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0.남도의 고대 한·중·일 바닷길

바닷길을 헤아려보면 韓·中·日 고대사가 보인다

고대에는 육지·섬 보면서 연안 따라 중국·일본 행

항해술 발달하자 별 보며 서해 가로질러 중국도착

백제, 해남일대 신미제국 복속 후 영산강유역 차지

서남해 해상권 장악한 뒤 왜·중국과 활발한 교류
 

한중일 동북아지형. 문명교류사 관점에서 한반도라는 공간적 범주는 韓·中·日 3국의 중심지였다. 해상로에는 동북아 국가들의 역학 관계가 담겨있다. /구글 지도

■옛사람들은 어떤 바닷길로 중국과 일본을 오갔을까

옛 한반도 사람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배를 타고 중국과 일본을 오갔을까? 한반도는 중국을 통해 문자와 문명을 받아들였고 이를 다시 일본에 전했다. 문명교류사의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라는 공간적 범주는 韓·中·日 3국의 중심지였다. 고대 한반도의 정치역학 적 구도는 남쪽(지금의 전라·충청도)과 동쪽(경상·강원도)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 힘든 것이었다.

육로를 이용해 적대적인 북쪽 나라(고구려 등)를 거쳐 중국으로 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다. 일본은 바닷길만이 유일한 통로였다. 그래서 한반도의 남도는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는 한반도의 출입구였다. 지금으로 치면 국제공항이었다. 남도의 여러 곳은 중국과 일본으로 향하는 배와 선원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남도의 여러 섬 또한 韓·中·日해로의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했을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 문명교류에 있어서 해로(海路)는 대단히 중요한 통로였다. 해로의 변화와 확대는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각 나라의 정세와 영역에 따라 이뤄졌다. 어떤 바닷길을 이용해 한반도 사람들이 중국과 일본을 오갔느냐는 점을 살펴보면 고대 동아시아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고대에는 항해술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 연안항로가 주로 사용됐으나 항해술의 발달과 여러 항로가 개발돼 사용됐다.

이와 관련해 많은 역사학자들이 고대 항로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고 있다. 강봉룡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장이 지난 2016년 내놓은 <바닷길로 찾아가는 한국고대사>는 해로의 확대과정에서 韓·中·日 고대 동아시아 해양문명교류의 변화와 발전과정을 추적하려는 의도에 따라 쓰인 책이다. 이 책에는 한반도 연안의 뱃길과 중국·일본과의 해로발달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다.

한중일고대항로. 고대 한중(韓中)간 해상교통로는 연안해로와 횡단해로, 사단해로로 나뉘고 있다. /류기영 기자

남도지역의 고대 뱃길을 소개하는 이글은 강봉룡 교수의 글을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강 교수는 고대 한중(韓中) 간 해상교통로를 크게 연안해로와 횡단해로, 그리고 사단해로로 나누고 있다. 한반도 동해~남해~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중국 동해안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해로가 연안해로다. 횡단해로는 한반도 서해안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 동해안에 이르는 해로다. 사단해로는 황해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해로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바다사나이들은 연안의 육지를 바라보면서 배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차츰 하늘의 별에 의지해 방향을 찾아가는 천문항해술(天文航海術)이 발달하면서 큰 바다를 가로지르거나 비스듬히 가는 횡단항로나 사단항로를 개척했다. 고대에서는 연안항로가, 장보고가 활동했던 통일신라 시기에는 중부 횡단항로와 남부 사단항로가 주로 이용됐다.

중부 횡단항로는 황해도 옹진반도 서쪽 끝의 장산곶이나 백령도 부근에서 황해를 직선거리로 가로질러 중국 산동반도 동쪽 끝으로 가는 항로였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최단 거리로 갈 수 있는 항로였다. 통일신라 시기 가장 많이 사용된 대중 해상교통로였다. 그런데 장보고가 활동했던 통일신라 후기에는 남부 사단항로가 주요 항로로 가장 많이 이용됐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장

중국의 절강성과 요동반도 일대, 한국의 대동강 유역과 서남해안 일대, 일본의 큐슈 등지로 이어지는 고대 뱃길이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정확지 않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첫 항해는 고대 중국 진(秦)의 방사(方士)였던 서복(徐福)이다. 서복은 서불로도 불렸는데, 불로초를 구해오라는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먼 나라 땅을 헤맸던 인물이다.

서복은 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서복은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불로초를 구하는 여행에 나섰다. 진시황은 그에게 5천명의 수행원과 3천 여 명의 젊은 남녀를 딸려 보냈다. 서복이 거느리는 일행은 모두 60척의 배에 나눠 타고 중국을 떠났다. 서복의 출항지를 두고 여러 곳이 지목되고 있는데 허베이 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와, 저장 성 닝보 시(寧波市) 츠시 시가 가장 유력하다.

서복은 기원전 219년 항해를 떠나 9년 동안 각지를 떠돌다 진시황이 준 재물을 모두 탕진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진시황의 노여움을 피하기 위해 서복은 신선이 사는 산에 거의 다 도착했는데 커다란 상어가 나타나 방해하는 바람에 상륙하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러면서 뛰어난 궁사들을 주면 다시 가서 불로초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진시황은 다시 또 사람들과 재물을 주어 서복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서복은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중국의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서복이 단주(亶洲:지금의 타이완) 또는 이주(夷洲:지금의 일본)에 도달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국에는 서복이 지나갔다고 전해지는 장소가 여러 곳 있다. 제주도 서귀포의 지명(西歸浦:서복이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과 정방폭포에 있는 서불과지(徐福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라는 글자는 서복이 제주도에 도착한 흔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경남 남해도에도 서복설화가 있다. 남해도의 금산 남쪽 거북바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문자가 선명히 남아있다. 어떤 이들은 이 그림문자를 서복 일행이 남해도 일대를 지나가다가 남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60년에 오세창이라는 사람이 거북바위에 새겨져 있는 암각문을 중국으로 가져가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했는데 ‘서불과차’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전남 진도의 서시천도 서복과 관련 있는 곳으로 회자되고 있다.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과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서복이 언급한 삼신산은 모두 한반도에 있는 산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봉래산은 금강산(金剛山), 영주산은 한라산(漢拏山), 방장산은 두류산(頭流山)이라 이해되고 있다.

■신미제국과 중국·일본으로 이어지던 고대 연안항로

282년에 영산강유역 신미제국 20여국은 백제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끼고 진에 사신을 파견했다. 영산강유역 마한사회의 여러 나라들이 진에 사신을 보낸 기록은 <진서>장화열전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강봉룡 교수 번역)

‘장화(張華)를 도독유주제군사(持節 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로 삼아 전출하였다. 신구(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캐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 있었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 여 리였는데,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캐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토마(士馬)가 강성해졌다.’

강봉룡 교수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 20여개 마한부족 국가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신미국은 해남반도의 백포만 일대에 있었던 포구세력이었다. 백포만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외부 세계와 연결시키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따라서 신미제국 20여개 국가의 사신들이 해남의 백포만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시 신미제국이 차령산맥 북쪽에서 한강 위쪽까지를 장악하고 있던 백제의 감시를 피해 육로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를 이용해 조공물을 가득 가지고 사신들이 진나라에 가는 방법은 배편밖에 없다. 그렇다면 3세기에 중국과 지금의 전남 해남일대를 연결시켜주는 항로가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4세기에 들어 한반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아 313년과 314년에 각각 퇴출된 것이다. 4세기 전반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4세기 후반에는 백제가 고구려를 제압하고 서남해안의 해로를 장악하려 했다.

이에 해남 백포만의 신미제국(침미다례)은 가야·왜 등과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백제의 남하에 대비했다. 일본서기에는 369년에 백제가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의 7개국을 평정한 뒤 서쪽으로 진군해 고해진(古奚津)을 거쳐 침미다례를 도륙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침미다례의 세력이 백제에 맞서 저항할 만큼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강봉룡 교수는 고해진(古奚津)을 강진지역으로, 침미다례를 해남지역으로 각각 비정하고 있다. 강 교수는 침미다례는 신미국(新彌國)과 동일한 지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통일신라시대에 해남 현산면 일대의 이름이 침명현(浸溟縣)이었다는 점을 들어 해남 현산 일대에 침미다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왕인박사와 고대 일본항로

옛 남해만과 영산내해의 지형(문안식 제공).

신미제국이 왜와 관계를 돈독히 했다는 것은 지금의 전라도 남부지역 해양세력과 왜가 수시로 오갔던 뱃길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반도 서남해 지역에 일본 열도 세력과 교류하던 유력한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왕인의 도일(渡日)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상대포에서 출발해 서남해안을 거쳐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고대 일본항로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산강

상대포에는 영산강을 거슬러 내려가 목포 앞바다를 거쳐 일본과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있었다. 설화에 따르면 왕인은 상대포에서 일본가는 배에 올랐다. 신라말엽에는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김운경이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 역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구림에서 일본과 중국으로 가는 많은 배들이 돛을 올렸다.

강봉룡 교수가 영산강유역 마한세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교수는 ‘해남 백포만은 서해에서 남해로 꺾어지는 해로의 중요 지점에 위치하고, 상당히 인상적인 고고학적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3세기 말에 신미국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관문사회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3~4세기 단계에 영암 시종면 일대의 고고학적 유적이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시종면 일대가 당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강 교수는 신미국이 영산강유역의 외항이면서, 대외교류의 주역을 담당했던 ‘관문사회’로서의 역할 때문에 신미제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됐지만 3~4세기에는 시종면 일대의 세력이, 5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반남면 혹은 복암리 일대의 세력이, 실질적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영산강변 영암 시종과 반남 일대의 부족국가가 해남 백포만 일대의 부족국가보다 영향력이 더 컸다는 주장이다.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옹관고분

이와 관련해 박해현 교수는 고대 지명이 언어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지금의 강진·해남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박 교수는 침미다례가 음운상으로 침명현(해남), 훈독상으로 도무군(강진)과 비슷하고, 지리적으로도 고해진과 가깝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인근 송지면 군곡리의 거대한 패총, 삼산면 신금리 주거 유적과 옥녀봉 토성 유적, 장고산과 용두리에 있는 거대한 장고분 등의 존재는 이 지역에 기원전 후부터 4세기 중엽까지 침미다례라는 강성한 왕국이 존재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박 교수는 ‘강봉룡 교수가 옹관고분의 분포를 통해 해남일대를 침미다례의 거점으로 살핀 것은 이러한 점에서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강 교수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가 당시의 중심 세력권이었고, 해남 지역은 주변부에 해당하였다고 하는 견해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강봉룡 교수의 주장에 부분적으로는 찬성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암과 나주가 영산강유역의 강성한 세력이었고 이 고대 한반도 세력이 중국·일본과 주도적으로 교류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군곡리패총

■백제의 해상교통로

백제는 3세기 후반에 마한을 병탄했다. 이후 해남·영암 일대의 신미제국은 진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했다. 신미제국의 관문인 해남지역 침미다례는 백제에 저항했다. 그래서 백제 근초고왕은 침미다례를 ‘도륙’(屠戮)하기도 했다. 백제는 결국 신미제국을 복속시키고 영산강 유역을 자신의 영토로 삼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백제는 연안항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해 강봉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백제는 서남해 연안해로의 불안정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그 요충지에 위치한 신미제국을 병탄하여 영역으로 편입시킬 필요가 있었다. 백제의 영산강유역 영역화 과정은 동성왕-무령왕-성왕의 3대에 걸쳐 완료되었다. 동성왕은 무력시위를 통해 신미제국을 일시적으로 복속시키고 왜의 홀로서기를 견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동성왕의 뒤를 이은 무령왕은 다시 강국의 위상을 회복하고 동아시아 해양교류를 주도하게 되자 이를 바탕으로 영산강유역을 항구적으로 영역화 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성왕 대에 이르러 영산강유역 영역화가 완료되었다.’

백제는 처음에는 육로를 통해 중국대륙의 왕조들과 교류를 하다가 고이왕 때 이르러 서해연안해로를 통해 중국과 관계를 맺었다. 백제사절단은 인천 능허대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서해 연안항로를 이용해 요동반도 남단에 상륙했다. 근초고왕 때는 서해 중부를 횡단한 뒤 산동반도 연안을 경유해 양자강에 도달했다. 그 뒤 강을 거슬러 올라 남경을 방문했다. 고구려의 남진에 밀려 백제가 임진강 남쪽으로 쫓겨 가면서 밀려나면서 강화해협~ 연평도~대청도~산동반도(成山角)로 직진하는 항로가 개척됐다. 개로왕 때에는 이 서해 남부 횡단해로를 이용해 사절단이 북위(北魏)에 가기도 했다.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 고구려 수군의 공격을 피해 태안반도 당진포~덕적도~연평도를 경유한 뒤 서해를 횡단하는 해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백제의 사절이 남중국을 왕래하면서 백제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류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겸익은 남중국을 거쳐 인도지역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역과의 교류가 이뤄졌다. 전남 함평 창서마을 유물산포지에서 발굴된 토기에는 서역인(西域人)을 닮은 사람 얼굴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제와 서역과의 교류를 시사하는 유물이다.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때에 여러 차례 태안반도 연안~극렬비열도~산동반도 중부의 성산(成山)으로 이어지는 해로나 덕물도~대청도~산동반도 북쪽 등주(登州)방면의 서해 횡단해로를 이용해 수당(隋唐)의 장안(長安)을 왕래했다.

복원된 신안선. 신안선은 1323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전남 신안 해저에 침몰된 무역선이다. 배에는 수많은 무역품이 실려 있었다.

백제는 서남해 연안과 섬에 여러 군현을 두고 항로를 관리하고 통행하는 배를 감시했다. 백제는 신안 신의도에 수군진을 두고 왜의 중국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신라 통일 이전 동아시아 3국을 연결하는 서남해안 바닷길은 백제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백제는 처음에는 가야 탁순국의 도움을 받아 왜와의 접촉을 시작했다. 이때 백제는 낙동강 하구의 김해 지내동 혹은 부산 다대포에서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壹岐島)를 경유해 구주(九州)의 동송포반도(東松浦半島)와 박다만(博多灣)등으로 연결되는 남해 종단항로를 이용했다.

일본으로 갈때 이용해야 했던 거문도 앞바다

신라가 낙동강 하구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백제는 섬진강 하구 하동의 다사진을 이용해 왜를 오갔다. 이때 이용한 해로는 남해~고성~거제도 남안~대마도~구주에 이르는 남해 횡단해로였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구주(九州)의 축자집단(筑紫集團)을 대신하여 기내(畿內)의 대화정권(大和政權)과 교류를 늘렸다. 이때 백제는 뇌호내해를 통과, 대판(大板)의 난파진(難波津)에 상륙한 후 나라(柰良)에 이르는 해로를 이용했다.

■소정방과 황해 횡·사단해로

한중항로(주성지 제공)

7세기 초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공세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김춘추는 648년 당으로 가서 당태종을 만나 구원을 요청했다. 당은 647년과 648년에 고구려 원정을 단행했으나 실패를 맛본 뒤 좌절감에 젖어 있었다. 이때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맞서는 동맹을 요구해 왔으니 내심 무척 반가웠던 것이다.

그러나 나당(羅唐)군사동맹은 곧바로 작동되지 않았다. 우선 나당군사동맹의 당사자인 당태종이 64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전략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당은 고구려를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했고 신라는 백제를 먼저 공격하자고 우겼다. 우여곡절 끝에 당 고종은 660년 소정방에게 13만 대군을 주어 백제를 공격했다.

소정방은 고구려에 의해 연안해로가 차단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아래 새로운 해로를 통해 백제를 침공키로 결정했다. 소정방은 황해를 횡단키로 결정했다. 그리고 횡단에 성공했다. 그간 발전된 항해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해를 건넌 당 수군은 밀물을 따라 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신라군과 연합작전을 펼쳐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백제는 개국 678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장보고와 서해남부 사단항로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부장

장보고가 활동했던 통일신라 후기에는 남부 사단항로가 주로 이용됐다. 고경석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부장에 따르면 서해 남부 사단항로는 주로 중국 양자강 하구나 항주만 일대로부터 한반도의 흑산도를 거쳐 영산강을 따라 회진(전남 나주시 다시면 일대)으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약 600㎞에 달하는 바닷길을 단숨에 횡단할 수 있는 항로였다.

남부 사단항로는 북부 연안항로나 중부 횡단항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해상 조난의 위험이 매우 높았다. 중부 횡단항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양자강 하구나 항주만으로 부터 산동반도까지 연안을 북상하고, 한반도에서도 연안을 따라 남하해야 했다. 그런데 연안 항해는 조류와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중국 해상교통로(고경석 제공)

큰 파도가 일면 섬이나 육지로 배를 대고 파도와 바람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실제 846년 일본 승려 엔닌 일행은 밀주 대주산 교마포에서 출발하였으나 한 달 뒤에야 초주에 도착했었다. 항해 날자가 길어진다는 것은 경제적 부담과 사고위험이 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바다사나이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항로를 모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서해를 가로지르는 사단항로는 항해 기간을 줄이는 대신 풍랑을 만나 침몰될 위험이 더 컸다.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남부 사단항로가 새로이 개설된 이유에 대해 고경석 부장은 ‘이 항로의 중국 쪽 출발지에 위치한 해항(海港)인 명주, 항주, 천주 등과 물자교류의 중심지인 양주 등지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 중국 동해안 항구도시에는 해상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이슬람과 페르시아 상인들의 진귀한 물건이 활발하게 교역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이들 서역물품을 구입해 일본으로 가져가 비싼 값에 팔았던 장보고 주도하의 3국 무역체계에서는 남부 사단항로 이용이 매우 효율적이었다. 청해진을 근거지로 해 중국과 일본을 잇는 최단거리 항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학계에는 연구자에 따라 남부 사단항로 개설 시기에 대해 서로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서해횡단의 위험성과 초보적 항해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사시대부터 사단항로가 있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1세기에 가서야 남부 사단항로를 이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신라때의 중국항로(동아시아역사문화연구소 문안식 제공)

대체적으로는 장보고가 활동했던 9세기를 전후로 해 남부사단항로가 생겼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고경석 연구부장은 ‘남부 사단항로를 개척하고 활성화시킨 핵심 주역은 재당(在唐) 신라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고 연구부장은 ‘남부 사단항로는 중국 남부 무역항과 한반도 및 일본을 연결하려는 필요성에서 개설된 항로였다. 중부 횡단항로가 정치 외교적 필요에 의하여 국가 주도 하에 개설된 것과 다르게, 남부 사단항로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하여 민간 상인이 개설을 주도한 항로였다.’고 부연한다.

그는 ‘당시 당-신라-일본을 왕래하며 교역을 주도하였던 재당신라인과 신라인 상인들이 관심을 끄는데, 특히 재당 신라인의 활동이 주목된다. 당-신라-일본, 혹은 당-일본 간 왕래를 주도한 사람은 재당 신라인이었다. 이들은 중부 횡단항로, 남부 사단항로, 당-일본 간 직항로 등을 활발하게 오가며 교역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청해진 장보고 세력 역시 이러한 재당신라인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였던 청해진 집단이 남부사단항로를 주로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3대 국제포구(회진포, 상대포, 흑산도 읍동포구)

강봉룡 교수는 서남해 지역에서 한·중·일을 오갔던 국제포구로 ‘나주의 회진포와 영암의 상대포, 그리고 흑산도의 읍동포구’를 지목하고 있다. 강 교수는 회진포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회진포는 장보고 이후에도 선종 승려들이 귀환하는 포구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고려시대까지 계속해서 국제적 관문포구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회진포를 통해 들어온 차 문화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을 것이고, 청자는 고려시대에 들어 해남 화원에서 강진 대구면으로 중심지를 옮겨 ‘고려청자’ 생산의 메카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영암 상대포에 대해서는 동아시아 최고의 국제입출항이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강교수는 이중환이 18세기 중반에 저술한 <택리지>에 등장하는 상대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월출산 밑에 위치한다. 월출산은 한껏 깨끗하고 수려하여 화성(火星)이 하늘에 오르는 산세이다. 산 남쪽에 월남촌이 있고 서쪽에 구림촌이 있는데, 모두 신라 때 명촌이었다.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나라에 조공 갈 때 모두 이 군(郡)의 바닷가에서 배로 떠났다. 바닷길을 하루 가면 흑산도에 이르고, 흑산도에서 또 하루 가면 홍의도(紅衣島)에 이르며 다시 하루를 가면 가거도(可佳島)에 이른다.

간풍(艮風:북동풍)을 만나면 3일이면 태주(台州) 영파부(寧波府)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게 되는데, 순풍을 만나기만 하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남송이 고려와 통행할 때 정해현 바닷가에서 배를 출발시켜 7일 만에 고려의 경계에 이르고 뭍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당나라 때 신라 사람이 바다를 건너서 당나라에 들어간 것이 통진(通津) 건널목에 배가 잇닿아 있는 것 같았다. 최치원, 김가기, 최승우는 상선에 편승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였다.’

서긍의 고려입항로(고경석 제공)

강 교수에 따르면 흑산도 읍동포구는 한중해로의 분기점이었다. 흑산도는 상대포에서 중국 영파에 이르는 한중해로의 핵심 중간 기착지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흑산도의 기능과 위상은 장보고의 후원으로 9년여의 중국 유학생활(837~846)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승 엔닌(圓仁)이 남긴 <입당구법순례행기>와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 사신 서긍(徐兢)이 집필한<고려도경>에 나타나 있다.

도움말/강봉룡, 고경석, 주성지, 박해현

사진제공/위직량, 임문철, 국립나주박물관

그래픽/류기영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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