는 거니?”

다시 그녀의 말을 묵살하고 정충신이 물었다. 가능한 한 그녀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고니시 1번대장 만났나?”

“만났지. 딸년 데리고 황해도 봉산에 갔다 왔다네.”

“봉산은 왜?”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한 오토모 요시무네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간 거지.”

“그래서?”

“오토모는 벌써 한양 방면으로 철수했어. 그래서 지금 빈 손으로 돌아온 거야.”

고니시 군은 독자 방어에 나서기로 하고, 일본식으로 성을 축성해 평양성을 최대한 요새화하고, 모란봉에는 2,000명의 조총부대를 배치시켰다. 평양성 외성과 칠성문, 보통문 요소요소에는 정예 왜병들을 매복시켰다. 그러는 한편으로 고니시는 역원인 부산원으로 가서 중국 사절을 만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심유경이란 자가 북경에서 돌아오면 조선반도 분할 협정서에 날인한다는 것이지. 그리고 전쟁을 종식시키겠다는구랴.”

“그 말은 누구한테 들었나.”

“딸년이지.”

“딸년이 그런 내막을 어떻게 알고 있나.”

“고니시의 애첩이라네. 몇 명 중 한명이라네.”

“그런 개새끼.”

정충신은 부산원에 척후병을 투입시켜 고니시 유키나가를 생포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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