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행옥 변호사의

호남정맥 종주기

남도일보는 2019년 새해를 맞아 ‘강행옥 변호사의 호남정맥 종주기’를 연재합니다. 호남정맥은 한반도 13정맥의 하나로 전북 장수군 영취산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져 진안군 주화산, 정읍시 내장산을 거쳐 전남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광양 망덕산에 이르는 500㎞의 산줄기를 말합니다. 강행옥 변호사는 지역민의 기상과 애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호남정맥을 걸으며 느낀 소회와 아름다운, 삶의 애환을 생생하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남도일보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드립니다.

<1>1구간 ‘무령고개-밀목재’

‘花上雪’…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그곳에 가다

높은 고개 올라서니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작년 4월 7일 종주 시작…산정 오르는 길 10cm 눈쌓여

산자락엔 진달래 꽃망울…젊은산꾼 만나 오손도손 정담
 

2018년 4월 7일 눈덮인 장안산을 오르면서 호남정맥 종주를 시작한 필자. 장안산 중턱에서 완주를 다짐하며 화이팅을 외쳤다./강행옥
장안산과 밀목재를 안내하는 이정표./강행옥
호남정맥./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백두대간 종주가 끝난 지 4년이 넘었다. 2018년 4월 7일 그동안 미뤄 놓았던 호남정맥 종주를 시작하는 날, 짐을 꾸려 밖으로 나오니 아침부터 눈발이 날린다. 8시쯤 광주를 출발 88고속도로를 거쳐 무주리조트 가던 옛 장군휴게소 앞을 지나 40리 지지계곡에 접어드니 눈발이 더욱 거세진다. 동화호(洞花湖) 호반 길에 벚꽃이 만개하여 하늘을 가리고 있는데, 하얀 꽃 위로 또 흰눈이 쌓여 화상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벚꽃의 풍취를 만끽하며 지지터널과 무령터널을 지나 9시 10분 무령고개에 이르렀다.

주인이 출근 전인 한 휴게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장안산에 오르는 등산로 계단에는 눈이 10cm는 쌓여 있는데 딱 한사람의 발자국만이 찍혀 있다. 아이젠을 챙기지 못한 실수를 자책하며, 그나마 두꺼운 상의와 방풍의, 겨울모자와 버프, 겨울장갑을 준비했음을 위안삼아 눈 쌓인 나무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기 시작한다. 딱 한사람의 발자국만이 있지만 그 자리를 꼭 같이 밟아가니 러셀의 어려움이나마 없다.

무령고개가 워낙 해발고도가 높아서인지 금방 960고지에 이르고, 오르는 길은 장수군에서 잘 정비를 했는지 장애물이 전혀 없이 마치 고속도로 같다. 건너편에는 영취산, 백운산 등 백두대간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1,100고지를 지나 잠시 목을 축이는데 한 젊은 산꾼이 씩씩하게 올라온다. 너무나 반가워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젊은 산꾼은 광주 진흥고를 나왔는데 임창용 선수가 선배된다니 40대 초반쯤 먹었나 보다. 같이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힘든 줄 모르고 걷게 된다.

◇벚꽃 위에 쌓인 흰 눈 ‘花上雪’

10시 30분경에 장안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헬기장이 있어 밋밋한 봉우리인 장안산에는 해발고도는 생략된 채 한자로 ‘長安山’이란 큰 정상석이 서 있다. 한 산꾼이 안테나가 기다란 무전기로 교신을 하고 있는데 온통 영어 일색이라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마추어 무선동호회 회원인데, 백두대간 영취산에 동료가 올라가서 서로 정상에서 무선으로 교선 중이란다. 무선도 즐기고 산행도 즐기니 정말 괜찮은 취미다.

정상석 앞에는 “이곳을 지나간 자여, 조국은 그대를 믿나니 2012. 11. 14. 7733부대 기동중대 100km 행군기념”이란 글귀가 새겨진 검은 비석들이 땅속에 누워 있다. ‘함께 여는 새날’ 수건을 펼쳐 정상석 옆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10시 37분경 밀목재로 가는 길로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내리막길에는 눈이 덮여서 매우 위험하다. 도저히 못갈 시에는 다시 장안산으로 돌아갈 각오로 두 개의 스틱에 의지하여 저속으로 하산을 한다. 조심조심 1150고지를 지나 30여분을 더 내려가니 오른쪽으로는 지보마을로 빠지는 탈출로가 보인다. 1,000m 아래로 내려오니 눈도 덜 쌓여 있고 군데군데 눈이 녹은 산길도 있어서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가잿재, 2.3km’라고 쓰여진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호남정맥 1구간은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다른 곳으로 알바를 할 위험은 전혀 없다. 다만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적어 지도를 의지하고 그동안 산행에서 익힌 느낌으로 내 위치를 알 뿐이다. 백두대간 산행시 반쯤 활용한 트랭글도 켜지 않고 혼자만의 산행을 즐긴다.

◇일본인 지질측정 바로잡아야

사실, 오늘 산행은 갑자기 결정된 행사에 가깝다. 대간 종주 후에 영산기맥 종주, 일본 남알프스와 후지산 등정, 한강기맥과 고흥지맥 종주 일부 참가 등 나름대로 산을 즐겼지만, 약 2년간 목적산행은 쉬고 있던 차다. 마침 광주시장 선거가 코 앞에 다가와 광주정신을 간직한 후보를 지지하고자 나 혼자 급조해 ‘백두대간의 정기를 무등산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호남정맥 단독 종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시장선거 시까지 광주 무등산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는데, 중간에 ‘함께 여는 새날’을 위해 동참하는 산꾼이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군데군데 샛노란 생강꽃이 눈꽃을 머리에 인 채 화사하게 피어 있다. 산수유와 헷갈리는 생강꽃은 고산에서는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정맥 능선을 휘감은 눈보라와 큰 소나무를 흔드는 삭풍은 한 겨울의 눈꽃산행을 4월에 맛보게 해 준다. 다행히 바람이 정면으로 치는 능선은 드물고 바람이 능선 위로 주로 지나가는 통해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12시 17분쯤 ‘금호남정맥 945.8.m’라고 팻말이 걸린 봉우리를 지난다. 아마도 여기가 지도에 ‘백운산’(947.9m)이라고 쓰여진 봉우리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산 높이는 일본 사람들이 100여년 전 토지조사 시에 삼각측량으로 조사한 것이라서 트랭글이나 고도계로 측정해 보면 오차가 꽤나 심하다. 제발 국가 예산을 들여서 산 높이라도 제대로 측정하고 900m 넘는 산봉우리에는 이름을 붙인 정상표지판이라도 하나씩 붙여 주었으면 한다. 이완용 사촌동생 이병도가 만든 식민사관의 극복과 아울러, 산줄기 이름을 일본 사람이 지질측정으로 붙인 산맥이 아니라 산경표에 나온 대로 백두대간과 정맥으로 나누어 지리과 부도에 실을 때 이 나라는 비로소 해방된 새 나라가 될 것이다.

백운산을 넘어 870고지부터는 등산로가 급격히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오전에 지나 온 장안산 줄기들이 온통 한 눈에 들어온다. 이르게 꽃망울을 터트린 진달래는 눈 모자를 눌러쓰고 요염한 자태로 길손을 유혹한다. 일주일 전 변호사회 등산동호회와 함께 한 암태도 승달산 산행에서는 만개한 진달래를 잔뜩 따 먹었었는데….

◇밀목재 하산길 콧노래 절로

897고지를 지날 무렵 눈이 녹은 양지녘이 있길래 배낭을 누이고 도시락을 꺼냈다. 국물이 없어서 팍팍하긴 하지만 보온밥통에 담은 조쌀밥을 다 먹어치웠다. 어릴 때 ‘서속’이라고 불리던 조를 며칠 전 남원재판 갔다 오는 길에 강천산 휴게소에서 사서 쌀밥에 섞어 지으니 밥맛이 별나다. 배고프던 시절 쌀이 부족해 겨울철엔 고구마 넣은 조밥을 자주 먹었었다. 초등학교 때는 쌀밥은 큰 집 제사 때나 아니면 생일 때만 먹었는데, 꼭 그날은 학교에서 혼분식 검사에 걸리곤 했다. 이제 보리나 조가 건강식 재료로 각광받고 있으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다.

1시 20분쯤 식사를 끝내고 나뭇가지를 꺾어서 만든 젓가락을 자연에 돌려 준 다음 힘을 내서 다시 하산 길에 올랐다. 아예 이곳부터는 눈이 거의 없고 등산로에 낙엽이나 맨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장안산 아래에서 눈보라 속에 발을 헛디딜까 벌벌 떨며 스틱에 의지하며 한발 한발 내딛던 것이 꿈만 같다. 30분쯤 내려가니 ‘밀목재 0.82km’라고 쓰여진 팻말이 보이는데, 아마도 950고지인 것 같다.

얼른 114로 전화해 장수읍 개인택시번호를 알아낸 다음 기사님과 흥정에 돌입하였다. “밀목재에서 무령고개까지 얼마면 갑니까”라고 물었더니 “3만원 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얼른 오세요. 하산 800m 남았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아이구. 바로 출발해야 것네요”라고 정겨운 전북사투리로 대답이 돌아온다.

눈 앞에 보이는 밀목재 휴게소 풍광을 내려보며 하산하자니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인생사 모두가 “고난을 통해서 영광으로”(Druch Leiden nach Glori)가 정답인 것 같다. 눈보라와 삭풍에 시달리던 아침을 이기지 못했다면, 진달래 피고 훈풍이 부는 오후 두시는 없었으리라. 오후 2시에 밀목재에 도착하였고, 기사님에게 부탁해 밀목재 등산로 표지판 앞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 기다리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밀목재에서 장수읍 쪽으로 내려가는 도로 양쪽에는 때늦은 꽃샘추위에 깜짝 놀란 벚꽃들이 필까 말까 망설이면서도 이내 오후의 따뜻한 햇볕에 마음이 녹아 만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도 등산이 취미라는 기사님은 나에게 난을 취미로 해보라고 자꾸 권하신다. 난 농사꾼이라서 직접 재배해서 먹는 채소 기르는 것이 더 좋은데 참 큰일이다. 2시 20분쯤 도착한 무령고개 휴게소에서 따뜻한 라면을 한 그릇 시켜 속을 달래는 것으로 호남정맥 1구간을 끝냈다./강행옥

■강행옥 변호사는

-제51대 광주지방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광주YMCA 부이사장

-인재육성아카데미 부사이사장

-강행옥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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