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1.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의 장렬한 죽음과 영회당 (永懷堂)

나라에 충성하고 죽음 앞에 당당했던 박헌양 부사

125년 전 이때 수만 명 동학농민군 장녕성 공격

박헌양 부사, 인부와 병부 움켜쥐고 끝까지 저항

1898년 순절단과 순절비 세우고 96명 將卒 제사

1928년 남산 아래 현 위치로 옮기고 영회당 건립

이두황 토벌군 농민군과 가족들에 잔인한 앙갚음

장흥 수성군과 농민군 후손들 긴 세월 갈등 원인

모두가 충(忠)과 의(義) 지키려 했던 시대의 희생자

원한 벗어버리고 서로의 아픔과 한(恨) 보듬어줘야
 

영회당. 1894년 음력 12월 4일 농민군들은 벽사역과 장녕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박헌양 장흥부사를 비롯 장녕성을 지키던 96명의 수성장졸(守城將卒)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라에서는 장흥 북문 밖에 이들의 충정을 기리는 순절단과 순절비를 세웠다. 192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영회당이 세워졌다.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겨울, 전남 장흥·강진 일대에서는 동학농민군과 조일연합군(조선관군·일본군)사이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1894년 음력 12월 1일(양력으로는 1895년 1월 초)장흥 사창에 집결한 3만 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12월 4일 오전 벽사역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뒤 4일 밤 장녕성(장흥읍성)을 공격해 무너뜨렸다. 양력으로 치면 1월 이맘때이다.

이 과정에서 박헌양장흥부사를 비롯 장녕성을 지키던 96명의 수성장졸(守城將卒)들이 목숨을 잃었다. 동학농민군 입장에서 보면 장녕성의 조선관리와 관군들은 부패한 조정을 지키는 군사였다. 그렇지만 수성장졸의 입장에서 보면 동학농민군은 임금의 안위를 위협하고 신분체계를 위협하는 반역도였다.

지금 역사는 동학농민군을 혁명군이라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녕성을 지키다 죽어간 조선관군들을 폄훼할 수는 없다. 조선관군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당연히 동학농민군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군이나 조선관군이나 모두 시대의 희생자였다. 비난받을 이가 있다면 그들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나라와 겨레를 외면했던 무능하고 부패했던 조정대신들이었다.

■장녕성 (長寧城)전투와 96명의 순절수성군(殉節 守城軍)

전남 장흥군 장흥읍에 있는 장흥서초등학교 건너편에는 남산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으로 향하는 조그만 골목길로 들어서 200m 정도를 올라가면 영회당(永懷堂)이 자리하고 있다. 영회당은 장녕성(장흥읍성) 전투에서 희생당한 장졸들을 추모하기 위해 나중에 건립된 사당이다.

장녕성을 지키다 박헌양 부사와 함께 목숨을 잃은 수성군은 모두 96명이다. 장녕성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이는 모두 400~500명으로 전해진다. 인명피해뿐만 아니라 물적 피해도 컸다. 전투과정에서 성내의 거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탄 것으로 알려졌다.

장흥동헌전경. 1900년대 초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장흥향토사학자 양기수씨 제공)

1894년 음력 12월 20일 장흥에 들어온 우선봉장 이두황이 수성장졸들에 대한 포상을 한데 이어 어사 이승욱이 임금에게 주상해 순절단을 1898년 북문 밖에 건립했다. 사당이 건립된 후 수성장졸에 대한 제사는 후손들과 지방관들이 참여하는 영회계에서 주도했다.

영회계는 1899년 송사 기우만에게 수성장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문을 짓도록 청하고 여돈현이 글씨를 쓰도록 한 뒤 순절단 옆에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를 세웠다. 1928년 순절단과 순절비를 현 위치인 장흥읍 예양리 78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영회당이 건립됐다고 한다.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15일에 96인의 수성장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는 제례를 올리고 있다. 갑오동학란수성장졸순절비는 지금의 영회당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순절비는 전각 안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관리는 허술한 편이다. 빗물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 아래쪽으로 양철 지붕을 임시로 만들어 두었는데 보기가 몹시 흉하다. 순절비는 10여 년 전, 수난을 겪었다. 누군가가 붉은 페인트를 순절비에 뿌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관계자들은 수성장졸들의 충절을 기리는 것이 마땅치 않은 사람이 저지른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흥은 장녕성 전투과정과 동학농민군 진압과정에서 워낙 많은 피해가 발생했기에 그 후유증이 다른 지역보다 크고 깊다.

수성군 후손들은 ‘동학난’이 수그러들자 ‘반역’에 가담했던 농민들을 색출해 가혹하게 처형했다. 동학농민군 후손들은 반역자의 후손이 돼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다. 동학혁명이 아니라 ‘동학난’이었던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수성군과 농민군 후손들은 원수가 돼 등을 돌리고 살았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장흥지역의 동학농민운동 기념은 사실상 수성군에 대한 추모사업 위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일부 후손과 뜻있는 지역인사,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자료발굴과 기념사업이 시작됐다.

장흥동헌 자리에 들어선 장흥경찰서와 장원아파트 건물.

이런 가운데 마침내 지난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됐다. 반란군, 역도에서, 외세배격과 개혁을 위해 몸 바친 농민군으로 공식적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이후 상황은 반전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장흥동학혁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진 것이다.

자연히 농민군들은 역도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 외세에 맞서 장렬히 숨진 영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거기다 수성군 측 후손들이 서울 등지로 많이 옮겨간 반면 농민군 후손들은 대부분 고향에 남아있는 것도 ‘장흥 동학’이 부각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이 수성군 측 후손들의 큰 반대와 반발 없이 치러지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과거 발생했던 순절비 페인트 투척사건은 수성군과 농민군들 사이에 존재해 있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양측의 갈등은 이제 봉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농민군이나 수성군이나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 모두 시대의 희생자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탐관오리가 나빴지, 국록을 먹는 관리가 목숨을 바쳐 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응당해야 할 일을 한 장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수성군이라고 해서 무조건 폄훼하거나 반시대적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지난 100년 세월동안 동학농민군을 역도라 몰아붙이고, 그 죽음을 폄훼했던 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곤란하다. 당시 상황에서 보면 수성군들 역시 나라를 지키다가 희생당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외세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변혁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장녕성 전투

동학농민군은 1984년 음력 12월 4일 벽사역을 수중에 넣고 장녕성 공격을 준비했다. 농민군은 밤중에 수발의 대포를 쏘아 장녕성에 있는 수성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수성군들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거기다가 농민군들이 포를 쏘아대며 함성을 지르는 바람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또 불안한 마음으로 뜬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느라 몹시 지쳐 있었다. 그러나 박헌양 부사를 중심으로 한 수성군들은 성을 지킬 각오를 다지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5일 동학농민군들이 대포를 쏘아대며 장녕성 공격에 나섰다. 이사경 부대가 북문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남문과 동문도 무너지면서 농민군이 물밀 듯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장흥부사 박헌양은 동학농민군들에 사로잡혔다. 박헌양부사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부(印符)를 빼앗긴 뒤 농민군들에게 두들겨 맞은 끝에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떤 기록에는 총에 맞아 숨을 거뒀다고 나와 있다.

성문 주변에 버려진 박헌양 부사의 시신은 성 밖의 한 과부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순절한지 이틀 뒤인 12월 7일 선비 김용후와 백우인이 입고 있던 두루마기로 시신을 싸서 수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흥부사 박헌양은 인부를 지키려다 장흥관아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장흥관아가 있던 자리는 현재 장원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장흥읍 장원길 12번지 일대이다. 1950년까지 장흥군청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후 주택지로 변했다. 동헌터임을 알려주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다.

■소설 <갑오의 여인 이소사>에 묘사돼 있는 장녕성 전투

장흥도호부

기자가 지난 2015년 써냈던 소설 <갑오의 여인 이소사>에서 동학농민군의 장녕성 공격과 관군들을 지휘, 장녕성을 수비했던 박헌양 부사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졌다. (일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픽션임. 원문에서 중간 중간 생략)

‘12월 4일 밤 농민군들은 장녕성 안쪽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수성군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 수성군들이 야반도주하면 그만큼 세력이 줄어들어 농민군들이 쉽게 성을 빼앗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민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책략이기도 했다.

5일 새벽 농학군은 북문을 먼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문에는 박헌양 부사가 비교적 많은 수성군들을 데리고 있어 반항이 거셀 것으로 여겨져서이다. 수성군은 동문으로 이어지는 탐진강 대나무다리를 없애버린 탓에 농민군은 동문 쪽으로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박 부사는 일단 동문 쪽을 막아낼 부담이 덜어지자 상당수 군졸들을 북문 쪽으로 보내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북문 쪽의 농민군의 공격은 예상보다 강했다. 이인환 대접주는 이사경 대접주 휘하 부대에 대포 2문을 배치했었다.

동문 쪽 공격이 여의치 않으면 북문을 중점적으로 공략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사경 대접주 농민군은 순식간에 북문을 뚫었다. 대포에 북문이 깨지고 성곽이 허물어져 내렸다. 북문 쪽에 포진해 있던 수천 명의 농민군들은 순식간에 성내로 들어가 수성군들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성문이 무너지자 2천여명의 수성군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일부는 성을 탈출해 강진과 나주 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목숨을 건진 이는 극소수였다. 관아는 불에 휩싸였다. 농민군은 아전들의 집도 모두 불태웠다. 관아와 민가 3천700여 호가 불에 탔다.

박헌양 부사는 북문이 무너진 뒤 농민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문 역시 대포에 맞아 우지끈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곳곳에서 농민군의 함성이 들렸고 칼과 몽둥이에 맞아죽는 수하 군졸들의 비명소리가 가득했다.

장흥동교.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박헌양 부사는 당(堂) 위에 올라 자세를 곧게 했다. 수성별장이 몸을 피하라고 성화였으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인부와 병부를 죽음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부는 장녕성의 행정을, 병부는 군사를 일으키고 돌이키는 모든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하는 인장이다.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장녕성을 동학도들에게 넘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사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던 군졸 여러 명이 농민군들의 칼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농민군 장수들로 보이는 사내들 몇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농민군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부사, 이방언이오. 비록 적장이지만 부사의 담대하고 용맹하기가 다른 벼슬아치들과는 사뭇 다르오”

“네 이놈. 하찮은 도적 수괴 놈이 어찌 조정대신을 능멸하느냐. 내 비록 힘이 부족해 이 성을 지키지 못했다마는 네놈들의 목숨은 이제 경각에 달렸다. 조정에서 네놈들을 고이 놔둘 것 같으냐”

“부사는 그런 말마시오. 농민들은 살기를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일어서지도 않았을 것이요. 누구를 능멸하려고 벌인 일이 아니오. 농민들은 그냥 살고 싶었소. 세금을 바치지 않는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옥에 가두는 벼슬아치들의 탐욕과 아전들의 횡포가 없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소.

부사는 지금 농민들이 자신과 조정을 능멸한다고 하지만, 청나라와 일본이 나라를 삼키고 있는데도 권력싸움이나 하고 있는 조정대신들은 능멸과 치욕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 그 무엇보다 큰 죄이니 능멸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내 부사의 충절은 높이 사나 그 충절은 탐욕스런 조정대신을 위한 부질없는 맹종이오. 이제 모든 이가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는 일에 힘을 써야 하오. 농민군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어선 것뿐이오. 부사처럼 곧은 인물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준론을 벌일 상황은 아닌 듯싶소. 어서 인부와 병부를 내놓으시오.”

“네 이 도적놈들아. 그리는 못한다. 가져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져가라” 결국 농민군은 박헌양부사를 죽였다. 농민군들은 부사의 사체를 동문 밖에 버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어떤 과부가 부사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치렀다. 박헌양 부사의 죽음과 관련해 후에 이소사라는 동학 여장군이 박헌양 부사를 참수했다는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현재의 장흥동교 모습.

■ 장녕성 전투에 관한 기록들

장녕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박헌양 부사의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훗날 작성된 <박후의적>(朴侯義蹟)과 <영회단>(永懷壇)에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또한 <박후의적>, <영회단>과는 약간 내용이 다르지만 <임태희추기>(任泰希推記)에는 장녕성 전투의 전후사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장흥 향토사학자 위의환씨는 장녕성 함락전야의 박헌양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12월 3일 농민군이 장흥읍 사방을 에워싸고 기세를 올릴 때부터 부사는 수성(守城)을 위해 전전긍긍했다. 12월 4일 아침에 벽사역이 1,000여명의 농민군에 의해 단숨에 무너지는 모습을 동문의 누대에서 지켜본 부사는 이제 수 만 여명의 농민군이 장녕성을 칠 것을 예상하면 얼굴빛에 혼백이 달아날 만도 했다’

박헌양 부사가 12월 4일 밤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한편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어떻게 의연하게 대처했는지는 <영회단>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위의환씨 한문 번역)

<영회단>

이때 밤에 박부사는 성을 순시하면서 동문 누각에 이르렀을 때 기실(記室)인 박공(朴公: 박영수)도 역시 뒤따라 나섰다. 적도들이 사방으로 이르러 운집하여 대포를 쏴 포성이 하늘로 높이 솟았다. 부사가 수성하는 이민(吏民)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묘수가 없는 즉 운명이다. 너희들은 참된 마음의 정성으로 성을 고수하고, 오늘 위험이 닥쳐오더라도 (몸을) 보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음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는데 내가 마땅히 성을 넘어 삶을 도모해기 위해 내 어찌 구차하게 (난리를) 면하려 하겠느냐? 한탄하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장녕성 함락’의 전후사정에 대해서는 <오하기문>에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오하기문> 12월 5일조:

적이 장흥을 함락시켜 부사 박헌양이 죽었다. 이방언 등은 초 4일 벽사역을 불 질렀다. 다음 날 새벽(초 5일) 적도들이 장흥부를 범하였을 때 성 안의 수비군이 적어 박헌양 부사에게 도망을 권유했다.

(부사는)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내 차라리 바로 앉아 죽겠다고 하면서 당(堂)위에서 조복을 입고 인부(印符)를 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갑자기 적들이 들어와 협박하여 (인부를)빼앗으려고 하자 박헌양 부사는 부릅뜬 눈으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죽일 놈의 적도들아 나는 이 땅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박장흥(朴長興: 곧 박헌양 부사)이 어찌 인부를 적의 손에 넘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적은 칼을 휘둘러 왼쪽 팔을 잘라도 (부사가) 끈을 놓지 않자 총을 쏘아 죽였다. 장흥부의 서리(胥吏) 주두옥(周斗玉), 임창남(任昶南), 주열우(周烈佑), 김창조(金昌祚)와 김일원(金日遠) 벽사 찰방의 아들도 함께 죽었다. 병사들과 민간인 죽은 자가 모두 4~500인이며, 적은 또한 부중(府中)을 불 질렀다. 아전들은 적도들을 겁내 시신을 수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임태희추기>

4일 밤 박 부사는 황망한 가운데 초조히 서성거렸다. 각 부대의 대오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면서 사수를 맹세했지만 5일 새벽녘에 적들이 북문으로 잠입할 때 북문을 지키는 군대가 수성을 실패하여 관군은 대패를 당하여 사상자가 서로 베개를 삼아 누워 있었다.

박부사는 군졸을 지휘하며 동문에 있을 때 벽루에서 침착하게 의를 위하여 죽음을 맞았다. 동 사건의 피해자를 헤아려보면 기실 박영수(朴永壽) 수성장 임기남(任琪南), 도총장 주두옥(周斗玉), 부통장 주열우(周烈佑) 기타 부곡(部曲)의 장졸 90여인으로 모두 이름을 다 할 수 없다. 박부사의 시신은 시장주변의 노상에 늘어져 있었는데, 적도들을 겁내 시신을 수렴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흥군향토지>

새벽을 기하여 동학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동학군은 천주부적이 찍힌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주문을 외우면서 인시(寅時: 오전 3시~5시)를 기하여 동학군의 한 부대는 우회하여 연산리쪽 북문에 진군하고 한 부대는 좌회하여 남문에 진군하였으며 주력부대는 정면에 있는 동문(현 중앙교회)에 진군하였다.

죽창 휘두른 소리를 신호로 세 방면에서 총공격을 하였다. 동문에 진공(進攻)했던 동학군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으므로 수십 명이 거목을 들고 동문을 들이 박쳐 문을 파괴하고 입성하였으며 수성군의 화승포란 포구에다 화약을 넣고 그 다음에 멍석조각으로 마개를 지르고 다음에는 철편을 넣고 다시 멍석마개를 넣어 제기고 화승에 불을 붙이면 발사되는 장치로 무척 시간이 걸렸으며 성능도 좋지 못하였다.

동문이 열림과 때를 같이하여 석대군은 남문에 웅치접군은 북문에 입성하여 관아를 불 지르고 아전 집 3호외에는 성내가 전부 소각되었다하며 부사 박헌양외 수성장졸이 전사하는 등 피아간에 희생자가 많았다.

영회당 지붕 건너편으로 보이는 장흥서초등학교. 학교부지는 관군들이 훈련을 받던 장대터로 이곳에서 장흥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방언 장군이 참수당했다.

■박헌양 부사와 순절 장졸들에 대한 추모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정에서는 12월 27일 총리대신이 전사한 박헌양에 대해 휼전(恤典)을 베풀 것을 아뢰어 ‘장흥부사 박헌양(朴憲陽)은 고을을 지키다가 국난에 죽었으니 그 지조가 가상하니 특별히 내무아문참의(內務衙門參議)를 추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초상을 치르고 고향에 돌아가서 장사 지내는 절차는 각 해당 도신(道臣)들이 각별히 보살피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했다’고 나타나 있다.

영회당 뒤쪽 전각에 있는 수성장졸순절비.

1898년 장흥부 수성장졸의 후손과 유림 등이 중심이 되어 세운 영회당에는 ‘고장흥부사박공급각위순절비문’(故長興府使朴公及各位殉節碑文)이 570자로 적혀 있다. 이 글의 원문격인 기우만 선생의 <송사집>(松沙集) 25권에는 ‘장흥부사박공제단비’(長興府使朴公祭壇碑)가 436자로 되어 있다. 이는 후손과 유림들이 영회당에 비문을 세울 때 기우만선생의 글에 글자를 더해 윤색했기 때문이다.

영회당 비문에 적여 있는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위의환씨 번역)

‘故 장흥부사 박공(朴公)각위(各位) 및 순절비문(殉節碑文)

전(傳)하는 말에 들은 바가 말이 다르고 전해들은 바가 또한 말이 다르다 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전해들은 것은 직접 들음만 같지 못하고 직접 들음은 직접 보는 것만 같지 못하여 보는 것이 다른 말이 없음을 뜻함인 것이다.

아! 박공의 순절은 우리 남주(南州)의 인사(人士)가 모두 눈으로 보고 한 마디로 추대하여 정충위절(貞忠偉節)이라 하였으니 사람들의 입으로써 전함이 한번 전하여 소문이 되고 소문이 다시 한번 전하여 전해들은 바가 되어 달리 말을 하는 사람이 없음이 마땅하다.

바야흐로 갑오년 사악한 비도(匪徒)들이 당을 체결하니 여러 군현(郡縣)이 풍문을 듣고 성문을 열어 들임으로써 조금 명망이 있다는 사람들조차 오히려 관인(官印)을 풀고 떠나갔었다.

그런데 이때 장흥부사인 박공헌양(朴公憲陽)이 평소 여러 남군(南郡)을 역임하며 성적(聲積)이 드러나 홍수를 막는 돌기둥으로 믿을 만 하였는데, 과연 의(義)를 잡고 사(邪)를 배척하며 성을 지키는 계책이 있어 비록 적도는 많고 아군은 적었지만 적들이 다섯 달 동안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사(王師)가 남쪽으로 정벌하자 저들이 궁한 도적이 되어 그 악독함을 부림으로써 마침내 중과부적이 되었으니 이는 전세의 어찌 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이 백만의 전력보다 더 강함이 되었으니 그후 적들이 평정된 것도 또한 공의 한 목숨을 버린 힘이었다.

아! 장하도다. 동시에 해를 입은 기실(記室) 박영수(朴永壽), 수성별장 전사과(前司果) 임기남(任琪南), 통수문장 주열우(周烈佑)와 기타 부곡(部曲) 장졸 90여인은 그 이름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박(朴), 임(任) 주(周) 세 사람의 순절은 모두 의기가 평소 사람들에게 미치었는데 마침내 한 목숨을 버리어 흔쾌히 죽었으니 아! 장하도다.

박공의 사실은 조정에 보고되어 증참의(贈參議)의 포전(褒典)이 되었으니 세 사람의 충절도 사리에 비추어 천양함이 마땅하나 아직까지 거행되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다사하니 필요한 민재는 오직 충(忠)이라 마땅히 기풍을 세우는데 급급해야 함에도 오래도록 포전(褒典)이 없어 세로(世路)의 개탄한바 되었다. 그러나 당당한 여러 의사들의 충절이야 어찌 이런 일로써 다하고 덜함이 되랴.

공의(公議)에 의하여 단(壇)을 쌓고 박공(朴公)을 윗자리로 하여 차례로 제장(諸將)을 향사하고 장차 비석을 세워 그 시말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기우만(奇宇萬)이 당일의 사실을 참여하여 들었다 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이 명을 받든 사람은 향인(鄕人) 임병추(任炳秋)이다.

아! 정의를 해치는 사악은 진실로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바, 오늘날 조야(朝野)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만일 공과 같은 사람들이 고을에서 노력을 하고 있다면 거의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이것만 문득 흉한 일을 당하였으니 슬프다 저 사악한 무리들은 다만 만 번을 죽이어 그칠 일이 아니다. 명(銘)을 지어 이르노니

엄연히 혁혁한 정의의 제단/저 높은 천관산과 더불어 높다/귤 누렇게 익어가고 여자 붉은 계절/멀리 바닷물을 잔질하여 술 삼았다/술 정결하고 나의 안주 향기로우나/계수나무에 매단 깃발 펄럭이며 공이 왔었다/ 공 비록 죽었으나 살아있음과 같으니/이 세상의 강상(綱常)을 붙잡았었다/공을 따라 함께 오는 사람들 있었으니/또한 공의 아름답게 여기는 바였다/아름답게 여긴 사람 함께 벌여 향사(享祀)하니/묵묵히 정의 잡고 사특함을 물리치소서.

무술(戊戌) 1898년 늑춘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도움말/위의환, 양기수, 박맹수, 홍영기

사진제공/양기수, 남성진, 조연희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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