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상화(광주대학교 교수)

문상화 광주대 교수

당당하게, 즉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말 속에는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은 범위와 성취의 정도가 정해져 있고, 또 그 일을 의심 없이 행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구성원에게 일을 맡기고 그 일이 수행되기를 암묵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찰관이 도둑을 잡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학생은 배움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장애인 주차구역에 장애가 없는 사람이 주차를 못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언술만 늘어가는 것을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불러온 거대담론의 붕괴 이후, 교묘하고 편협한 논리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안목을 넓히면 부끄러운 일도 핏대를 올리면서 자신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에 관한 재미난 고사가 있다.

어느 날 장자가 과수원에 들렀다가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을 봤다. 자신의 생명이 촌각에 걸린 걸 모르는 매미 뒤에서 사마귀가 매미를 손에 넣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겠지만, 그 사마귀 뒤에는 참새가, 그리고 참새의 뒤에는 장자의 화살이 앞의 목표물을 노리고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이익에 눈이 멀어 목숨이 위태한 것을 모르는 것을 보고 장자가 한탄하던 때에, 과수원 주인이 밤을 훔치는 줄 알고 장자를 향해 막대기를 휘둘렀고 황급히 과수원을 빠져나온 장자는 하루 종일 우울해 했다는 것이 당랑포선(螳螂捕蟬)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는다는 뜻의 당랑포선은 제 앞의 이익이 몰두하다가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좀 더 의미를 확대하면 편견에 빠져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뒤에 언제나 과수원 주인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불현 듯 깨닫는다. 노자는 이것을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라고 불렀다. ‘도덕경’에 나오는 이 말은 하늘의 그물이 넓고 넓어서 그물코가 성근 것 같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소이불루라는 말이 가지는 무게를 하루가 다르게 실감한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사람은 시간과 함께 성장해 간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그 날의 일을 떠올릴 때 부끄러움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한 그 당연한 것을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고, 시간이 지난 뒤에는 편견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것 일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과학의 힘을 빌려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은 맨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부분부터 무한대에 이르는 우주까지이지만, 실제로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신체의 공간은 넓게 잡아도 50cm에서 2m정도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사는 우리는 창공을 마음대로 나는 독수리의 시각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독수리 또한 평균온도가 영하 50도나 되는 성층권을 나는 비행기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게는 당연한 것이 시야를 넓히면 부처님 손바닥 위에 손오공 꼴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되, 지금의 당연한 것이 훗날 부끄러움으로 남지 않도록 옷깃을 여며야한다.

투기의혹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손혜원 의원을 보면서 참으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죽자“라는 손의원의 말과 행동이 국회의원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매미가, 사마귀가, 참새가, 그리고 혼비백산에서 도망치는 장자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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