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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1장 무장의 길 <229>

적병에게 기밀이 탄로가 나 전술에 차질이 빚어진 것을 알고 정충신이 김명원 도원수에게 밀지를 보냈다.

-고니시의 생포는 기밀 누설로 실패했습니다. 내부 밀자의 밀고가 있는 바, 철저한 수사로 이를 가려낼 것입니다. 현재 왜군부대는 전쟁피로증에 싸인 나머지 군력소모를 줄이기 위해 정규전에서 소규모 유격전으로 전환했습니다. 첩자와 간자들의 활약상이 강화되어 아군상황에 대처하는즉, 아 병력은 이를 역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명의 낙상지 장군과 함께 모란봉, 보통강, 용악산 방향으로 진격한다고 정보를 내놓고, 본래의 평양성 진격로로 돌격하는 것입니다.아의 척후병력이 적의 후방을 교란시킬 것인즉, 이때 평양성을 총진격하기 바랍니다.

뒤이어 정충신은 수색대원들을 불러 명령했다.

“적병들이 주변 산에 산개해 있을 것이니 주변을 샅샅이 살펴라. 적 사령관이 역원에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적들도 우리의 위계(僞計)을 알아차린 것이다. 적들은 인근 산에 정탐병을 풀고, 지원병을 깔아놓았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산등성이에 적병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산은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어지간한 미물의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보병전 때와는 다를 것이다.”

정충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매복 기습전이라면 자신감이 있었다.

본래 왜군은 보병전에 최강의 전투력을 갖고 있었다. 보군(步軍)은 일본군의 주력이었다. 평야지대에서 개별 전투력과 조직 연대를 갖춰 군마와 함께 조총과 칼을 휘두르며 뿌연 바람을 일으키며 돌격해올 때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반면에 조선군은 보잘 것이 없었다. 전쟁 경험이 없는 데다 보졸(步卒)들도 여기저기 주워모아 긴급 편성하여 전투지역에 투입한지라 바람따라 휩쓸려 다니는 흙먼지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닐 뿐, 군대라고 할 것이 없었다. 이런 지리멸렬한 군사력 때문에 동래성 싸움에서부터 탄금대 전투, 상주전투, 진주성 싸움(2차전), 수원전투, 용인전투, 임진강 전투, 평양성 1,2,3차전 모두 연전연패했다.

그러나 무패를 자랑하던 왜군 병력이라고 해도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가 있었으니, 전라도의 이치·웅치전이었다. 왜병은 산악 유격전에서만은 서툴렀다. 이치·웅치전에서 정충신은 유격전으로 전과를 올렸다. 적정을 탐지해 매복했다가 기습적으로 타격하는 전법은 산악지대에 맞는 전술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적병을 묶어두는 데는 이것 이상 좋은 전법이 없었다. 대장 권율, 선봉장 황진, 후군장 황박, 기병장 권승경, 편비장 공시억과 위대기 장군이 군사를 지휘하는 가운데 정충신은 진산에 진을 친 고경명의 의병부대와 권율 관군 사이를 오가며 적진을 교란했다.

웅치전투에서는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김제군수 정담, 해남현감 변응정 부대와 연합하여 깊은 산 지형을 이용한 매복 유격전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6번대의 별군을 묶어버리니 호남을 지킨 바탕이 되었고, 임진왜란 전세를 뒤집는 근본이 되었다. 이것이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육상전 승리였다.

정충신의 유격 전술은 평양 서북쪽 부산원 인근 험준한 산에서 다시 발휘되었다.

“왜군 척후부대를 싸그리 뽀사부러라. 정보선(情報線)이 차단되면 적병은 꼼짝 못할 것이다.”

익숙한 지형에서 매복해 펼치는 기습전은 아군에게 백번 유리했다. 정충신이 매복 조장 차막돌을 불러 지시했다.

“우리가 놈들을 격멸하면 칠성문 쪽 왜군 진지를 고립시킬 수 있다. 보통문 방향도 마찬가지다. 다만 왕성탄은 열어두어라.”

“왜 그렇습니까.”

“그곳은 물이 얕은 곳이니 퇴로를 열어두어야 한다. 도망가는 놈 등뒤에 칼꽂을 필요는 없다.”

그는 강물의 흐름을 이용할 생각을 했다. 왕성탄은 부벽루 아래 능라도 가까운 나루터 동편에 있었고, 대동강물은 가을철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풍부했다. 임진년 6월 8일 왜군은 대동강 남안에 들어와 진을 친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원수 김명원은 이를 보고 적이 지친 나머지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고 6월 14일 영원군수 고언백, 벽단첨사 유영경 등으로 하여금 적을 기습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황해도에서 응원군으로 들어온 구로다 군에게 고립돼 포위되었다. 조선군은 황급히 왕성탄 퇴로를 찾아 평양성내로 되돌아왔다. 이때는 가뭄이 들어서 수심이 얕았다. 이를 본 왜군은 그대로 왕성탄을 건너 평양성으로 밀려들었다. 조선군은 영변으로 후퇴하고, 무혈입성한 왜군은 조선군이 비축해둔 군량 10만석으로 배불리 먹으며 평양을 지배했다. 왜 장수들은 평양 기생이 물리면 민간 부녀자를 잡아다 음행을 저질렀다.

정충신은 이것들을 왕성탄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놈들은 수심이 얕은 줄 알고 왕성탄으로 후퇴할 것이다. 이때 낙상지 장군의 기마부대가 일격에 몰아붙이면 저들은 대동강물에 수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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