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역사이야기-73. 나주초등학교와 무학당(武學堂), 그리고 참혹의 역사

그곳의 참변들…무학당은 간데없고 주춧돌만 남았구나

무학당, 나주진영 군사훈련장이면서 죄인 처형장
구한말 초토영 삼아 관군·日軍 숙영지 겸 지휘소
기해·병인박해 때 천주학신자 극형 처해 4명 순교
농민군 처형지 日軍 기록 ‘사체 680구 쌓여있어’
나주의병 이끈 해남군수 정석진도 억울한 죽음
1907년 나주초교 세워지면서 무학당 흔적 없어져

1872년 나주목지도의 무학당.

■나주와 무학당(武學堂)

전남 나주는 고려시대 12목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나주는 노령산맥 아래쪽에서는 가장 큰 도읍이었다. 노령산맥 위쪽은 전주가, 아래쪽은 나주가 전라도의 가장 큰 도읍으로 영화를 누렸다. 나주는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23부제로 나눌 당시 나주부가 들어설 정도로 큰 도읍이었다.

그러나 1896년 지방행정조직개편에 따라 전라도가 남북으로 분할되면서 도읍의 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1천년 이상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가장 큰 도시로 자리하면서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었으나 이때 전라남도 도청이 광주로 옮겨지면서 도시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1년에야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해 겨우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주향교에서 바라본 나주시가지(1900년대 초로 추정된다.)

나주는 고려·조선을 거치는 1천500년 동안 전라도의 중심도읍이었던 만큼 각종 행정기관과 군사시설이 즐비했다. 1872년 제작된 나주목 지도를 보면 나주읍성 4개 성문 안에는 여러 관아 건물이 꽉 차있다.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제금헌), 내아, 객사인 금성관을 중심으로 해 서쪽에는 장청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쪽성문(서성문) 밖에는 향교가 있다.

또 동쪽으로는 훈련청과 군기고, 옥(獄)이 위치해 있었다. 북쪽에는 읍창과 향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쪽성문(남고문)을 조금 벗어난 곳에는 진영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토포청과 이청, 전라우영에 속한 여러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라우영 건물 중 눈에 띄는 것은 세검당(洗劍堂)이다. 세검은 ‘칼을 씻는 곳’이라는 뜻으로 군 시설이 있는 곳을 뜻한다. 서울 세검정이 같은 의미의 동네 이름이다.

세검당은 군마의 검열과 무과의 합격자 발표를 하던 곳으로 무학당(武學堂)으로도 불렀다. 그런데 이 무학당은 넓은 군사시설이었던 관계로 천주교 박해 당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조선관군과 일본군의 숙영지로 사용되면서 ‘동학군 토벌의 지휘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단발령 당시 나주의병을 이끌었던 정석진해남군수가 참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기도 하다.

나주초 역사관에 보관돼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학교요람(1925년)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일본군이 남긴 일기에는 ‘1895년 정월 나주관아로 끌려온 동학도 시신 680여 구가 남문 근처 야산에 쌓여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 역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 뒤 나주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동학군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장흥 여인 이소사 역시 나주 관아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나주 옥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도 곳곳에서 붙잡혀온 600명이 넘는 동학농민군들이 가둬둘 수가 없었다. 나주백성들을 잘 통솔해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잘 막아낸 공로로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가 된 나주목사 민종렬은 그래서 성 밖 넓은 진영(陣營)에 초토영을 설치했다. 바로 무학당 일대였다.

그런데 지금 나주에는 무학당이라는 건물이 없다. 구한말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관련이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없애버리자 장대터(훈련장)와 같은 군사시설은 폐쇄되고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 한일병탄을 전후로 해 장대 터 넓은 자리에는 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주 역시 마찬가지다. 일제는 무학당 일대 진영에 공립나주보통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가 지금의 나주초등학교이다. 나주초등학교는 2019년 현재 개교 112주년을 맞고 있다. 그러나 나주초등학교의 설립연원은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공립소학교령으로 1895년에 나주공립소학교가 설립됐다. 당시 교장 직은 나주 군수였던 이우규가 겸임했다.

천주교 순교를 상징하는 부조. 나주초교 인근 골목길에 있다.

나주초등학교 부지에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각종 역사적 사건이 스며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감당해야 했던 처절했던 고문과 처형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또 부패한 조정 관리들과 이 땅을 삼키려는 일본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동학농민군들의 열망이 무참히 스러진 곳이기도 하다. 호남의병이 발원된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장소가 바로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교정이다.

■순교터로서의 무학당

무학당 순교터 안내판.

나주시 남외1길 16(남외동 128번지)일대에 있는 나주초등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순교터 무학당 조형물’이라는 제목의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안내판에는 무학당과 천주교 순교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학당은 군사시설인 나주 진영 안에 있던 훈련과 관련된 사열대의 성격을 갖춘 건축물로,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을 세워 중앙에는 대칭이고 좌우에 방을 둔 형식이다.(나주 순교지의 건축학적 고찰 참조)

위치는 나주시 남외동 128번지(북위 30도 01분, 공경 126도 43분 08초)로서 1907년 5월 20일에 나주초등학교가 개교되면서 무학당 순교 터는 흔적조차 희미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춧돌 12개가 남아있었고, 나주의 네 분 순교자를 현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서 2001년 11월 7일 그중 10개를 나주성당으로 옮겨와 이 무학당 조형물의 주춧돌로 8개를 사용하고, 2개는 경당주변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이 시작하는 곳에 놓아두었다.

나주의 초등학교 교정 화단에 주춧돌 2개가 있는 곳에는 순교 터의 안내판을 세워 순교의 자취를 기리고 있다’

나주초교 정문 오른쪽 화단이 무학당이 세워져 있던 자리다. 가운데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 무학당 주춧돌 2개가있다.

이 안내판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자면 ‘무학당은 나주진영에 있는 군사시설(사열대)이다. 나주진영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나주진영 자리에 들어선 나주초등학교는 순교 터이다. 이 순교 터를 기리기 위해 초등학교에 남아있던 무학당 주춧돌 10개를 나주성당으로 가져와 나주진영에서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표석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 천주교를 믿다가 나주로 끌려와 나주에서 순교한 최초의 인물은 이춘화(33·영세명 베드로)이다. 이춘화는 공주 출신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그 뒤 나주에서 순교한 인물은 강영원(베드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이다. 이들은 1866년 병인년에 대원군이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령을 내릴 때 1871년 나주로 끌려와 그 다음해인 1872년에 모두 처형당했다.

강영원은 전북 용담 출신으로 정읍에서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다. 그는 밤낮으로 가해지는 매질과 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학(天主學)을 버리라는 포졸들의 강요를 이겨냈다. 결국 그는 1872년 3월 9일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백지사형은 물에 적신 한지(얇은 창호지)를 여러 겹 얼굴에 발라 질식케 하는 사형방법이었다. 방법이 간단했지만 사형수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에 ‘천주학쟁이들’을 죽일 때 자주 사용됐다.

순교터 무학당 조형물. 나주초교에서 발견된 무학당 주춧돌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두 번째 순교자는 전라북도 무장, 암틔라는 곳에서 살던 유치성이다. 유치성은 강영원과 함께 붙잡혀 나주로 압송됐다. 둘은 같은 날 처형됐다. 그렇지만 유치성은 쏟아지는 돌 더미에 깔려죽었다. 묵중한 돌에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졌다. 관군들 눈에는 처절한 죽음이었지만 정작 강영원이나 유치성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세 번째 순교자 유문보는 장성 삭별리 사람이었다. 그는 강영원이나 유치성보다 일찍 죽었다. 기록에는 옥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마도 모진 매질을 견디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유문보는 대략 1872년 2월 12일에서 3월 9일 사이 나주에서 옥사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으로 보면 나주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천주교 순교자들은 모두 4명이다. 이들 천주교 순교자들이 사형에 처해진 곳은 진영 내 무학당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나주성읍 안에는 옥이 있었으나 천주학쟁이들은 성문 밖 진영의 옥에 갇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무학당 인근에서 처형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나주 초등학교 정문 밖에서 볼 때 오른쪽 화단이 당시 사형장으로 사용되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1907년 나주 초등학교 조성공사를 하면서 무학당의 주춧돌로 보이는 돌 12개가 발견됐다. 이중 10개는 나주성당으로 옮겨지고 2개는 무학당의 원래 터로 보이는 화단에 그대로 두고 그곳에 ‘순교터 무학당 조형물 안내판’을 세웠다.

나주초등학교에서 나주성당으로 옮겨진 주춧돌 8개 위에는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나주성당에는 ‘나주순교자 기념 성당 안내문’이 있는데 그 안내문에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4명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나주순교자기념성당 표석. 뒤로 보이는 것이 무학당 주춧돌 위에 세운 조형물이다.

‘이곳은 천주교 박해시대에 나주에서 순교한 네 사람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한 곳이다. 1839년 기해박해 때 공주출신 이춘화(베드로)는 나주에 와서 살게 된지 얼마 안돼 체포된 후 고문을 받아 읍내 감옥에서 33세에 순교하였다. 그 후 병인박해(1866~1878) 기간 중인 1872년에 강영원(바오로: 진안용담면, 51세), 유치성(안드레아:무장 암틔점,48세)은 나주 무학당(武學堂:조선군 군사훈련장) 앞에서 석침(石針)과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하였고, 유문보(바오로:장성 삭별리,60세)는 중병에 걸려 옥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선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로서 신심이 매우 깊었다. 그들은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교우들을 고발하지도 않았다.

강영원은 태장을 무수히 당했고 고문 중에도 예수마리아의 이름과 십계명을 외웠다. 유치성과 유문보 역시 가혹하게 태장을 당했고 심지어 불로 발등을 지지는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추위와 굶주림과 육신의 온갖 고통을 꿋꿋이 참아 견디며 옥중에서도 소리 높여 기도를 바쳤다. 병든 유문보를 극진히 간호하는 동안 하늘의 성인들이 내려와 그들을 데려가는 꿈을 여러 차례 꾸기도 하였다 (치명일기, 병인박해순교자 증언록, 병인치명사적 참고)’

나주성당에 있는 비석. 영장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학당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농민군 처형장으로서의 무학당

조선관군들의 동학농민군 토벌에 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관군의 장흥동학농민혁명 토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두황이 작성한 <양호우선봉일기>이다. 우선봉일기는 이두황이 죽산부사로 임명되는 갑오년(1894년) 9월 10일부터 우선봉장 임무를 마치는 을미년(1895년) 2월 18일까지의 군사작전과 전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장흥을 비롯한 전남지역의 농민군 토벌기록은 우선봉일기에 많이 등장한다. 우선봉군이 전남지역 대부분을 무대로 농민군 진압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두황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에 참여, 이후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피신한다. 12년 동안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07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주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후 전북관찰사로 임명되는 등 친일파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로운 삶을 산다. 이두황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남긴 것이 <우선봉일기>다. 훗날 금속활자로 인쇄됐다.

무학당에서 희생된 동학농민군을 상징하는 부조.

선봉진이었던 이규태가 쓴 <순무선봉진일기>도 동학농민군토벌기록이다. 이 기록은 1894년 9월 21일부터 시작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권 26~59쪽에 실려 있는 <동학당 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는 일본군이 남긴 기록이다. 일본군의 동학군 토벌 야전사령관인 후비보병 19대대 대대장인 미나미 소시로(南小四郞:남소사랑)가 농민군 토벌 과정을 문서로 정리해놓은 것이다.

일본의 동학농민군 토벌과정은 <동학당 정토약기>에 나와 있으나 이는 매우 ‘공식적’ 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11년 공개된 <종군일지>는 토벌작전의 양상이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참혹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 <종군일지>는 이노우에 카츠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2011년 일청전쟁에 참가했던 시코쿠 도쿠시마 현 출신 병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종군일지>는 일본군 후비(後備)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구스노키 비요키치 상등병이 1894년의 동학군 토벌과정을 생생히 적어놓은 것이다. 구스노키 비요키치는 1894년 7월 23일 후비역 보병 제19대대 병사로 소집된다. 일본군 대본영은 그해 10월 28일 제19대대를 ‘동학당 토벌대’로 지명했다. 11월 6일 인천에 상륙한 제19대대는 서울 용산 만리창에서 전투태세를 완비한 다음 11일부터 동로·중로·서로 ‘3로’로 나뉘어 ‘동학당 진압’에 나선다.

구스노키는 소집된 당일부터 1895년 12월 9일 귀국 뒤 부대가 해체 때까지 일지를 썼다. 이 구스노키의 일지는 그의 친척 구스노키 마사하루가 동학 학살이 끝난 6년 뒤 길이 923㎝, 폭 34㎝의 두루마리에 정서한 것이다. 노스키는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원이었다. 그의 부대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로 진입해 농민군을 토벌했다.

구노스키 상병이 나주에 들어와 쓴 진중일기에는 나주 초토영에서 얼마나 많은 동학농민군들이 처형당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895년 음력) 2월 4일, (나주부) 남문에서 4정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의 시체가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 장흥부 전투(1895년 양력 1월 8~10일) 이후 수색을 강화하자 숨을 곳 찾기가 어려워진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당해 책문(고문) 뒤 죽은 중죄인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버려진 시신이 680구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나주성당의 무학관. 천주교 순교지인 무학당의 이름을 따왔다.

무학당이 있던 진영근처에는 얕은 야산이 많았다. 전해지는 말로는 붙잡혀온 동학농민군들이 너무 많아 조선관군은 이 야산에 토굴을 파 감옥을 만들었다. 그리고 농민군들을 가두고 차례로 끌어내 고문하고 죽였다. 구스노키가 ‘(고문 뒤) 죽은 중죄인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버려진 시체가 680구에 달했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정이 나주진영(무학당 일대)에 호남초토영(招討營)을 설치한 때는 1894년 음력 10월 28일이다. 동학농민군이 재 기포하고, 특히 호남 지역의 농민군이 기세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나주에 호남초토영을 설치하고 나주목사 민종렬을 초토사에 임명했다. 나주부민들과 수성군을 잘 지휘해 농민군의 공격을 막아낸 공을 높이 산 것이다. 민종렬은 현 나주초등학교 자리에 초토영을 설치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직후 초토영에는 전봉준·손화중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많은 농민군이 수감됐다. 전라도 각지에서 체포된 농민군들은 나주 초토영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은 뒤 대부분 처형당했다. 이 같은 내용은 <오하기문>과 <금성정의록> <김낙철역사> 등에 부분적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무학당 일대 초토영에서 처형당한 농민군의 전체수가 등장한 것은 구스노키가 쓴 <진중일기>가 유일하다.

무학당 주춧돌. 나주성당으로 옮겨진 것이다.

■호남의병(단발령에 반발해 일어선 나주의병) 처형장으로서의 무학당

초토영에서는 민종렬 나주목사를 도와 동학농민군을 물리친 도통장 정석진(鄭錫珍)이 참형당하기도 했다. 정석진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나주성을 공격할 때 관군과 민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정석진은 이 공로로 1년 뒤인 1895년 해남군수에 임명됐다. 정석진의 호는 난파(蘭坡)로 외모가 위엄이 있고 기개가 남달랐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석진은 1895년 11월의 단발령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나주 관찰부(觀察府)의 참서관(參書官:부관찰사로 지금의 부지사 격)이었던 안종수(安宗洙)를 나주의병이 살해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정석진은 참서관 안종수보다 벼슬이 낮았기에 드러내놓고 안종수와 대립하지는 못했지만 직접 가위를 들고 관리들의 머리를 잘라버리던 안종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안종수는 자신이 단발을 한 뒤에 관찰사 채규상을 위협해 강제로 상투를 자르게 했다. 그리고 부하 최경판(崔敬判)으로 하여금 군졸(檢捕軍)을 데리고 나가 나주읍성 백성들의 상투를 잘라냈다. 안종수와 그의 부하들의 강압에 따라 100여명의 아전과 백성들이 강제로 머리카락을 깎였다. 자연 안종수와 그 부하들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1895년 음력 12월 초순 나주부민들의 분노가 터져버렸다. 나주부민들은 나주관아로 몰려가 단발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안종수는 수성군을 출동시켜 부민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런데 1896년 음력 2월 9일 새벽에 정석진이 해남 현감(군수)으로 부임하기 위해 새벽에 길을 떠난 뒤, 정석진을 배웅했던 김창균과 장길한 등 나주의 향리들이 안종수를 살해했다.

단발령에 항의해 나주의병이 일어서자 2월 11일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이 나주로 이동해 나주향교에 집결하였다.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은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하는 나주의병은 ‘나주의소’(羅州義所)로 이름 짓고 힘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조선조정이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을 보내 의병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친위대를 출병시키자 나주의병과 장성의병은 자진 해산해버렸다. 신기선과 같이 온 친위대의 책임자는 이겸제(李謙濟)였다. 그는 경남 진주(晉州)로 떠나면서 전주진위대(全州鎭衛隊)를 광주와 나주·담양 등지에 파견해 주동자를 색출,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전주진위대 중대장 김병욱은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거병을 주도한 인물들을 체포하고 처벌했다. 나주의병 거병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된 해남군수 정석진은 체포돼 나주로 끌려와 효수됐다. 담양부사 민종렬은 서울로 압송됐다. 광주향교 재임(齋任) 박원영과 나주의병 거병을 도운 담양 유생 구상순(具相淳)도 처형됐다.

정석진은 친위대를 따라온 안종수의 동생 안정수(安定洙)의 농간과 모함 때문에 극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패한 정치를 일신하고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일어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운 정석진이 불과 1년여 뒤에 의병을 일으키고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관군에 의해 참형을 당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주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무학당 희생자를 상징하는 인물부조.

나주초등학교 정문에서 나와 우측으로 10여m를 가면 길 건너편에 천주교순교자, 동학농민군, 그리고 나주의병 정석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있다. 3개의 조형물은 모두 초토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들이 머물던 나주진영이, 외적(外敵)이 아닌 조선백성들을 무참히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됐던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우리는 과거 초토영이었던 나주초등학교의 교사(校舍)와 운동장에서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세상’과 ‘의로운 세상’에 살고자 했던 이들이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것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이런 과거를 알랴? 나주초등학교의 터에 스며있는 그 비극의 역사를 일부러 헤아려봐야 간신히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나주초등학교에서 큰 길로 나가는 길 담 벽에 군졸리라는 글자와 함께 군관과 군졸 두 명의 군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남외리는 아주 옛적에 군졸리(軍卒里)로 불러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군졸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지금 남외리 주택 담에 ‘왜 군졸리라는 이름과 군졸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지키고 알려는 노력을 너무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없애버리고 파묻어버린 역사와 역사유적을, 우리가 더 철저히 왜곡시키고 더 철저히 파괴시켜버리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나주초등학교에는 과거 이곳이 초토영이었다는 안내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관리들은 성리학에 사로잡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지닌 천주교를 사교(邪敎)라 부르며 적대시했다. 또 부패한 권력에 맞서 일어선 수많은 농민군의 목숨을 빼앗았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선 의병 역시 역도라는 이름으로 처형했다. 조선의 무지와 몽매함, 그리고 완고함이 나주초등학교 교정부지에 숨겨져 있다. 추운 겨울날 찾아갔던 나주초등학교 교정이 그 어느 곳보다 쓸쓸하고 무상했다.

나주초교 입구 주택가 담에 그려진 군졸과 군졸리 이름. 남외리 일대는 예전에 모두 나주 진영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도움말/나주시문화원, 나주초등학교, 나주성당

사진제공/나주시문화원

/최혁 기자 kjhyuckchoi@hanmail.net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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