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69.서산대사의 유물에서 발견된 황금십자가

이게 웬일? 서산대사 유물에서 발견된 16세기 황금십자가

임진왜란 당시 왜 종군했던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의 것

왜군과 강화 협상했던 사명대사가 받아 스승에게 전달 추정

대원사 현장스님 “서산대사와 세스페데스 직접 대면 가능성”

1604년 작성 ‘서산대사 유물 목록’에 ‘십자패(十字佩)’로 기록

1927년 서산대사 유물정리 중 ‘황금십자가’ 발견 이목 집중

1974년 8월 8일 도난, 금은방 주인 장물인 줄 알고 녹여버려

해남대흥사 서산대사유물중 황금십자가. 1974년 8월 8일 도난당했다. 매우 귀중한 것이었으나 금은방 주인이 장물인 줄 알고 녹여버려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 서산대사의 유물에서 나온 황금십자가

과거 대흥사에 보관돼 있었던 서산대사 유물 중에는 황금십자가가 포함돼 있었다. 서산대사 유물 중에 십자가가 있다니? 누구나 깜짝 놀랄 일이다. 조선에 천주교 신자가 공식적으로 생긴 때는 1784년 1월 말이다. 가톨릭의 공식적 조선선교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으면서부터다. 물론 그 이전 선조 말부터 조선에는 서양서적이 들어와 조선 사람들은 천주학에 대한 지식을 틈틈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산대사 휴정(休靜,1520~1604)은 조선에 첫 가톨릭 신자가 생길 때보다 180년 전 사람이다. 가톨릭을 대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따라 종군했던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라는 존재가 서산대사 유품 중에 황금십자가가 있게 된 이유다. 칠보로 장식된 황금십자가는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황금십자가는 지난 1974년 도난당하고 말았다.

이 황금십자가는 1604년에 작성된 ‘서산대사 유물 목록’에 ‘십자패(十字佩)’로 기록돼 있었다. 그런데 여러 유물 속에 끼여 있던 이 십자패는 수백 년 동안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1927년 유물 정리 중 십자패가 발견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 십자패(황금십자가)는 길이 5.9㎝, 옆길이 3.8㎝, 두께 0.1㎝로 황금 판을 서로 이어 붙인 것이었다. 십자가 앞면과 옆면이 아라베스크 계통 무늬와 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됐다. 십자가 앞면에는 INRI(유태인의 왕 나사렛 예수) 부호가 적혀있었다.

당시 1927년 12월 20일자 <매일신문>에는 ‘전남 대흥사에서 기이한 십자가 발견-대흥사에서 예수교 십자가를 발견해 순금으로 지은 고귀한 십자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매우 크게 실렸다.<매일신문>은 이 기사에서 경성제대 교수였던 오다 쇼고(小田省吾)의 의견을 인용해 ‘SV는 과연 누구, 의문의 해결은 막연-서반아(스페인)나 포도아(포르투갈) 제조품’이라는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다.

황금십자가의 원래 주인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십자가 밑바닥에 새겨져 있는 ‘SV’약호에 따라 세스페데스 신부가 주인이었던 것으로 정리됐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학설이 제기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2016년 11월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서산대사 황금 십자가 학술세미나’에서 대원사 티벳박물관장 현장스님은 “서산대사 유물 중의 십자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이견이 있지만 원래 주인은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현장스님은 ‘해남 대흥사에 서산대사 유물로 전해지는 황금십자가의 비밀’이란 주제로 발표하면서 “조선 최초로 전해진 십자가가 서산대사 유물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종교 교류역사에서 특이한 일로 기록이 없어 추정만 무성하다”며 “서산대사가 황금 십자가를 소유하게 된 것에 대해 사명대사 설, 하멜전래 설, 민간전래 설, 선조임금 하사 설, 세스페데스 전래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현장스님은 “지리산 실상사 불상 복장유물에서 400여 년 전 기독교 전례서인 ‘성무일도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책과 황금 십자가는 당시 조선을 찾은 세스페데스 신부의 것으로 추정된다”며 “서산대사와 세스페데스 신부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황금십자가와 수정염주를 교환했을 것이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날 세미나에서 대흥사 주지 월우스님은 황금 십자가를 복원해 가톨릭과 북한 묘향산 수충사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대흥사에 보관돼 있던 이 황금십자가는 1974년 8월 8일 도난당했다.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 중에 값나가는 십자가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도둑이 눈독을 들인 것이다. 대흥사 황금십자가 소문은 한국 최초의 십자가 유물이 대흥사 서산대사 유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톨릭 광주 교구가 1962년 대흥사 측에 십자가 양도여부를 타진하면서 퍼져가기 시작했다.

당시 가톨릭 광주교구는 상당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대흥사 측에 십자가 양도 여부를 타진했다. 이에 대흥사는 총무원 측에 양도 가능 여부를 문의했으나 총무원은 양도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해남 대흥사 측이 보관 중이던 황금십자가의 가톨릭 양도는 무산이 됐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 밖으로 전해지면서 황금십자가가 절도범의 표적이 된 것이다.

매일신보에 보도된 대흥사황금십자가 기사
■ 크리스마스는 언제 한국에 소개됐을까?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Christmas)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최대의 축일(祝日)로 삼고 있다. 한국에 크리스마스가 언제 소개됐는지는 정확지 않다. 그렇지만 가능성만을 놓고 따진다면 조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는 명절’의 개념을 접한 것은 1592년 임진왜란 직후 일수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 출신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인 그레고리 세스페데스는 왜군 제1군의 지휘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휘하의 병사 상당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군기(軍旗)도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가 넣어진 것이었다. 가톨릭 신부가 종군하면서 신의 가호아래 병사들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 임무는 왜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사도의 역할이었다. 그런 만큼 조선인을 상대로 한 선교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세스페데스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가톨릭 신부였음은 분명하나 조선선교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조선인을 긍휼히 여겨 선교를 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따라서 세스페데스는 단순한 종군신부였지 조선선교와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라는 축일의 존재와 의미는 17세기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구한말 조선으로 밀려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선교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경을 조선 땅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는 미국 북 장로회소속인 알렌이다.

알렌은 1884년 의료선교사로 입국해 조선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개설했다. 알렌은 미국공사관의 전속의사로 있던 중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 피습돼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생명을 구했다. 이와 함께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복음을 전했다.

그렇지만 사실은 조선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이 알렌 이전에 있었다. 중국 선교를 했던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가 1832년 조선 충남 홍성군 고대도 해안에 상륙해 한문성경과 고구마 씨를 두고 갔다. 이는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인 프랑스 신부 모방이 조선에 온 1836년보다 4년이 앞선 것이다.

또 영국런던교회의 중국주재 선교사 토머스목사가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유역에 왔다가 조선 군사들의 공격을 받는 그 위급한 순간에도 전도활동을 벌이다 순교했다. 토마스 목사는 조선개신교 역사상 첫 순교자이다.

호남지역에도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찾아와 선교활동을 벌였다. 미국 남장로교 소속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목사가 1894년 3월에서 5월까지 전라도 답사여행을 했다. 레이놀즈 목사와 벨(Eugene Bell: 배유지) 목사는 1896년 2월 선교 부지를 구입하기 위해 목포를 방문했다. 이후 배유지 목사와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Owen:오원, 오기원) 등은 목포와 광주 등지에서 선교를 하며 조선인들의 교육과 질병퇴치에 생을 바쳤다.

미국, 캐나다 선교사들의 전도 때문에 개신교 신지들의 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그만큼 성경보급도 많아졌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노력에 따라 조선에는 39개의 미션스쿨이 세워졌다. 1903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YMCA)가 창설돼 민족청년운동의 요람이 됐다. 개신교 신자들의 확산과 성경보급으로 크리스마스라는 성탄일의 존재가 더욱 널리 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나주 노안 이슬촌마을 담벽에 그려진 산타
■ 조선에서의 ‘성탄’(聖誕)이라는 단어 등장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1880년에 편찬한 <한불자전>(韓佛字典)에 ‘성탄’(聖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언더우드 목사가 헐버트(Hulbert)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1890년에 펴낸 <영한자전>에는 Christmas가 ‘예수의 탄일, 예수의 생신’이라고 설명돼 있다. 기독교 신자였던 윤치호(尹致昊)는 일기를 꾸준히 썼는데 그의 일기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1885년 12월 25일자 윤치호 일기에는 ‘일찍 취침한 탓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다음날인 12월 26일자 일기에는 ‘저녁 때 일본 사탕과자 1갑을 사 홍편자(紅扁子) 종이에 싸서 본넬 선생에게 선사하고 새해 하례하는 정을 표했다’고 적었다. 이런 표현은 윤치호가 크리스마스를 예수 성탄을 축하하는 날보다는 ‘신년하례’를 나누는 정도의 기념일로 생각했을 것이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런데 1886년 12월 25일자 일기에는 ‘오늘은 예수 성탄일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1887년 12월 25일 자 일기에는 ‘예수성탄이라 오전 경과는 정지하고 다만 설교만 하다. 본넬 선생이 성탄 정표로 책 한 권 주다. 립 아가씨가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 주다’라고 적혀 있다. 2년 전만 하더라도 12월 25일을 ‘신년하례를 미리 나누던 날’ 정도로 인식했던 윤치호가 1년 뒤에는 성탄일로 인식한 것이다. 또 크리스마스 선물과 카드도 받고 있다.

따라서 1880년대 후반에 이미 개신교를 접한 조선 지식인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축일이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성탄일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왜냐면 ‘절’(節)이 붙은 국경일 명칭은 왕이나 황제에게 해당될 때만 사용될 수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성탄일(聖誕日)로 번역돼 사용됐다.

조선인을 위한 첫 장로회 성찬식은 1897년 12월 서울 정동교회 성탄절 주일예배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조선에서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스크랜턴 선교사가 이화학당 소녀들을 위해 만든 것이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로 알려졌다. 조선에서 첫 번 째로 산타클로스복장을 하고 나선 이는 아펜젤러 선교사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조선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는 ‘성탄수(聖誕樹)’로, 산타클로스는 ‘샌터크로스 늙은이’로 통하기 시작했다.

성탄일은 1890년 후반부터 신문에 등장한다. 종교적 의미보다는 ‘세계적 명절, 혹은 국왕의 강녕을 기원하는 특별한 날’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독립신문’(한글판) 1896년 12월 24자 1면에는 “내일은 예수 크리스도의 탄일이라 세계 만국에 큰 명일이니 내일 조선인민들도 마음에 빌기를 대군주폐하와 황태자 전하의 성체가 안강하시고 나라 운수가 영원하며 조선전국이 화평하고 인민들이 무병하고 부요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정성으로 빌기를 우리는 바라노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크리스마스(Christmas)는 ‘예수 크리스도의 탄일’이라고 번역됐다. 그런데 조선황제와 황태자의 건강과 국운융성을 기원하는 내용이어서 크리스마스를 종교적인 시각이 아니라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적 의식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0년 정도 지난 기사에서는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종교적 의미로서의 성탄일로 자리잡아가고 또한 성탄일을 휴일로 지내고 있음이 나타난다.

<대한매일>1907년 12월 25일자 2면에는 ‘성탄 휴간’이라는 제목으로 “본 일은 예수이 탄일인 고로 량일을 휴간홈”이라는 사고(社告)가 실려 있다. 또 <대한매일> 1908년 12월 25일자 2면의 ‘잡보 /외방통신, brief/local items’에도 ‘성탄휴간’이라는 제목으로 “본일은 구세주 탄신인고로 경축하기 위하야 이일간 휴간홈.”이라는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매일신보> 1913년 12월 25일자에는 “오늘은 야소탄강제일이다. 서양풍속에 이전 날 저녁에 ‘싼타클루스’라는 노인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긴 버선에 여러 가지의 장난감을 넣어 어린 아해의 자는 사이에 두고 간다 하나니 서양의 어린 아해는 해마다 이날을 제일히 깃겁게 여기며 싼타클루스가 주었다고 어른이 자는 사이에 갖다 놓은 것을 가지고 노나니라.”는 기사가 실렸다.



■ 크리스마스 씰(Seal)

조선에서 크리스마스 씰이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1932년 12월부터이다.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셔우드 홀은 1926년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왔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홀은 캐나다 출신 의사이자 목사였다. 그는 조선선교를 위해 1891년에는 평양에 도착해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그에 앞서 1890년 캐나다 출신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가 조선에 입국해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윌리엄은 로제타와 결혼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은 청일전쟁 당시 만연하던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에 걸린 조선인 환자들을 치료하는데 몰두하다가 건강을 해쳐 조선에 온지 3년만인 1894년 11월 24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불과 34세였다. 남편을 잃은 로제타 셔우드는 겨우 돌을 지난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 아들이 셔우드 홀이었다. 당시 그녀는 임신 7개월의 몸이었다.

1897년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에디스를 데리고 다시 조선에 들어와 의료선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남편 윌리엄을 기념해 평양에 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이 기홀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이다. 아들 셔우드 홀은 어머니 로제타와 함께 평양에서 살다가 18살 때인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마운트 유니온대학을 거쳐 토론토 의과대학에 진학한 뒤 의사가 됐다.

셔우드 홀은 역시 의사였던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교사가 돼 1926년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셔우드는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면서 해주 의창학교 교장 직을 겸임했다. 셔우드는 많은 조선인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결핵퇴치를 자신의 중요한 사명으로 삼았다. 마침내 그는 1928년 조선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구세요양원을 해주 교외 왕신리에 설립했다.

셔우드는 그 뒤 결핵협회(The Tuberculosi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의료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씰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크리스마스 씰의 기원이 된 것이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에는 2대에 걸쳐 조선인을 위해 헌신했던 홀 가문 선교사들의 사랑이 담겨있다.

셔우드 홀은 1940년까지 14년 동안 조선에서 봉사하다가 일제의 강요로 조선을 떠나 인도로 갔다. 그는 인도에서 23년간 선교사로 봉사한 뒤 1963년 은퇴했다. 셔우드 홀은 1978년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이 자서전은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이란 제목으로 역간됐다. 셔우드 홀은 1992년 9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서울로 옮겨져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1934년 크리스마스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것이다.
셔우드가 씰을 발행할 때 도안을 그려준 이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다. 키스는 1934녀과 1936, 1940년 세 차례에 걸쳐 크리스마스 씰을 도안했다. 1934년에 키스가 그린 도안은 아픈 아기를 업고 있는 조선여성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렸다. 키스는 목판화로 된 이 그림에 자기의 이름을 기덕(奇德)이라 표기했다. 자신의 영문 미들네임인 Keith의 음을 딴 것이지만 자시느이 그림이 크리스마스 씰 도안으로 사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기적적인 덕’을 희망한다는 차원에서 기덕이라 적었을지도 모른다.

키스는 1915년부터 한국과 일본,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면서 자연과 인물을 소재로 수채화와 판화 작품들을 남겼다. 1919년 3월 말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인과 한국의 문화·자연에 깊은 애정을 느끼고 이를 작품에 담았다.

그녀의 작품은 매우 사실적이고 화려해 당시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키스는 서양인 최초로 1921년과 1934년에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해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는 1928년 출판된 <동양의 창>(Eastern Windows)에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이라는 수채화 작품을 수록했으며 이 작품을 일본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키스는 동생 엘스펫 K. 로버트슨 스콧(Elspet K. Robertson Scott)과 함께 한국을 여행하면서 그림과 글을 남겼다. 그림은 키스가, 글은 동생 엘스펫이 썼다. 키스는 평생을 미혼으로 살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1956년 세상을 떠났다. 키스는 살아생전 동양을 다시 방문하기를 희망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매우 아쉬워했다.

키스 자매의 한국에 대한 그림과 글은 1946년 영국 허치슨 출판사가 <올드 코리아, 고요한 아침의 나라>(Old Korea, the Land of Morning Calm)라는 제목으로 출간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 책에는 키스가 제작한 총 39점의 그림과 동생 엘스펫의 설명문이 함께 수록돼 있다. 책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의 전통풍습과 문화,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키스는 그 어떤 서양의 화가들보다 더 많이 한국의 자연과 인물을 작품에 담았다. 키스의 수채화, 작품들은 우수성과 희귀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국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던 송영달 교수가 키스의 작품들을 우연히 발견하고 수집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송 교수는 일제치하 한국인의 생활상과 자연을 그린 키스의 작품과 동생의 글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매의 작품과 방문기를 모아 지난 2006년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1920~1940>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올드코리아>에 실린 39점 작품 외에 송교수가 수집한 27점이 더해져 모두 66점의 그림이 실려 있다.


사진제공/해남우리신문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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