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발령, 조선백성들의 들끓던 분노에 불을 붙이다

전라도역사이야기-66.나주·장성의병과 단발령
단발령, 조선백성들의 들끓던 분노에 불을 붙이다
“내 목은 자를 지언 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유생들, 상투·복장 훼손을 국가질서파괴 행위 간주
일제는 조선백성 복종심 키우려 단발령 강력 시행
유림세력 강한 장성·나주에서 의병일어나 북진계획
나주의병, 전남관찰부 안종수참서관 살해 후 거병
고종 회유·진위대출동으로 전투 없이 의병자신해산
민종렬·정석진등 의병거병자 체포·처형 피바람 불어
정석진 의로움 기리는 난파정 새로 단장돼 문화명소

단발령사진(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난파정(蘭坡亭)은 나주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난파정과 그 아래쪽 가옥 정원에는 오래된 나무와 예쁜 꽃들이 가득하다. 나주 도심 한복판에 어디 이런 곳이 있느냐 싶다. 예전의 쌀 창고를 개조해 만든 커피숍도 운치가 그만이다. 난파정 마루와 커피숍에 앉아 구한말 친일내각이 내린 단발령에 분노해 의병으로 나섰던 우리 조상들과 난파정의 주인공 정석진이라는 인물을 헤아려 보는 것도 꽤 의미 있을 성 싶다.

■구한말 광주·전남 의병이 일어난 배경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지배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일제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이던 명성황후를 죽였다. 그리고 친일정권을 세웠다. 일제가 세운 꼭두각시 김홍집 친일내각은 단발령과 의관제도의 개정을 추진했다. 갑오개혁은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벌인 사전 정지작업의 성격이 짙다.

친일정권은 1895년 11월 15일을 기해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은 상투로 상징되는 조선민족의 자존심과 민족혼을 제거시킴으로써 일본에 대한 복종심을 키우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었다. 또 조선민족 개개인이 상투를 잘라냄으로써 조선왕조에 대한 체념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으로 조선백성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국모를 시해하고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일제의 만행에 조선백성들의 의분이 끓어올랐다.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다. 단발령은 일제의 경복궁 침입이나 국모시해보다 더 폭발력이 컸다.

장성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은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머리를 깎고 보존하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깎지 않고 망하는 것이 나으며 사람치고 죽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고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장성의병의 거병

호남지방의 의병 봉기는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전남 장성에서 시작된 의병은 나주에 영향을 주었다. 역사학계에서는 1894년 후반부터 1896년 사이에 일어난 의병들을 전기의병(前期義兵)이라 한다. 호남지방의 전기의병은 전남 장성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 이후에 나주에서 생겨났다.

당시 유생들은 황후시해와 단발령, 의복개조는 성리학적 질서를 깨트리는 매우 심각한 사태로 간주했다. 그래서 호남유생들은 명성황후의 복수를 위해 힘을 모아야하며 단발령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상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영남의 예안과 안동에서 보낸 통문이 도착했다. 또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이 격문을 보내오자 기우만등 호남유림들은 창의를 모색했다.

기우만은 1895년 음력 12월 기삼연, 정의림, 고광순, 김익중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기우만은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국모 시해와 단발령에 대한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1896년 음력 2월 7일 장성향교를 도회소로, 양재사를 도회소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전기의병은 근왕을 목표로 반개화, 반외세의 성격을 띠고 일어났다.

■나주의병의 거병

당시 호남지역에서 가장 유림의 세가 큰 곳은 장성과 나주였다. 기우만의 격문을 받은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은 의병 거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96년 음력 2월 1일 의병 거병을 위한 모임이 나주향교에서 열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1896년 음력 2월 2일 나주 유생 이승수(李承壽) 등은 이상학(李鶴相)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나주의병의 구성은 장성의병과는 조금 달랐다. 장성의병이 유생들을 주축으로 해 구성된 반면 나주의병에는 유생 외에도 향리(지방관리)와 군교(軍校:군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읍성 전투에서 향리와 군교들이 큰 공을 세운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이유로 나주의병들은 농민군과 싸웠던 반동학적(反東學的) 인물이 많았다.

나주의병을 주도한 핵심인물로는 정석진·김창균·김석현·박근욱·김석균·박화실과 영광 향리 정상섭(丁相燮) 등이었다. 장성의병은 나주의병과 연합부대를 결성하기 위해 1896년 음력 2월 11일 나주로 이동했다. 이때 나주로 이동한 장성의병의 규모는 200여 명이었다. 1896년 음력 2월 14일 기우만과 이학상은 나주 김천일(金千鎰) 의병장의 사우(祠宇)와 금성산 금성당에서 출정의 예를 갖췄다. 기우만은 광주에서 호남의병들을 모아 북상할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단발령과 안종수의 죽음

나주의병의 거병은 1895년 11월의 단발령과 깊은 관계가 있다. 당시 나주 관찰부(觀察府)의 참서관(參書官:부관찰사로 지금의 부지사 격)이었던 안종수(安宗洙)는 개화파 인물로 각종 개혁에 앞장서던 인물이었다. 안종수가 나주부의 개혁을 주도했던 것은 관찰사로 임명된 인사들이 부임을 하지 않아 관찰사가 공석인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안종수는 1881년 2월 일본시찰단인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조병직(趙秉稷)을 수행했었다.이 때 그는 일본의 농업학자인 쓰다(津田仙)와 접촉, 농서를 구입해와 <농정신편>(農政新編: 1885년 廣印社 간행)을 편찬하기도 했다. <농정신편>은 서양의 근대농법을 소개한 책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대마도로 귀양 보내졌으나 친일내각이 출범한 뒤 나주부 참서관으로 오게 됐다.

안종수는 관찰사의 교체가 빈번하고 허울뿐인 인사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나주부를 장악해 실권을 휘둘렀다. 개화파 인사가 전권을 휘두르면서 나주관아를 움직였던 향리 층의 상당수는 자리를 보전하기가 힘들었다. 또 개화파의 비호를 받는 인사들이 나주의 경찰·세무 관리들로 들어와 무리하게 세금을 거둬 나주부민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안종수가 상투를 잘라내는 단발령 집행에 앞장서면서 나주 유생과 향리들의 반발이 높아갔다. 안종수는 자신이 단발을 한 뒤에 관찰사 채규상을 위협해 강제로 상투를 자르게 했다. 그리고 부하 최경판(崔敬判)으로 하여금 군졸(檢捕軍)을 데리고 나가 나주읍성 백성들의 상투를 잘라내고 짧은 머리를 만들도록 했다. 100여명의 아전과 백성들이 강제로 머리카락을 깎였다.

그런데 나주의병이 거병하면서 안종수와 그 부하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주의 향리들은 개화파 관료인 참서관 안종수와 안종수의 수족처럼 활동하던 경찰간부 박희호와 여화선을 죽이고 부하 세무시찰관 박준성과 세무주사 복정채 등 6명을 감금했다. 정석진이 해남 군수로 부임해 가던 날, 나주의병들은.안종수와 측근들을 살해했다.

나주의병의 거병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은 당시 담양군수였던 민종렬과 해남군수로 임명된 정석진(鄭錫珍)이었다. 민종렬은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동학농민군을 물리친 공을 세웠으며 1896년에는 담양군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석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의 휘하에서 도통장으로 복무하면서 농민군을 물리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장성·나주의병의 해산과 관군의 탄압

2월 11일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이 나주로 이동하여 나주향교에 집결하였다.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은‘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하는 나주의병은‘나주의소’(羅州義所)라 하기로 하고, 군사를 모아 북상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장성의병과 나주의병은 허망하게 해산하고 만다. 고종이 선유사(宣諭使)를 파견해 의병해산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나주의병은 친위대가 내려오고 선유사 신기선의 해산종용이 거듭되자 1896년 음력 2월 26일에서 27일 사이에 해산했다. 기우만은 역시 음력 2월 28일~29일 사이에 장성의병을 해산해 버렸다.

신기선과 같이 온 친위대의 책임자는 이겸제(李謙濟)였다. 그는 경남 진주(晉州)로 떠나면서 전주진위대(全州鎭衛隊)를 광주와 나주·담양 등지에 파견해 주동자를 색출,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은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거병을 주도한 인물들을 체포하고 처벌했다.

나주의병 거병을 주도했거나 지원한 인물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나주의병 거병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해남군수 정석진은 체포돼 나주로 끌려와 효수됐다. 정석진의 죽음에는 친위대를 따라온 안종수의 동생 안정수(安定洙)의 농간과 모함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주의병의 좌익장을 맡았던 김창균(金蒼均)은 총살당하고 그의 아들 김석현(金晳鉉)은 효수됐다. 영광 향리 정상섭 등도 처형됐다.

■ 정석진과 난파정

정석진의 죽음에 대해 나주백성들은 매우 원통해 했다. 1897년 전라도의 민심을 다독거리기 위해 암행어사가 파견됐을 때 정석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호소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에 정석진은 1897년 신원(伸寃)됐다. 많은 유생들과 학자들이 그의 장한 삶과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시문을 지어 위로했다.

정석진은 정우찬과 정우경, 정우권 세 아들을 두었다. 아들 정우찬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제당을 지었는데 이 제당이 나주시 나주천 1길 21(교동)에 있는 난파정(蘭坡亭)이다. 난파는 정석진선생의 호로 ‘난이 가득피어 있는 가파른 언덕’이라는 뜻이다. 난파정은 1915년 재 건립됐으나 이후 격변의 세월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몹시 퇴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난파정 아래쪽에는 정석진의 손자가 1939년에 지은 독특한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은 구들장 난방 한옥을 기반으로 해 지붕과 창문구조는 일본풍으로, 왼쪽 사랑채는 삼각창과 육각창 등이 나 있는, 아름다운 서양건축 풍을 혼합해 지은 것이다. 집을 설계·건축한 이는 박영만이었는데 그는 원래 은행가였다.

최근 난파정과 목서원은 크게 변했다. 중견 사업가 남우진씨가 목서원을 비롯 난파정 일대 3천600여 평을 매입해 숙박과 공연·전시·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으로 꾸민 것이다. 남우진씨는 지난해 정성을 들여 난파정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새롭게 단장된 난파정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나주 목서원이면서 문화복합공간인 ‘3917마중’은 국도 1호선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다. 나주향교와 담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1950년대 한수재가 조성되기 전에는 난파정 앞으로 물이 굽이굽이 흘러갔다고 한다. 옛날에는 난파정 앞을 거쳐 금성산으로 올라가는 계곡이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로 광주~목포 간 고속화도로가 뚫리면서 지세가 헝클어져버렸다.

예전에는 금성산 자락과 난파정이 한 몸이었는데 지금은 한 가

새롭게 보수단장돼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는 난파정
난파정앞에서 남우진씨(우측)가 건물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주 목서원에 있는 가옥. 1939년에 지은 한식과 일본식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물이다.

운데로 찻길이 나버렸으니 예전의 정취를 찾기 어렵다. 많은 이들이 지맥이 끊겨져 버렸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육교를 세워 난파정에서 한수재로 이어지는 통로를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도움말/홍영기, 남우진

사진제공/정성길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복원 되기전의 난파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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