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68.구례 화엄사
마음을 빼앗는 절, 화엄사…대웅전 뜰에서 심쿵, 차 맛에 심쿵
보제루 지나 마주하는 대웅전·각황전 웅장함에 화들짝
신라 연기대사 창건, 임진왜란 때 불타 벽암대사 중창
넉넉한 지리산 닮은 사찰, 큰 도량이면서 호국의 산실
호젓한 구층암…마음 내려놓고 스님과 차 한 잔의 여유

 

화엄사 대웅전, 각황전 뜰.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규모가 매우 크다. 균형미 역시 뛰어나다.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이다. 건축기법이 매우 뛰어난 건물이다.

지리산은 참으로 넓은 산이다. 남도 땅 대부분에 자신의 몸을 부려놓고 있는 산이다. 그래서 지리산에는 살았던 사람들,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취가 지천이다. 이런 이유로 지리산은 심상치 않다. 무심한 계곡과 산 능성이, 돌 하나에도 사연이 담겨 있다. 지리산의 바위에는 억겁이 담겨 있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는, 긴 세월동안 무어라 속삭이던 바람의 하소연이 묻어있다. 그래서 지리산은 ‘마음으로 걸어야 제대로 걷는’ 산일지도 모른다.

돌멩이 하나에도 사연이 가득한 지리산인데, 하물며 지리산 형제봉과 차일봉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 두 개를 좌우에 두고, 턱하니 오지게도 넓게 들어서 있는 화엄사는 어쩌겠는가? 화엄사를 세운 고승의 족적과 임진·정유재란의 와중에 불타버린 참화, 목숨을 바치는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왜군을 막기 위해 죽창 들고 석주관으로 올라가던 화엄사 승병들,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 왕의 자리에 앉았던 조선왕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화엄사가 지니고 있는 설화와 전설은 화엄사의 불력이 상당함을 내비치고 있다. 실제 수많은 고승들이 화엄사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을 설파했고 또 실천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큰 절에 합당한 가르침과 정진으로 많은 스님들이 깨우침을 얻고 있다. 그래서 화엄사는 범상치 않은 절이다. 화엄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가르침과 깨우침이 더 많은 곳이다. 마음으로 헤아려야 하는 곳이고, 사연을 알아야 제대로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랴, 일반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이는 법이다. ‘나들이를 온 사람들’에 화엄사 방문은 그냥 가벼운 산책길이다. 매표소에서 차를 타고 휭 하게 일주문까지 올라오기에, 마음을 여는 그 과정이 생략되는 것도 원인일 것이다. 예전에는 산문 밖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열고, 계절 따라 변하는 나뭇잎의 색에 눈을 열고,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을 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구경길이 바쁘다.

대개는 화엄사가 지니고 있는 국보와 보물, 천연기념물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오래됨과 웅장한 건물·석탑의 규모에 휘둥그레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인들은 화엄사 초입에서 일주문~금강문~천왕문~보제루를 거치는 동안 그냥 심상하게 여러 당우들을 바라만 볼 뿐이다. 그렇지만 화엄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보물이고 국보다. 주초와 기둥 하나하나마다, 심지어 홍매화 한그루에도 절절한 사연이 있다.

그래서 화엄사는 마음으로 봐야 제대로 보이는 사찰이다. 그렇지만 화엄사가 초행이라면 그런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만약 화엄사를 둘러볼 예정이라면 미리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사전연구를 하는 것이 좋다. 현지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구례군에 미리 연락하면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그러면 화엄사 구석구석과 당우 하나하나를 마음으로 볼 수 있다.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지리산 화엄사 현판

화엄사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에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화엄사에서 밝히고 있는 창건 및 중건 역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연기조사께서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에서 문수보살님의 현몽으로 비구니 스님이신 어머니를 모시고 지금의 화엄사에 가람을 최초로 지으셨다. 연기조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화엄학을 전파하신 스님이시다. 백제 법왕 때 화엄사상의 중심도량으로 크게 번성하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742~746)때에는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 세계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이후 신라시대에 중국에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화엄사를 크게 중건하여 1장6척의 높이의 불상을 봉안한 3층 추정되는 장륙전(지금의 각황전)을 지었다. 신라 말 도선국사 때 총림으로 승격되었고 조선 인조 때 벽암선사가 복원불사를 일으켰다. 숙종 때 계파선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장륙전을 다시 건립하여 각황전이라 명하여 선과 교를 통섭하는 대가람으로 발전시켰다.

근래 6·25이후 지리산에 숨어있던 빨치산 잔당의 은신처라며 화엄사를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차일혁 경무관의 불심으로 어간문 두 짝만 태워 천년이 넘는 역사적 한국불교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도광스림의 원력으로 지금의 대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다’

화엄사 창건에 대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중관대사 해안(中觀大師 海眼)이 1636년(인조 14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등의 사적기에는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나타나 있다.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천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돼 있다.

그러나 화엄사 창건·중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은 지난 1978년 신라 경덕왕 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되면서 대체로 가닥이 추려진 상태다. 이 사경의 발문에 따르면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였다. 754년(경덕왕 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해 이듬해 2월 완성시켰던 실존 인물이다. 이를 참고해보면 창건 연대는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로 보인다.

<사지>(寺誌)에는 화엄사 규모와 역사에 대해 ‘당시 화엄사는 가람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 사찰로 이른바 화엄 불국세계(佛國世界)를 이루었다고 한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했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 중수를 거쳐 보존돼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하고 승려들도 학살당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창건내용과 주체가 조금씩 다른 것은 어느 사찰이든 고찰(古刹)과 고승(高僧)을 내세우려 하기 때문에 빚어진 일로 보인다.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구례 화엄사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라 경덕왕 13년(754) 황룡사 승려 연기조사의 발원으로 건립된 화엄종 사찰로 ‘도선국사’가 도참설에 의해 중창하였고, 조선시대 ‘벽암각성’의 중창 이후 선·교 양종 총림의 대도량의 역할을 하였다.

대웅전과 누문을 잇는 중심축과 각화전과 석등을 연결하는 동서축이 직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함 가람배치를 갖추고 있으며, 경내에는 국보 제67호 ‘화엄사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8점 등 중요 문화재가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서 적은 대로 화엄사는 각황전(覺皇殿)이 중심이 돼 가람배치가 이뤄졌다. 대개의 절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다르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다. 화엄사의 주요문화재는 국보로는 제12호 석등(石燈),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제67호 각황전이 있다. 보물로는 제132호 동 오층석탑(東 五層石塔), 보물 제133호 서 오층석탑(西 五層石塔), 보물 제300호 원통전 앞 사자탑(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金井庵)·지장암(地藏庵)이 있다.

■화엄사 일주문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가운데 첫 번째 문을 말한다.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에 지붕을 얹는 형식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다. 네 기둥에 지붕을 올리는 다른 가옥 형태와 다르다. 일주문을 경계삼아 속세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모든 사찰에는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에는 문이 없다. 그냥 열려 있는 문이다. 그렇지만 화엄사 일주문에는 특이하게도 문이 있다. 대개의 사찰에는 천왕문에 세상세계의 악귀가 부처님의 정토(가람)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사천왕이 있다. 사천왕은 마귀나 세상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을 발로 짓밟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자세를 생령좌(生靈座 혹은 정령좌)라 한다.

혹 어떤 사찰에서는 천왕문 기둥 아래 악귀나 악명 높은 사람들을 깔려 있는 모습으로 두고 있다. 사람부터 아귀축생(餓鬼畜生)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을 대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법주사 천왕문에는 동방지국천의 발밑에 깔려 있는 악귀를 볼 수 있다. 화엄사의 일주문의 문은 악귀가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는 의미다.

그런데 임진·정유재란과 병자호란 이후 천왕문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악귀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법주사 천왕문에 있는 두 개의 악귀 중 앞의 것은 청나라 군사를 의미하고, 뒤의 것은 일본 풍신수길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조선 전역이 일본군과 청군에 의해 초토화되고 승병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화엄사 일주문에 달려 있는 문짝도 마찬가지 성격이지만 한 가지의 의미가 더 있다고 한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는 “승병들이 군사훈련을 했던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호국불교의 본산으로서의 화엄사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문짝이라는 것이다.

일주문의 문짝에 일본과 청나라 군사에 맞서 죽창을 들고 나서던 호국승병들의 의로움이 담겨있다니…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정유재란이 벌어진 1597년 11월 하순 왜군은 석주관 일대의 구례의병을 공격했다. 구례의병은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화엄사는 의승병 (義僧兵)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보내 왜군과 싸우도록 했다.

500여명의 구례의병과 화엄사 승병이 지키고 있는 석주관을 1만여 명의 왜군들이 조총을 쏘며 공격해왔다. 구례의병과 승병은 혼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구례의병과 승병은 모두 순절했다. 석주관은 호국의 현장이다.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흔적이 화엄사 일주문 문짝에 담겨 있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될 장소다.

화엄사 벽암 국일도 대선사비

일주문에 있는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 편액은 선조의 여덟 번 째 아들인 의창군 광(珖)의 글씨다. 의창군의 글씨는 대웅전 편액에도 남아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벽암대사(碧巖大師;1575-1660)의 공덕을 기리는 벽암국일도대선사비가 자리하고 있다. 벽암대사의 속성(俗姓)은 김(金)씨, 법명은 각성(覺性), 자(字)는 징원(澄圓)이다. 호(號)가 벽암(碧巖)이다. 임진왜란 때는 스승 부휴선수(浮休善修;1543-1615)를 따라 영남과 호남의 내륙에서 의승군 으로 활동했다.

1624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하도록 도왔다. 남한산성 축조 당시 절반은 벽암대사가 이끄는 스님들이, 나머지 절반은 관이 동원한 민간인들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님들이 맡은 구간의 공사가 훨씬 더 진척이 빨랐다. 벽암대사의 지도력이 그만큼 남달랐고, 스님들의 용력 또한 컸다는 것을 뜻한다.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 안내문에는 벽암대사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벽암대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성하는 등, 조선 후기 사회에서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공헌하였다. 또한 전란 후에는 화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법주사 등의 여러 사찰의 중수를 주도하여 조선 후기 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금강문(金剛門)과 천왕문(天王門), 보제루(普濟樓)와 종루(鐘樓)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다. 금강문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이 안치돼 있다.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인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화엄사 보제루는 법요식 때 승려나 불교신도들의 집회를 목적으로 지어진 강당 건물이다. 지금은 화엄사 방문객들의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 보제루에서 눈여겨 봐야할 곳은 ‘그랭이질’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바위에 나무를 맞춰 세운 기둥이다.

보제루 옆에는 종루가 있다. 종루에는 사물(四物)이 있다. 수생생물을 의미하는 목어, 날짐승을 상징하는 운판, 네발짐승을 뜻하는 법고, 인간의 깨우침을 일컫는 범종이 있다. 화엄사 범종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일본으로 가져가다 용두마을 앞의 섬진강에 빠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두는 범종의 머리 부분을 일컫는 말이기도 해 범종이 빠진 마을이라 해서 용두마을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범종 옆에는 종을 쳐서 소리를 내는 당목이 있다. 종의 고리에 있는 용(포뢰,蒲牢)과 고래형상의 당목은 한 묶음이다. 포뢰는 용의 셋째 아들인데 고래를 몹시 무서워해 고래만 보면 크게 울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고래’ 이름은 두드린다는 의미의 ‘고’(叩)자에다 포뢰의 ‘뢰’자를 붙여져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바다에 사는 거대한 동물을 일컫는 고뢰가 고래로 변했다는 것이다.

용에게는 아홉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명(明)나라의 호승지라는 사람이 쓴 <진주선>(眞珠船)에는 용생구자(龍生九子)의 임무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문화재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에 대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어서 소개해본다.

1)거북이를 닮은 비희는 짊어지는 걸 좋아해 비석이나 주춧돌 아래에 두어 무거운 돌이나 집을 떠받치게 했다.

2)짐승을 닮은 이문은 불을 끄는 능력이 탁월해 건물의 용마루에 둔다.

3)고래를 무서워해 큰 소리로 울어대는 포뢰(蒲牢)는 종을 매다는 고리에 둔다. 그러므로 종소리를 크게 내려면 고래 고기 형상을 한 당목으로 종을 치면 된다.

4)호랑이를 닮은 폐안은 정의의 사도이니 감옥이나 법정의 문에 둔다.

5)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도철은 정이나 종에 새겨 식욕과 탐욕을 경계한다.

6)물을 좋아하는 공복 다리 기둥이나 아치에 새겨 악귀를 막는다.

7)피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애자는 칼의 코등이나 자루, 창날 부분에 새긴다.

8)불과 연기를 좋아하는 산예는 향로에 새긴다.

9)초도(椒圖)는 소라처럼 몸을 움츠리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문을 닫는 용도의 문고리에 장식한다.

■ 대웅전과 각황전

화엄사 대웅전 현판

화엄사를 안내했던 임세웅씨는 보제루 곁의 계단을 지나 작가 일행을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대웅전 쪽으로 걸어오도록 했다. 대웅전을 가리고 있는 보제루 옆쪽을 빠져나오는 순간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너른 마당도 마당이려니와 맞은편에 웅장하게 들어서 있는 각황전, 그리고 대웅전에 순간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제루는 흥미와 기대를 높이기 위해 화엄사 중심 가람을 살짝 가리고 있는 정교한 무대장치랄 수 있다. 관람객들은 보제루의 벽에 막혀 대웅전 뜰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물과 석등, 석탑들을 전혀 볼 수 없다. 그런데 불과 몇 발자국을 걸어 들어오면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건물과 큰 규모의 석탑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화엄사 대웅전

대웅전 뜰에서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움이 거기 있었기’때문일 수 있다. 혹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의 당우와 석탑들이 그곳에는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대웅전 우측으로는 영전과 명부전이, 각황전 옆에는 원통전과 나한전이 비켜서 있는 듯, 혹은 까치발을 하고 있는 듯, 자리하고 있다.

사찰 당우에 어울리는 표현일지는 망설여지지만 ‘위풍당당’한 대웅전과 각황전을 배경으로 해서 동서로 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과 석등(石燈)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무언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준다. 규모와 가람배치가 매우 인상적이다. 대웅전 뜰에 서서 한참을 서 있으면서 전체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다.

화엄사 각황전 현판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규모가 매우 크다. 균형미 역시 뛰어나다.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화엄사 각황전과 석등 사자탑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이다. 건축기법이 매우 뛰어난 건물이다. 수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각황전은 단청이 벗겨져 있어 나무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각황전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의상조사가 장육금신(부처의 몸)을 모시는 곳이라 해 장륙전(丈六殿)이라 했다.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조선 숙종(1600~1702년) 때 계파대사에 의해 새로 지어졌다. 이때 임금을 깨닫게 해준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각황전(覺皇殿)이라 부르게 됐다. 여기에는 계파대사가 장륙전을 중건할 때 불사를 맡긴 공양주 스님과 숙종의 딸로 환생한 어떤 노파에 대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공양주 스님이 각황전 지을 돈이 없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어떤 노파가 늪에 뛰어들어 목숨을 시주한 뒤 공주로 환생하고 이를 알게 된 숙종이 각황전 지을 돈을 하사했다는 내용이다.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화
각황전 옆 홍매화 때문에 화엄사를 찾는 이들이 많다. 화엄사는 말 그대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셈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에 빗대 ‘견홍매화망각황전’(見紅梅花忘覺皇殿)이라는 말이 생길 법하다. 그런 지적을 받는다하더라도 각황전 홍매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핑계가 있다. 전국 어디에서 이렇게 곱고 예쁜 홍매화를 보겠냐는 것이다.

각황전 옆에는 홍매화 한그루가 서 있다. 최근 들어 전국적으로 알려진 매화다. 3월이면 화사하게 피어난 홍매화는 대웅전 앞뜰을 눈부시게 만든다. 각황전 홍매화를 보기위해 화엄사를 찾는 이들이 생길 정도다. 말 그대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셈이다. 견지망월(見指忘月)에 빗대 ‘견홍매화망각황전’(見紅梅花忘覺皇殿)이라는 말이 생길 법하다. 그런 지적을 받는다하더라도 각황전 홍매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핑계가 있다. 전국 어디에서 이렇게 곱고 예쁜 홍매화를 보겠냐는 것이다.

여간해서는 화엄사를 찾기 힘든 사람들을 홍매화가 불러들이니 이 또한 부처님의 공덕이다. 그런데 이 홍매화에는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숙부인 최씨의 사연이 깃들어있다. 숙부인 최씨는 사극을 통해 잘 알려진 동이다. 숙부인 최씨는 숙종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연잉군이 화를 당할까봐 항상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 항상 부처님께 공덕을 들이며 아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래서 숙종을 움직여 각황전을 짓도록 했다는 것이다.

연잉군은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바로 영조다. 화엄사 스님들은 숙부인 최씨 덕분에 그토록 염원했던 각황전 중건이 이뤄지자 감사의 표시로 각황전 곁에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홍매화다. 홍매화에는 숙부인 최씨가 아들 연잉군의 무사함을 부처님께 의지했던 불심(佛心)과 화엄사 스님들의 감사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초겨울에 보는 홍매화는 많이 야윈 모습이다. 그러나 제 속으로는 겨울의 한기를 봄의 향기로 뿜어낼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겨울철에도 아름다운 홍매화다.

화엄사 양비둘기와 신라인의 미소가 새겨진 수막새

각황전과 대웅전에는 양비둘기 20여 마리가 부지런히 넘나들고 있다. 양비둘기는 일명 낭비둘기, 굴비둘기 등으로 불리고 있는 텃새다. 2017년 12월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으로 지정됐다. 제주도와 거제도 등 해안지방에서 20~30마리 씩 무리지어 다니는데 내륙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일대에서 살고 있다. 토종텃새 임에도 양비둘기라는 이름 때문에 외래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화엄사 양 비둘기

화엄사에서 양비둘기는 신통한 새로 여겨지고 있다. 화엄사 대웅전 앞뜰에서 이런저런 행사가 벌어질 때면 어수선하게 날아다니지 않고 얌전하게 처마나 지붕위에 앉아 행사를 지켜본다고 한다. 양비둘기들을 사진에 담아보니 마침 그 배경이 ‘신라인의 미소’를 새겨 넣은 수막새다. 넉넉한 얼굴에 웃는 모습인 수막새 앞의 양비둘기가 정겨워 보인다.

화엄사 대웅전, 각황전 처마에 깃들어 있는 양비들기를 보는 것은 화엄사방문의 덤이다. 화엄사가 간직하고 있는 유물중 유명한 것중의 하나가 영산회 괘불탱이다. 영산회 괘불탱은 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이다. 해남 미황사의 괘불과 크기가 비슷하나 너비에서 화엄사 탱화가 조금 더 넓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됐다.

■구층암(九層庵)

구층암 모과나무 기둥

화엄사를 찾는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대웅전과 각황전 일대를 둘러본 뒤 발길을 돌리기 일쑤다. 그러나 대웅전 뒤에는 꼭 들려 봐야할 곳이 있다. 구층암이다.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살려 툇마루 앞의 기둥으로 삼은 것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있는 그대로,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부러뜨리지 않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아낌을 엿볼 수 있다.

구층암 덕제스님

구층암은 천분의 부처님, 자연주의 건축, 야생차를 트레이드 마크로 내세우고 있다. 천분의 부처님은 구층암 뒤쪽의 천불보전을, 자연주의 건축은 나무의 생김새를 그대로 살려낸 툇마루의 휘어진 기둥을, 야생차는 구층암 뒤쪽 야산에 자리한 야생차밭에서 만들어낸 차를 뜻한다. 화엄사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매력이다.

구층암 전경

구층암에는 깊은 맛의 차를 대접하면서 부처님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지혜를 전하는 덕제(德濟)스님이 계신다. 방문객들의 이런저런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대꾸하는 말인데도 울림이 있다. 덕제스님이 내주는 향기로운 차와 전해주는 말씀에 마음이 열어진다. 구층암은 숫자 구(九)가 완성을 의미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시작을 의미하는데서 비롯됐다. 구층암이 강원으로 사용됐음을 감안하면 구층암은, 부처님의 말씀은 경계가 없고 정진 역시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화엄사 공양 하러가는 스님들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는 화엄사 방문객들이 구층암 일대의 풍경과 차를 즐길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있다. 구층암을 들려야 제대로 된 화엄사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 곳에서 모처럼 짬을 내 화엄사를 찾는 분들이라면 사전에 구례군에 전화를 해서 임세웅씨와 같은 문화해설사와 동행하기를 권하고 싶다. 화엄사의 구석구석을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해설이 곁들여지면 보는 재미, 듣는 재미가 수백 배나 좋아진다.

화엄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구례군 문화해설사 임세웅씨

도움말/임세웅, 김인호

사진제공/위직량, 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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