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의 역사소설 깃발-충무공 정충신 장군
제2부 제2장 선사포 첨사 <259>

정충신은 군마병(軍馬兵)을 불러 명령했다.

“저 사신의 호마를 다른 암말에게로 끌고 가서 접을 붙여라.”

“금방 붙였잖아요. 그런데 또 붙이라고요?”

“그래. 기회가 왔을 때 우리도 좋은 씨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데 있었다. 암말에게 계속 접을 붙이면 아무리 천리를 달리는 명마라 할지라도 곤죽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폐마가 되거나 쓸모없는 말이 될 것이니, 사신의 발이 저절로 묶이게 된다. 그러면 판은 이쪽의 계획대로 굴러갈 수 있다. 이 또한 소실 하양 허씨가 고안해낸 지혜였다. 정충신은 그녀가 귓속말로 속삭여준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정충신은 길가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신을 부축해 자신의 말에 태웠다.

“큰 일날 뻔했습니다. 지체를 몰라보고 결례를 했소이다. 저는 제 여자를 데리고 농락한 건달로 알았지요. 그 여자는 내 애첩이었소이다. 젊으면 질투심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잘못본 것을 너그러이 접어주시오.”

사신은 말도 못하고 계속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커다란 말에서 졸지에 떨어졌으니 다리 병신이 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충신은 조심스럽게 그를 태우고 영빈관으로 들어갔다. 호사스런 방에 그를 누이고 몸을 살피니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약탕관에 보약을 끓이고 의녀(醫女)들을 불러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부은 발목을 적셔주었다. 의녀들은 조선조 초기에는 노비 계급의 동녀(童女)를 모아 내의녀, 산파, 간호의녀, 소아의 환자를 진료하도록 교육했으나 임진왜란이 나고 부상당한 수많은 군병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 질이 떨어져 기생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그래서 기녀 취급도 받았다.

“아이구 시원하다. 의녀들의 솜씨가 대단하오이다. 자,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사신이 정충신에게 예를 취하며 정중히 물었다.

“선사포 첨사올시다. 근무지에 있는데 전령이 급히 달려와서 어떤 불한당이 나의 애첩을 가지고 놀고 있다고 전해주었소이다. 그 말을 듣고 젊은 혈기로 가만 있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한달음에 달려와 다구리를 했는데, 바로 사신님이었군요. 정보를 잘못 알려준 자를 치도곤하겠소이다. 저 역시 품격없이 불같이 화를 내고 쌍욕을 한 것, 미안하오이다.”

“난 요동 총병 양소훈 장수의 문관이오. 총병 사신으로 조선에 급파된 것이오. 아시다시피 총병 휘하의 사대수 장수의 오천 병사들이 의주 대안의 방비를 위해 파견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신기영 좌참장 낙상지 장군의 휘하 남병 삼천 명이 압록강변으로 진출하였소. 그런데 낙상지 장수의 군량은 충분히 제공되고, 사대수 병사에 대한 지원은 없었소. 낙상지가 조선에 훈련도감을 만들어주었다고 해서 그에게는 융숭히 대접하고, 사대수에게는 푸대접이니, 섭섭한 일 아니겠소. 그래서 사대수 병사 먹인 것을 받으러 한양에 갔었던즉, 왕실과 호조에서는 평양에 가서 대가를 받으라고 했소. 평양성의 승리를 도모했으니 현지 출납의 원칙상 평양에서 양곡을 거두어가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곳에 와서 곡물을 운반하기 어려우니 은 팔천냥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오.”

“일만냥 아니었소?”

“사대수, 낙상지 병사 모두 팔천이니 일인당 일냥씩 팔천 냥이오. 평안감사 모리배들이 이천 냥을 덧붙여 착복할 요량으로 그런 못된 짓을 한 모양이오. 지방관들이나 중앙 사대부나 왜 그리 썩었소?”

정충신은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웠지만, 내색할 수 없어 달리 말했다.

“이 문제는 한음 이덕형 예판대감이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까? 예판대감이 명나라 사신으로 급파되어 파병을 요청하면서 군량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누루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의 위협을 받아 명군의 조선 파병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누루하치가 조선을 끌어들이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보내주겠다며 조정에 친서를 보냈다. 명나라를 부모국으로 여긴 조선으로서는 난처했다. 이때 이덕형은 묘안을 짜냈다.

이덕형은 요동과 만주를 지키고 있는 양소훈 총병을 만나 누루하치가 보낸 친서를 보여주었다. 누루하치의 친서를 받아본 양소훈 지휘부가 발칵 뒤집혔다.

“아니, 이 자가 ‘풍신수길과 함께 화친해 조선의 병화를 덜어주겠다’고?(相成平秀吉 消除朝鮮兵禍).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이 문건 가져오기를 잘했소.”

명으로서는 위협적인 여진족이 왜의 풍신수길과 화친하면 더욱 위협이 될 것이니, 명의 땅에서 전화를 입을 것 없이 조선 땅에서 왜를 막는 것이 상책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 누루하치가 조선을 돕겠다고 선수를 치는군요.”

그러나 누루하치의 친서는 이덕형이 변조한 문장이었다. 본래의 친서는 ‘풍신수길을 함께 쳐서 조선의 병화를 덜어주겠다’(相伐平秀吉 消除朝鮮兵禍)는 것이었다. 벌(伐)자를 획을 하나 살짝 비틀어서 성(成)로 바꾼 것이다. 한문의 초서란 흘려쓰기에 따라 伐자를 成자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혹 들통나더라도 그렇게 읽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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